설교전문
설교일 | 2022-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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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마22:15-22 |
설교제목 |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마22:15-22
2022년 9월 4일 [성령강림후 열셋째/ 교역자보건주일]
3년째 극성을 부리는 코로나 전염병이 좀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어제부터 외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코로나검사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조건을 완화하였다. 이렇게 해나가다가 정말 이른바 ‘위드코로나’ 되어서, 마스크 쓰기, 거리 두기, 소독하기 등의 불편함을 벗어나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그러나 코로나가 극복되었다고 방역당국이 말할 때까지는 절대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겠지? 오늘 설교는 2년 전에 써놓았다가 하지 못한 설교인데, 지금에도 아주 중요한 신앙문제이기 때문에 조금 고쳐 설교한다.
2년 전에 감신학보를 보았는데, 이쪽 면 저쪽 면에 두 칼럼 글이 서로 다른 입장에서 오늘의 현실을 보고 있었다. 한 칼럼은 세속권력이 코로나바이러스를 핑계하여 기독교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탄압하고 있으니 기독교인들은 정신을 차리고 이런 때일수록 예배에 더욱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다른 칼럼은 교회는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의 전염병과 전쟁 때에 세상을 지키고 돌보는 역할을 하지 않고 이기적이고 거짓된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되니, 앞장서서 예배를 멈추어 비대면 예배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였다.
감리교회 안에서도 이 문제는 심각한 논쟁이 되었다. 어떤 목사님은 대면예배를 몇 주 못드리고 나서는 하나님께 너무 죄송하다면서, 절대 다음부터는 대면예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하였다. 강릉의 어떤 목사님은 코로나 이후 한 주도 대면예배를 안 드린 적이 없다고 하더라. 나는 이런 태도에는 세상 권력에 기독교가 지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가 하면 서울의 어떤 목사님은 두세 달이나 예배를 내려놓고 사람들을 전염병의 위험에서 지키는 데 앞장서고 있으며, 교회가 어렵지만 교우들도 다 이해하고 한 마음이 되어 비대면 영상예배를 드리며 사회적 거리두기에 힘쓰고 있다고 하더라.
성실한 크리스천은 이런 문제가 고민스럽다. 이 문제는 사회와 교회의 관계성의 문제요, 현실 정치와 정치가, 공직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살 것이냐 하는 실제적인 문제와도 연관이 되고,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데에 있어서 거룩한 나라인 교회와 세속의 나라인 사회 사이에서 어떤 입장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상과 국가는 불완전하고 죄에 매여있으며 따를 수 없는 악한 권력이라고 보면, 우리는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항거해야 마땅할 것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도 우리는 정부나 공무원에 협조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에만 치중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만약 이 세상과 국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이 세상 질서를 잘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선한 양심의 길이기도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세속 정부나 공무원들의 지침을 잘 따라 행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이 세상에서 참되게 사는 것일까?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나?
오늘 본문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듣기 좋은 말로 짐짓 예수님을 칭찬한 뒤에 묻는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들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나? 그러자 예수님이 세금 낼 돈을 보이라고 하시며, 데나리온 하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그러자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셨다. 요즘 황제가 없고 황제에게 세금 낼 일도 없으니까 별로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씀 같지만, 우리의 사회생활, 시민으로서의 생활에 대해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세금을 어떻게 할 거냐? 이것은 ‘세상 권력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해?’ 하는 문제이다. 바울은 롬13:1-7에서 세금문제, 더 나아가 황제와 세상권력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다룰 때, 세상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고 한다. 조세를 바치는 것도 하나님의 사역자에게 할 마땅한 일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이 일에 항상 힘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은 기존 권력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의무를 다함으로 정부 말만 잘 듣는 보수 여당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로마서 13장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질서에 지배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정치적 영역에 아무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 그 배경이다. 바울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각 사람이 국가 권력에 복종함으로 사회적 질서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크리스천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의 사법적 권력을 통해 선이 포상받고 악이 징벌받으며 사람들의 기본생활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국가에는 다양한 대표자들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응당하게 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하나님께만 복종하고 세상권력에는 협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국가와 도시의 시민으로서 마땅한 의무와 역할을 다해야 한다. 