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 설교일 | 2026-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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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말씀 | 행2:42-47 |
| 설교제목 | 예수 안에서 서로 교제하고 |
예수 안에서 서로 교제하고
행2:42-27
2026년 4월 26일 [부활절 넷째주일]
컴퓨터가 큰 탈이 나서 전문가에게 보였더니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더니 아무리해도 안되니까 아주 중요한 자료만 남길 수 있도록 조치하고 모든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새로 깔면 된다고 하였다. 어떻게 갑자기 새로 까느냐 하니까 복원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사람과 교회도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완전하지 못하여 때로 고장날 때도 있고 잘못될 때도 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고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가? 그게 바로 성경이다. 오늘의 사도행전 본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무엇인가? 어떤 삶이 그리스도인인가?
성도의 교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적인 선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냥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교회를 다닐 뿐, 그 삶이 어떤 삶이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그렇게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도 똑같은 사회인이라 생각하는 게 대부분이다. 다만 종교적인 관심을 가지고 일요일이면 교회 나가는 사람이라 여길 뿐이다. 그나마 좀 좋게 봐준다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좀더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는 정도로 인정해 줄 것이다. 물론 요즘은 그러지도 않는다! 교회를 다닌다면서 더 못되고, 나쁜 사람도 많긴 하니까!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늘 본받고 따라야 할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42절은 베드로의 설교에 3천 명이 회개한 이후에 예루살렘 교인들의 신앙 모습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내용상 본절은 초대교회의 생활을 묘사한 것으로 43절부터 47절까지의 내용에 포함되는 것이다. 성서주석가들은 앞부분에 연결되는 절로 구분하였다. 외적인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데 이어 내적인 생활의 발전이 따랐다. 역시 교회는 교인들이 변화될 때 진정으로 부흥되었다 할수 있다. 그들은 네 가지에 힘썼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데에 힘썼고, 서로 교제하는 데에 힘썼으며, 떡을 떼기에 힘썼고, 그리고 기도하기에 힘썼다. ‘전혀 힘쓰니라’는 말씀은 그 일에 헌신하였으며, 변함없이 지속하였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43절에서 47절까지는 초대교회, 오리지날(original)한 교회가 힘쓴 것이 성도의 교제였음을 말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었고, 모든 물건을 서로 함께 나누어 썼다(통용하고)! 그리고 초대교회는 재산과 소유를 합쳤다. 거기다가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완전한 공동생활, 성도의 교제가 이뤄지는 것이 초대교회, 오리지날한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때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의 교제 안에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교제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단순히 친목에 가깝다. 그냥 교회를 출석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목적없이 소일거리로 외출한 거랑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선교회는 집사 권사의 직함도 있고, 속장 회장의 역할도 있는데, 굳이 교회 안에서도 이름을 부르며 “아무개야, 누구 엄마야!” 하기도 한다는데, 성도의 교제라는 걸 까먹고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성도의 교제인데, 성도의 교제는 단순한 친목이 아니다. 성도의 교제는 단 한 가지에 근거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우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다른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성도의 교제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 말은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생긴 죄로 인한 불화가 있기 때문에 인간 사이에서도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왜 교회 안에서 자기들끼리 찢고까불면서 갈등하고 싸우냐 하는데, 그것이 사람들이 모인 곳의 특징이다. 싸우지 않으려면 모이지 말고 산속에 들어가 혼자 살면 된다. 예수님이 없다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불화가 있을 뿐이다. 실제로 굳이 신앙을 집어넣지 않으면, 인간의 불화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그런 불화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화해시키는 분이기 때문에, 그의 사랑을 통해서 교제한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계모임이나 동창모임처럼 그렇게 모여 놀고 잡담하는 데에만 치우치지 말고, 제발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처럼 예수 안에서 성도의 교제로 들어가기 바란다. 여러분도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처럼 영적으로 조금씩 변화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믿음의 사람들로 변화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 교제, 애찬, 그리고 기도- 이 네 가지에 힘쓰라고 사도행전은 가르쳐준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
첫째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에 힘썼다. ‘가르침을 받아’ 라는 말이 영어성경으로는 ‘they devoted themlves to the apostles' teaching'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사도들이 가르치기에 힘쓴다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힘써 받는다는 말이다. 예로부터 가르침을 잘 받는 시대가 영적 부흥의 시대요, 위대한 시대이다. 원주 있을 때 명륜교회는 목사님을 중심으로 성경배우기에 힘쓰면서 교회가 갑절로 커지더라!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사도의 가르침을 잘 받을 때 일어났다. 유명한 부흥사가 도시에 오면 모든 교회 교인들이 그 말씀듣기를 사모하여 열일을 다 멈추고 가르침을 듣기 위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김교신 선생같은 이는 유영모 선생의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정릉에서 서대문 어귀까지 매 주일 걸어서 다녔다. 가르침을 받기에 힘쓰던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영혼이 깨어있었고 교회가 영적 부흥을 이루었다. 우리도 대학시절에 유명한 강사의 말씀을 듣기 위해 수유리에서 연세대학으로 버스 타고 다녔고, 명동으로 다녔다.
