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 설교일 | 2026-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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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말씀 | 고전1:18-25 |
| 설교제목 | 십자가의 도 |
십자가의 도
고전1:18-25
2026년 2월 1일 [주현절넷째주일]
우리가 믿고 따르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는 것은 언제나 십자가이다. 예배당의 강단에도 십자가는 걸려있고, 성전 첨탑 위에도 십자가가 솟아있다. 목회자의 가슴에도 성도들의 뱃지에도 십자가가 놓여있다. 지난달에도 교우 몇 분이 새 차를 사서 기도해 달라고 하여, 기도해주고 차에 달아드리는 나무십자가를 달아드렸더니, 좋아하였다. 십자가는 우리의 상징이요, 표시이며, 우리의 가치와 행동방식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십자가가 처음부터 이렇게 자랑스러운 상징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원래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반역자나 배신자와 같이 가장 혐오하는 범죄자에게 내리던 잔혹한 형벌이었다. 공개적인 수치의 상징이었고, 실패와 패배의 표식이었다. 그런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이라 하고, 그 위에 달려죽은 사람을 구원의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당시 문명의 최고라고 인정받았던 헬라문화에서도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표식이었다.
지혜를 자랑하던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음이었고, 표적을 구하던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는 걸림돌이 되었다. “구원자라면 왜 그리 부끄럽고 무기력하게 죽는가?”, “능력이 있다면 왜 십자가를 피하지 못했는가?” 이런 질문이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가득 채운 질문이었다. 오늘날도 당시 십자가와 같은 실패와 죽음의 상징이 있다면, 그것을 왜 피하지 않는가 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강해 보이는 것, 잘나 보이는 것, 성공하는 것, 앞서가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세상에서 패배의 상징,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 희생,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은 여전히 미련하게 보인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한다. 십자가가 구원의 근거가 된다면서 십자가의 정신, 십자가의 가르침을 모두 따른다. 본문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문화를 내세우려 할 것이고, 교회의 조직이나 교회가 하는 사회봉사나 취미활동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을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하여 교회가 가장 내세우고 자랑해야 할 것은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자랑, 교회의 장점은 달리 없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바로 십자가의 복음만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말한다.
멸망하는 사람들
멸망하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요즘 금값이 천정부지니까, 한 돈에 백만원을 넘어가니, 십자가 목걸이나 목깃에 붙인 십자가 뱃지는 좋아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십자가 목걸이의 반짝이는 금과 십자가 장식의 아름다운 모양과 금의 액면가를 좋아할 뿐, 십자가의 희생과 죄 사함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이 없다. 참으로 십자가가 담고 있는 의미와 진실을 세상은 사랑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들은 복음에 관심이 없다. 죄에 대해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영혼의 문제를 가치 없다 생각한다. 세상은 그냥 먹는 일, 즐기는 일, 그것을 잘할 수 있는 돈과 권력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예를 들면 그들에게 큰 재난이 닥쳤거나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스런 일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가 그들을 향해 십자가의 복음을 얘기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북한 사람들은 내가 기독교 목사라는 얘기를 듣고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묻더라. “정말 선생님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고 목회라는 것을 합네까?” 어떻게 멀쩡하게 생긴 분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어투였다. 그들은 보이는 현상과 물질계만이 실재한다고 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초월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가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을 때, 정말 믿음의 문제, 영혼의 문제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복음을 들고 그들을 만나면 마치 절벽을 만나는 것 같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7:6)고 하셨다.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그것을 준 사람을 찢어 상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 개에게 성경책을 준다면 개가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개는 먹을 것만 바라는데 성경책은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 가보니까 관광지에서 원숭이들이 사람들에게 다가오는데, 완전히 먹을 것에만 관심을 두지 성경말씀에 관심있는 원숭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준다면 돼지가 밟아버리고 신경질을 내며 꿀꿀거릴 것이다.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문자대로 전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들은 복음을 경멸하는 것도 모자라 복음에 대해 화를 내고 오해한다.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는 그리스도인
멸망하는 사람들은 그렇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만큼 존귀하고 자랑스러운 것이 없다. 십자가는 구원하는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십자가의 복음이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을 극복하여 하나님께 이르게 하는 길인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한다. 하나님은 어리석업보이는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조차 십자가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일부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멸망하는 자들을 부러워하며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기까지 한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19절)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를 무시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신다. 인간은 늘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지식이 쌓이고 철학이 깊어지면, 기술이 더 발전하면 더 나은 세상, 더 살기좋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것이 어디까지 왔느냐 하면, 인공지능 AI까지 왔다. 그러나 세상의 지혜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
인공지능이 ‘deep learning’을 하여 스스로 배워 세상의 필요를 다 채워준다 해도, 그것이 다시 어떤 재앙이 되어 인류문명을 덮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십자가의 아픔과 십자가의 낮아짐과 십자가의 고난과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받아들이지 않고는 세상과 교회가 바로 설 수 없다. 십자가 위로 난 길, <자기희생과 은총으로 모두를 사랑하는 길>을 걷지 않고는 바른 신앙을 알기 어렵고, 이 세상은 구원받을 수 없다.