시민의 역할을 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는 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동시에 기억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집은 저 하늘에 있다. 세상은 잠시 머물 곳이요, 세상나라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항상 부족하고 죄의 지배를 받는 나라이다. 우리는 크고 완전한 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 때, 종말론적 태도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그게 뭐냐 하면, 종말이 곧 온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며 철저한 믿음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우리나라에서 믿음 좋다는 크리스천은 거의 종말론적 입장에 서서 하나님 뜻에만 합당하게 살면 된다는 입장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렇게 성경대로 순수하고 철저하게 신의 도시만 바라보며 살아도 되는가? 그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을 현실부적응자들로 만들고, 오늘의 교회를 세상 속에 있는 외딴 섬으로 만들어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올인하며 거룩한 기준으로만 살 것이냐, 동시에 세상에서 선한 시민으로 살 것이냐? 그것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사는 한 거룩한 도성인 교회와 세속의 도성인 사회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는, 두 도시 사이에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요즘 한편으로 코로나바이러스 방역에 앞장서는 사람들 입장과 한편으로 정부정책에 반하더라도 예배를 드리고 세상질서에 거스르겠다는 사람들 입장 사이에서, 이런 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의 어느 교회를 담임하고 교회연합단체의 회장까지 역임한 한 목사가 교회와 신앙의 입장만을 강조하면서 정부와 사회의 다수와 대적하는 듯한 입장을 취했던 것을 보면서 크리스천들이 당황하는 것은 바로 이런 때문이다.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아간다.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지고 이루기 힘쓰나, 동시에 죄 많은 현실 사회에서 해야 할 선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다.
데나리온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자. 예수님은 그 유명한 선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를 외치셨다. 이 말은 하나님의 것만 하면 되니, 가이사 황제의 것, 즉 세속생활은 신경쓰지 말라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속 도시의 황제에게도 해야 할 의무를 해야하고, 거룩한 도시의 주님께도 마땅한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지만, 이 땅 위에 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다.
여기 데나리온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 가지 돈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시장과 직장, 혹은 관청에는 데나리온을 써야 했다. 반면 그들이 성전으로 나와 하나님께 예배할 때는 로마의 화폐로 드려서는 안 되었다. 거기에는 황제의 상이 있으므로, 소지하는 것 자체가 율법에 어긋난다. 그들은 성전에 나올 때 성전에서 쓸 수 있는 화폐, 세겔을 가지고 나와야 했다. 그들은 데나리온을 버릴 수도 없었고, 세겔을 버릴 수도 없었다. 세상에서는 데나리온을 썼다. 경제활동을 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로마라는 현실,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황제의 상이 새겨진 데나리온 화폐를 가지고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성전에서 하나님께 헌금할 때는 세겔을 사용했다. 그들이 하나님께 헌금하면서 우상인 황제의 상이 그려진 돈으로 드릴 수는 없었다.
제국의 정치는 데나리온을 요구하고,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세겔을 필요로 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득불 두 세상의 요구를 들으며 살았던 것이다. 로마의 화폐로 세금을 바치는 것은 세속 정치에 굴복하는 것인가? 로마제국과 기독교제국을 대립되는 개념으로만 보지말라! 어거스틴은 ‘거룩한 도시’라는 책에서, 거룩한 도성과 세속도시를 말하면서,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거룩한 도성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똑같이 살지만, 속이 다른 사람이다. 거룩한 도시의 개념과 사상,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거룩한 도시의 개념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고 더 반듯하게 서도록 하는 것이 신앙인이다. 현실을 무시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현실을 바로 잡고 더욱 살아있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사실 이 땅위의 제국과 도시는 누가 세웠나? 인간이? 인간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문제는 이 세속도시가 완전하지 않고 타락되었다는 데 있다. 세상의 제국과 도시는 인간의 욕심과 폭력, 거짓과 싸움이 난무한다. 성도는 제국과 도시의 시민으로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굴복은 아니다. 계21장을 보면, 종말론적 새예루살렘 도시의 미래는 바로 현재의 제국과 도시를 변화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선교의 비전이자 종말론적 신앙의 완성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고, 세상의 의무와 질서를 따르면서, 세상을 이용하고 세상에 적용해야 한다. 세상 황제, 권력자, 부자는 세상 로마의 질서를 유지하고 전쟁을 수행하며 백성들을 통치하였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세금이다. 유대인들과 당시 로마의 이방 사람들은 로마의 보호 아래 살았다. 바울의 복음도 로마의 대로를 따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원칙을 따라 세계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세속 문명을 복음의 도구로 사용할 지혜와 통찰력이 필요하다.
