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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와 아니요 (마5:33-37) [2025년 8월 24일, 성령강림후 열한째주일]
2025-08-24 10:26:24
박신진 목사
조회수   18
설교일 2025-08-24
설교말씀 마5:33-37
설교제목 예와 아니오

예와 아니오

5:33-37

2025824[성령강림 열한째주일]

 

우리 삶에 예와 아니오가 분명치 못할 때가 많다. 무엇을 선택하거나 살 때, 예와 아니오가 분명하지 않으면, 서로 어려움을 겪는다. “한 번 해보지요. 글쎄, 기도해보겠습니다,” 하는 식이다. 하겠다는 것인지 안하겠다는 것인지 모호한 채로 적당히 넘어간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불분명하여 서로 오해를 사기도 한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확실치 않게 짐작하며 넘어가는데 언젠가는 크게 오해하거나 불신을 일으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생활태도 전체에 이와 같이 예도 아니오도 아닌 회색지대가 많으면 발전하거나 전진하기 어렵다.

우리 문화 전통에는 이와 같은 포용하는 마음과 융통성이 많다. 예를 들면, 기와집의 추녀같은 것이다. 넓은 추녀 아래는 비올 때나 나그네들이 잠시 머물 때는 집안과 같다. 그러나 보통 때는 문밖이니까 밖이라고 볼수 있다. 사실은 안도 밖도 아닌데, 안이기도 하고 밖이기도 한 게 추녀공간이다. 우리의 전통 한식집은 이와같은 추녀공간이 굉장히 넓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청도 그렇다. 대청은 공간적으로는 지붕 아래 섬돌 위에 있지만 역할은 바깥으로 열려있어 안과 밖의 완충역할을 하는데, 그 공간의 거의 집의 반을 차지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문화, ‘안도 밖도 아닌 중간지역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생활방식의 독특한 향기와 장점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장점보다는 이런 문화의 단점을 발전시켜 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조상들의 포용의 문화는 우리들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모호함의 문화와는 다르다. 이것은 조상들의 바라는 바도 아니다. 우리들이 많은 경우에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태도와 행동을 많이 가지는 것은 문화를 잘못 발전시킨 것은 아닐까? 우리 조상들이 추녀와 대청마루를 만든 것은, 포용하며 모두를 품자는 것이지, 애매모호하여 책임을 회피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회 전체의 문제인 언어의 정직성

우리는 매일 말을 하며 산다.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말이다. 생각이 있고 느낌이 있으면 말로 표현한다. 이때 정직과 거짓은 말로 표현된다. 말을 바로 하고 실수가 없으면 인격이 훌륭한 것이다. 말의 사용이 바로 한 사람의 됨됨이이고 사회의 기초를 이룬다. 사람들은 거짓말하며 산다. 작정하고 거짓말 하는 경우도 있고, 대부분은 본의 아니게 혹은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추녀공간처럼 그냥 이도 저도 아닌 말이 거짓말처럼 되는 경우도 많다. 인격의 정직함과 성실함을 위해 말을 분명히 하는 문제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다.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7-8.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사람들은 맹세를 잘한다. 어머니 아버지를 들어 맹세하기도 하고, 하늘이나 땅, 하나님을 들어 맹세한다. 왜 맹세를 하나? 말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절대 권위를 빌어 맹세를 한다. 최상급의 말, 변명의 말로 과장한다. 진실한 말은 단순하고 정직하고 갈등이 없다. 기독교문화가 확립된 사회는 거짓말이 없는 사회이다. 교회가 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말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언어생활이 정직하여 신뢰받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국 감리교회가 영국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질 때 그들의 말을 신뢰를 받았다. 감리교인이라는 것 자체가 보증수표였다. ‘그 사람 메도디스트래.’하면 외상도 줬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말이 정직하여 믿을 수 있어 언행일치가 될 때 교회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질 것이다.

 

살인이나 간음, 이혼의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이며 가정적인 문제다. 그러나 맹세와 말의 정직함은 사회 전체의 문제다. 말이 거짓되면 사회 전체가 가증하고 불법이 자행되는 사회이다. 33절을 보면,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로 되어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레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온 것이다. 우리 말과 인격이 거짓될 때 우리가 욕을 먹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한다.

하나님은 인간본성의 타락의 열매들인 거짓말 하는 것, 계약을 파기하는 것, 위증하는 것 등을 막기 위해서 이 계명을 주셨다. 즉 거짓말은 하나님께 대한 죄라는 것이다. 말에 대한 무책임은 결국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임으로 절대 삼가야 한다. 더구나 이 말씀에는 이기적이고 사소한 문제들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게 하려는 뜻도 있다. 함부로 맹세함으로 생기는 혼란을 막고 동시에 거짓말 잘하고 불리하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인간의 거짓된 마음을 제어하기 위해 법으로 제정하신 것이다.