어느덧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는 데 열심히 식었다.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가르치려고 하고 남에게 자기 주장을 펴는 데에 익숙한 시대이다. 우리 시대의 영적 위기는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 초대교회처럼 가르침을 받는 데에 더욱 집중하고 노력하자. 가르치는 사람보다 가르침의 내용, 그 가르침의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집중할 때 변화와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1)사도들의 가르침은 설교다. 설교시간에 가르침을 받기에 노력하는 사람들은 영혼이 깊어지고 풍성해진다. 2)사도들의 가르침은 성경공부다. 3)사도들의 가르침은 신앙 독서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강의나 교육이다. 이런 것에 열심을 내는 교회는 틀림없이 부흥된다.
성도의 교제
둘째로,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서로 교제하기에 힘썼다. 오늘 설교 처음에 언급한 대로, 성도의 교제는 초대교회의 본질을 보여준다. 교제라는 말은 사도행전에 몇번 쓰였으나 바울서신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있는 성도들과의 교제가 교회생활이다. 믿는 사람들끼리 어떤 차원으로 어떻게 교제하는가를 보면 그들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
교제, 즉 ‘코이노니아’라는 이 말은 정신적 교제와 물질적 교제를 다 포함하고 있다. 교제의 차원이 많이 있다. 초대교회의 교제는 깊었고 폭이 넓었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의례적인 교제는 별 느낌이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깊게 교제할수록 심령이 변화되고 각양 은사를 맛보게 된다. 오래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성도의 교제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면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한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농담을 나누거나 게임이나 운동을 하는 차원이 아니다. 여자들은 옷이나 화장품 얘기, 남자들은 축구 얘기나 주식 얘기만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초대교회의 교제는 안으로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공감하고 확증하고 간증함으로써 함께 나누는 교제요, 밖으로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수준이었다. 말하자면 원시 공산사회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었다. 믿음 안에서 마음이 하나되었고, 내 것 네 것을 따지지 않고 평등한 사회, 함께 어울리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다.
어느 선교회에서 집사 한 분이 선교회 탈퇴하겠다고 펄펄 뛰었다. 그 이유는 어느날 선교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함께 영화를 보고 밥과 차를 먹는 모임을 가졌는데, 자기는 빼놓고 갔다는 것이었다. 이유없이 자기와 초신자 하나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그 모임이 이뤄진 것을 나중에 안 것이다. 회장과 그 모임을 주선한 권사가 가서 미안하다 말하고, 위로함으로 일단락되었지만, 뒷맛이 남았다. 문제는 기본적인 마음의 태도에서나 하나님과의 신실한 교제를 바탕으로 서로 마음을 열고 어울리고 교제해야 성도의 교제이다.
애찬과 성찬
셋째로, 그들은 떡을 떼기에 힘썼다. 떡을 떼었다는 것은 세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성찬과 애찬, 그리고 보통 식사의 경우이다. 아마 이 세 가지를 다 겸한 것이었을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같이 모여서 먹는 애찬과 성찬을 같이 가졌다. 두 가지는 차차 분리되었고 나중에 애찬은 교회 내에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으므로 폐지되고 성찬만 남았다. 떡을 떼는 데에 힘썼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하겠지만, 이 말씀은 열심히 모였다는 말이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마음이 하나되며 기쁨이 있는 밥상 공동체를 이루었다.
요즘 우리 교회는 예배 후 애찬에 참가하는 인원이 많아지고 있다. 300명 가까이 먹으니 1부 예배에 나오는 인원들과 그밖에 점심식사에 참여하지 않는 소수 인원을 빼면 거의 모든 성도가 점심 공동식사에 참여한다. 사실 이건 어렵지만 아주 중요한 사역이다. 교회에서 지출되는 작은 예산으로 점심 준비에 애쓰는 여선교회에 이 기회를 빌어 치하를 드린다. 음식 봉사하는 이들에게 건강을 주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어주시기 바란다. 음식을 나눌 때 성도들이 모여 나누는 음식은 애찬이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를 써서 ‘아가페 밀’, 애찬이라 부른다! 즉 밥을 나누면서 사랑을 나눈다는 것으로서, 순전한 마음이 모여 하나되는 자리이다.