올해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1885년 4월에 복음을 들고 왔으니까. 한국선교 141년이다. 10여 년 전 130주년일 때 조선일보 기자가 두 선교사의 고향인 뉴저지와 펜실베이니아를 방문해서 기사를 썼다. 아펜젤러가 한국에 올 때 몸무게가 80kg이었다 한다. 백인으로 건장한 체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5년 한국에서 선교하고 1900년에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갔을 때 병원에서 몸무게를 쟀더니 60kg이었단다. 15년 선교하는 동안 20kg가 빠진 거다. 미국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깜짝 놀란 것은 아펜젤러가 그 사이에 얼마나 늙었는지 노인같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는 안식년을 마치고 2년 만인 1902년, 충남 서천군 어청도 앞바다에서 성서번역을 위한 선교사들 모임에 가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배 사고를 당해서 순교한다. 그때도 사실 그는 수영을 할 수 있기에 살아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자기의 성경번역을 도와주는 한국인 조수와 여학생을 살리기 위해 갔다가 물속에 잠겨 버렸다. 시신은 찾지도 못했다. 지금도 아펜젤러 선교사 무덤에는 시신이 없고 비석만 있다. 십자가라는 게 말뿐인 게 아니다. 그것은 삶이요 희생이요 사랑이다. 교회가 이 십자가를 외면하고 부끄러워한다면 어떻게 교회다운 능력과 영광을 내세울 수 있겠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를 버리고 다른 길을 걷거나, 십자가 없는 기독교를 동경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는 성도의 영적인 젖줄이며 영성의 바탕이다. 중세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잃어버리고 국교의 명예와 권력의 요람에 잠들어 있을 때 결국 생명력을 잃었다. 서양의 근세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잃어버리고 도덕과 교양을 강론하는 동안 교회는 쇠퇴하였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위기에 놓인 교회와 성도들을 바르게 살릴 수 있다.
일부 기독교 귀족들이나 극단적 은사주의자들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 다른 어떤 것을 십자가의 복음 대신 내세우려 하였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사는 것이나, 특권층으로 사는 것이 곧 신자의 축복이요 자랑이라고 가르친다. 기적이나 은사가 나타나서 신유나 입신이나 방언하는 것들이 기독교 신앙의 표적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의 축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받고 천사의 방언이나 하늘의 기적이 나타날지라도, 십자가 없는 복음은 절대 우리가 따를 길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겠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리스도인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2-24절) 주님께 부르심을 입은 참 그리스도인들은 표적을 행하는 유대인이나 지혜를 논하는 헬라인들이 부끄러워하는 십자가를 끝까지 붙든다. 그들은 십자가를 자랑하며 십자가의 복음에 의지한다. 십자가 때문에 감격해 울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이다. 십자가가 참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자랑이요 기쁨이다. 할렐루야!