 

의도적인 왜곡-서기관 바리새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이름으로 하는 맹세를 지키지 않음으로 거짓 맹세가 되게 하는 것을 엄금하시는 계명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헛 맹세를 하나님 이름으로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하늘로도 맹세하고, 땅으로도 맹세하고, 예루살렘을 걸어서라도 맹세하여 자기들이 짓고 싶은 죄를 합리적으로, 그리고 율법에 틀리지 않도록 기술적으로 지었다.

23:16-22,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도 없지만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킨다,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도 없지만 제단 예물로 맹세하면 지킨다. 결국 이 맹세는 하나님으로 맹세하므로 절대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맹세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여 편리하게 악용했다. 헌법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과도 같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계명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버려 사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형편이 되었다. 주일을 함부로 범하여 이 계명 자체가 남루해져 버렸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한 말을 소중히 여겨 생명처럼 귀히 여기는 성도들이다! 세례받을 때 했던 서약과 직분받을 때 교회 앞에서 맹세했던 다짐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헌금 드리는 문제도 적당히 타협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주님 앞에 거룩한 십일조를 구별해 드리는 것은 믿는 이의 최소한의 의무인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계명보다는 자신의 상식과 합리와 경험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설교를 헛듣고 교만한 생각으로 성경공부하고 생활한다.

 

맹세하지 말라신 주님의 의도

주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이 계명 재해석의 진정한 의미는? 맹세 자체를 나쁘게 여기신 것이 아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엣세네파, 종교개혁 시절 재세례파(아나벱티스트), 퀘이커 교도들은 결혼 서약이나 법정의 맹세조차도 거부했다. 그러나 성경에도 맹세와 서약이 없는 게 아니다.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어 며느리를 구할 때 맹세하게 했고(24:3), 예수님도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께 맹세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느냐 했을 때 그렇다고 대답했다(26:63). 바울도 사도들도 맹세하였다(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니하노라.).

맹세가 나쁜 것이 아니라 맹세라는 말을 가볍게 하고 악용하는 것이 나쁘다. 아주 중요하고 결정적인 일에서의 맹세는 오히려 더 중요하다. 결혼 서약, 재물과 관련된 약속을 할 수 있고, 했으면 지켜야 한다. 인간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맹세, 다른 사람을 착취하기 위한 맹세, 자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거짓으로 하는 맹세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37)

 

예와 아니오

예수님은 맹세에 대한 교훈을 주시는 중에, 본문의 말씀을 하셨다. 예할 것은 예라고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해라, 이에서 지나서 구구하게 맹세하거나 변명하는 것은 죄요 악이다, 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명분론에 빠져 아니오 라고 해야 할 것도 율법의 자구에 조금이라도 저촉되는 것 같으면 하지 못하고 어물쩡하게 넘어갔다. 정확하게 하지를 못하고 에에하는 식이다. 맹세는 하지 않았지만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표리부동하고 언행불일치한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하여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이라는 명분 앞에서 이와같이 모호한 태도를 취할 때가 많을 것을 예수님이 이미 예견하신 듯하다.

서양문화는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문화이다. 안되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안되는 것이고, 되는 것은 또 어떤 일이 있어도 되는 것이다. 런던 웨슬리 채플에서 우리를 안내하신 할아버지 봉사원은 한참동안을 기다리게 하면서도 그날이 안내하는 날이기 때문에 우리를 끝까지 안내하셨고, 웨슬리의 첫 목회지인 뉴룸교회의 안내원 봉사자들은 예약없이 안내할 수 없는 자기들의 원칙 때문에 거듭 ‘sorry'를 연발하면서도 챨스 웨슬리 생가의 안내를 거절하였다.

유럽의 바캉스 시즌도 내놓고 쉰다고 써서 걸어놓는다. 불편해도 할 수 없다,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모두가 불편을 참는다. 근무 안한다(아니오!) 했으니까, 그들의 바캉스를 방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친구 선교사 얘기를 들어보니, 무려 여름 한달이 지나야 일을 볼 수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누가 뭐래도 유럽은 살만한 나라이다. ‘어떻게 그렇게 잘 살까?’ 거듭 생각해보니 기독교 정신이 바탕이 되어 있었고, 구체적으로는 예, 아니오가 분명한 책임있는 생활 태도가 중요한 요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하면?