예수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속 세상의 질서를 그대로 인정하신다. 그당시 급진파 젤롯당은 로마황제에 내는 세금을 반대하고, 절대 타협불가를 외치며 싸웠다. 예수와 예수의 교회는 로마황제에 내는 세금을 반대하는 젤롯당은 아니다. 그러나 젤롯당에게 배울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간직하고 우선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나라 질서와 꿈을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 가운데 살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삶의 우선되는 일이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파묻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거룩한 도성의 꿈을 잃어버리고 세속의 도시에 모든 것을 바쳐버린다. 요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속한다! 바울이 그들을 향해 안타까이 외친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8-19)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20)
하나님의 것이 무엇일까?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숨결인 생명이다. 생명 속에 영원이 깃들어 있다. 하나님의 초월존재가 깃들어 있다. 곧 태초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형상이다. 세상의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들과 창조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생명과 영원을 보호하고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영생과 지혜를 전하기 위해 교회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 엄한 율법도 듣고 조정하고 새로 세워가면서.
야곱의 열두 형제 중 제일 촉망받았던 사람이 단연 요셉이다. 그가 결혼할 때 이집트 여인 아스낫과 하는데, 기원전 1세기 문헌 중에 ‘요셉과 아스낫’이란 문헌을 보면,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려 하니 율법에 위배되었다. 이방여인과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요셉은 아스낫을 이방 여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아스낫은 일주일 금식했다. 하나님은 아스낫을 받아주셨고 천사를 보내어 아스낫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선포해주셨다. 요셉의 가정은 그렇게 다문화가족으로 출발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이집트 총리의 아들이었으니 금수저 가족인 셈이었다. 구약 율법은 거룩한 원리, 변할 수 없는 확고한 규례를 적어놓았으나, 자세히 살피면 거룩과 세속의 지속적인 연합과 조정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있다. 그 엄한 율법도 조정하고 새로 세워가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가운데에서 거룩함을 유지하고 살았다. 거룩한 율법 말씀은 하늘과 땅, 거룩과 세속의 역동적이고 긴장감 있는 타협의 결과에 다름이 아니다.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한 내용이 중심에 들어가 있는 산상설교를 보라. ‘옛사람은 이렇게 말하였거니와 나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우리들이 볼 때는 너무 높은 윤리, 보통 사람들이 지키기에는 어려운 기준을 세워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당시 예수님 말씀을 산위에서 들었던 보통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님이 너무 푹신한 이불을 사람들에게 깔아준다’고 보았다. 그렇게 율법을 무르게 지키다가는 뭐가 남겠는가! 좀 엄하게 확실히 지켜야지! 하였을 것이다. 마태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값싸게 약속한 나머지 불법이 성할까봐 걱정하지 않았을까! 거룩한 타협, 창조적인 조합이 필요하다!
오늘 성경이 하려는 말씀은?
오늘 성경이 하는 말씀은, ‘우리는 두 도성 앞에 서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할 때에도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발은 이 땅 위에 서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땅에서 거룩한 백성의 삶을 바로 살 것인가? 우리는 거룩한 도시,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세속 도시, 대한민국 삼척시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세상의 법, 세상의 상거래, 세상의 방역 질서, 세상의 교육체계를 따라 살아야 하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 종말에 이뤄질 하나님 질서에 맞게 사는 것, 거룩한 기준에 올인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크리스찬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대립하고 있는 두 세계를 질서있고 조화롭게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서기 251년, 홍역이 로마제국을 강타했을 때, 사람들은 큰 고통과 불안을 겪었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마을은 적막해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기독교가 크게 부흥했다고 한다. 당대의 기독교인들은 지쳐있던 이들에게 천국의 소망으로 위로와 치유를 베풀었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펴서 아픈 자들을 간호하고 봉사했다. 이러한 사랑과 구제의 현장을 지켜본 율리우스 황제는 원래 기독교를 미워했었으나, 그 마음을 바꾸어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교도들에게도 간호를 베풀며 다른 사람들도 품을 수 있는 종교임을 보여준 것이었다. 고난의 시절에 전염병을 대하는 교회의 모습이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시민들이 승리하는 비결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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