그런데 보라! 그 초라하고 낡고 오래된 십자가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이기며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이다! 그리스도인이 내세울 것은 십자가의 복음 밖에는 없다. 물론 신자의 삶에는 여러 가지 은혜와 풍성한 축복이 있다. 영감이 넘치는 기도와 살아있는 찬양, 교제와 나눔 들이 있다. 주의 이름으로 하는 봉사와 헌신의 기쁨이 있고 선교와 교육과 기독교적 문화생활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은 십자가의 복음이요 죄 사함의 은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을 때 성전에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쳐있던 휘장이 쫙 갈라졌다. 이제 십자가로 말미암아 양의 피나 송아지의 피로 드리는 희생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이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다시는 죄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이어져왔던 온갖 예배와 제의의 행사를 뚫고 하나님의 은혜가 십자가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리하여 십자가의 달리신 그리스도를 붙들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천국의 거룩한 시민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최초의 인류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죄를 지었을 때 나타난 것은 하나님 보기를 꺼렸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얘기하던 아담 하와 부부가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나무 뒤에 숨지 않는가!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졌다. 죄를 지으니까 하나님과 불편해진 거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나타난 것이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인하는 사건이었다. 죄는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게 하며, 사람끼리 싸워 미워하여 죽이게 만든다. 죄는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이웃과 분리시킨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서로 죽이는 인류에게 예수님이 오셨다. 흠도 없고 티도 없으신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셨다. 그리고 이 우주적이고 위대한 희생,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사랑으로 화목하게 하신 화목제물이 되셨다!
얼마나 우리 사회가 배타적이고 화목하기 힘든 사회인가? 가족끼리도 물질만 주고받고, 내심 돈으로 빨리 계산하는 사회가 되었다. 명절이 지나면 휴게소에 음식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인단다. 시골 가난한 시부모님들이 정성껏 싸준 음식을 가져오다 휴게소에서 다 버리는 것이다. 못사는 시부모를 가난하다고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회의 이 불화하고 차별하는 모습들을 다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고, 남자와 여자를 화해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복음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만나고 난 후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한 농사꾼이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다. 그 농사꾼은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말았다. 모든 것을 다 버렸다! 그 밭을 사기 위해. 그 밭에 있는 보화를 얻기 위해!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복음은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좋은, 구원하는 진리이다. 십자가에서 보여준 능력, 십자가에서 보여준 생명, 십자가에서 보여준 진리, 십자가에서 보여준 사랑이 험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살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교리를 보수하고 진보적 인사들은 사회생활의 실천을 강조한다. 오순절성령운동가들은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고 경건주의자들은 기도와 영적 충만함을 사모한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 참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같이 십자가를 붙들 것이다. 어떤 교파 어떤 전통이든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다.
십자가를 자랑하자!
93년도엔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김포공항이 가까워오자 나는 그리운 마음에 비행기 창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전에 못 느낀 특별한 풍경이 있었다. 그것은 공항 근처가 빨간 등으로 가득 차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무슨 등일까 싶어 계속 자세히 보았다. 그러자 그 모든 빨간 등이 교회의 십자가였다. 원래 빨간 빛이 파장이 길어 가장 멀리까지 잘 보인다. 공항 근처에 있는 수백의 교회에 다 붙어있는 빨간 십자가 등이 하늘에서는 가장 잘 보여서 한국의 김포공항이 다 빨갛게 보였다. 솔직히 교회마다 켜놓은 빨간 십자가가 온 하늘을 가득 채운 것은 보기에 좀 질렸다. 지금은 확실히 덜해졌더라.
이렇게 십자가를 내세우고 크게 달고 빨갛게 불까지 켜놓는 한국교회인데, 정말 십자가를 사랑하며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나?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보다는 영광과 축복만을 사모하고 있지 않은가! 십자가만이 우리의 능력이요 참 지혜다! 우리는 하루도 이 진리에서 멀어져서는 안된다. 세속의 가치관보다 복음의 가치관이 뛰어남을 믿고 의심치 말자. 십자가를 자랑하라!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 모두를 구원함을 담대히 말하며 드러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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