예와 아니오가 분명하면 첫째로, 내가 누군지 무얼 할지 분명해지기 때문에 행동이 확실하고 지속적으로 된다. 계속 공부할지 직업으로 나갈지, 유럽 사람들은 고등학교 때 대충 정해진다. 이도 저도 아니게, 대학 졸업할 때까지 한길로 가며 세월만 보내는 우리들의 모습과 차이가 있다. 실업계는 실업계대로 자기 공부와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펼쳐나가는 인생이 있고, 인문계는 인문계대로 공부하여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으며 자기 일에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노력한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것이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하면 둘째로, 대인관계에 오해나 아픔이 적다. 우리 속담에는 맑은 물에 고기가 적다는 게 있다. 그 말은 흐릿해야 친구가 많다는 얘기도 된다. 융통성과 포용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나, 흐릿해도 우선 분명하게 해놓고 흐릿해야 한다. 처음부터 너무 흐리멍텅하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우리 삼척 학생들 보면 친구들과 어울리고 의미 지키느라 공부를 못한다. 시험 때에도 공부 안 한 척하는데, 안 하는 척하다 진짜 안 하고 마는 아이들도 많다. 헤어지자 해놓고 또 만나고, 만나면서도 확신이 없고, 그러다 얽히고... 사랑이란 눈물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하면 셋째로, 생활에 발전이 있다. 어느 지점에서 일단 분명히 짚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어떤 일에 대하여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계속 그 문제는 정리되지 않은 채로 넘어가서 앞으로 전진하기 보다는 미련을 가지고 자꾸 뒤로 돌아가는 사람이 되기 쉽다. 신앙생활도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모호한 생활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하게 시인하고 나아가라! 자기 믿음의 내용을 정리하여 무엇을 믿고 안 믿는지 분명히 해야 믿음이 힘있어지고 깊어진다.

 

애매모호함

특히 신앙생활에서 예와 아니오가 분명해야 한다. 예 할 것을 아니오 하는 신앙인들이 있다. 늘 삐딱하다. 아멘 하면 될 것을 괜히 노멘부터 한다. 예배 시간에 졸거나 딴 짓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무엇이든지 부정적으로 보려고 한다. 웨슬리가 처음 목회한 뉴룸쳐지에는 강단 위에 유리창이 하나 있어 조는 교인들을 확인하게 되어 있다. 웨슬리는 이렇게 철저히 하나님께 대하여 말씀에 대하여 예라고 하며 참여할 것을 가르쳤다.

아니오 할 것을 예 하는 신앙인들도 있다.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우리 영혼이 보호함을 받는다. 주일에 다른 모임이나 축하 자리는 아니오 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태초에 약속한 시간이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습관과 자리에 대해서도 아니오 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단이나 사이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 아니오를 아니오라 못하면 차츰 영혼이 죄악에 지배당하게 된다.

예 할 것을 예 하라! 하나님, 예수, 교회, 성령, 말씀에 대하여 아멘, 믿습니다라고 분명히 응답하고 고백하라! 아니오 할 것을 아니오라고 하라. 불신앙의 모임, 불신앙의 생활을 반복, 허용, 합리화 하다보면 신앙 잃는다. 예가 분명치 못하면 아니오도 분명치 못해진다.

물론 예와 아니오가 분명할 수 없는 때가 많다. 정이란 이상해서 뜻대로 마음 먹은대로 예와 아니오가 잘 안된다. 신앙도, 인간이 약하다 보니 많이 흔들리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누구냐, 무얼 해야 하느냐 하는 것도 평생의 물음이다. 답이 예와 아니오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모호한 점이 많은 인생이기에 더욱,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예와 아니오로 분명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모호한 회색지대, 이도 저도 아닌 입장과 시간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먼저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그리고 나서 한국인의 미덕인 융통성을 발휘하여 포용할 줄 알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될 것이다.

 

결론

사람들이 말을 너무 잘하는 것이 문제다. 책임을 져야 진실한 말이 된다. 거짓말을 몰아내고 손해를 보더라도 진실을 지켜야 한다. 예수님, 어려운 말이 없으셨고, 정직하고 단순하며 능력이 있었다. 예수님은 말과 삶이 일치된 분이셨다. 자신이 선포한 말씀에 책임을 지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그 말씀에는 구원이 있었고 생명이 있었다. 용서와 사랑과 위로가 있었다. 주여, 우리에게 이런 진실한 말을 주소서!

영어로 예와 아니오는 예스 엔 노우이다. 프랑스 말을 한마디 몰랐는데, 언젠가 처음 배운 프랑스 말이 예와 아니오, “, 이었다. 독일말은 야, 나인이다. , 아니오만 분명히 써도 굶어죽지 않는다, 인정받고 존경받는 삶을 살 수 있다. 참으로 쉽고도 기본적인 두 마디 말, 예와 아니오를 잘 하라! 여기에 우리 인생과 믿음이 달려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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