애찬을 준비할 때는 사랑으로 정성껏 하여야 하고, 봉사할 때는 부득이 함으로나 억지로 하여 불평이나 원망이 생기지 않도록 하자. 나눌 때는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며 먹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수고하신 분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거기에 불평이나 시비가 있을 수 없다. 교회 일에 봉사하느라 늘 먹기만 하는 이들은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수고하는 이들을 위해 말 한마디라도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하고, 여건이 되는데도 봉사하지 않았던 이들은 이제부터라도 주방에서 함께 봉사하기를 청한다. 이 성도의 애찬은 초대교회 때부터 이뤄진 일이니, 할수 있는 한 잘 살려가시기 바란다!
또한 떡을 뗀다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거룩한 성례를 따라 성찬을 행하는 것이다. 성찬을 받을 때는 믿음으로 받고, 주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하나님과 영적으로 깊이 교통하고 하나되며, 나아가 모든 성도가 주 안에서 하나되는 일들을 이루게 된다. 30년 전쯤에 고양시에서 목회할 때 지금처럼 한달에 한번 오후예배에 성찬을 거행했는데, 성찬받을 때면 통곡하듯이 소리내어 울면서 받는 자매들이 있었다. 권사님들과 집에 심방가보니, 너무 생활이 힘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향에서 다니던 교회를 떠나 타향을 떠돌면서 생활이 힘들었는데, 찬양과 함께 성찬을 받으니 너무 감격하여 통곡하면서 성찬을 받는 것이었다. 성찬을 받고나면 영혼이 배부른 것 같다고 하였다. 성찬을 거행하기에 힘쓰며 그 성례를 철저히 믿음으로 받게 될 때 교회는 부흥되며 성도들의 영혼은 건강하게 성장한다.
기도- 간구, 도고, 감사(딤전2:1)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힘쓴 네 번째 일은 기도이다. 교회는 처음부터 기도에 힘썼고, 결정적인 순간 기도로 발전하며 문제를 해결하였다. 무엇보다 교회는 기도하는 모임이다. 주님은 성전을 청결케 하실 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고, 실제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기도의 힘으로 발전하고 있다. 기도의 등불을 끄지 말자. 기도의 용사가 교회를 살린다. 스스로 심지를 돋우라.
기도의 깊이만큼 믿음이 깊어진다. 기도의 분량만큼 영혼이 풍성해진다. 특별히 간구와 도고와 감사를 주님께 드리자(딤전2:1). 구체적인 간구의 기도는 우리 삶의 초점을 더욱 분명하게 하고 삶의 동기를 유발시켜 힘있는 생활을 하게 한다.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 삶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그림으로 그려 보고하고 간구함으로 더욱 구체적인 목표와 비젼이 있는 생활을 하게 된다. 간구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눈동자가 희미해지지 않고 눈빛이 앞을 향해 빛나게 된다.
도고란 중보의 기도다. 중보의 기도를 많이 드리자.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마음이 지쳐있고 스스로 설수 없이 낙심하고 탈진할 때, 중보의 기도로 연결되어 있는 영적인 연대의 줄이 여러분을 일으켜 줄 것이다. 지금은 내가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지만, 언젠가는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할수 있을 때 힘을 내어 기도를 저축하라. 남을 위해, 서로를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자. 의인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킨다.
감사의 기도가 더욱 드려지게 하자. 감사의 기도는 우리를 불평과 원망과 분노에서 벗어나게 한다. 정말 짜증나고 모든 것이 싫어질 때, 작은 감사의 조건이라도 찾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보라. 때로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것이 없을 때에라도, 조건 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시작해보라. 그러면 내 심령의 색깔이 달라진다. 우울에서 명랑으로, 낙심에서 소망으로, 조급함에서 여유로움으로!
43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교회에는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 이는 ‘공포’(terror)가 아니라 존경심과 공경하는 두려움(owe)이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 원주민들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졌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신11:25)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교제하는 교회였다. 교제하는데 우리의 교제 안에 복음 자체인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예수 없이 성도의 교제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네 가지에 힘씀으로 교인들이 든든이 서고 교회는 부흥하였다. 사도의 말씀받기에 열심내기를, 성도의 교제를 단단하게 이뤄가기를, 애찬과 성찬에 바르게 힘쓰기를, 그리고 기도에 힘쓰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진정한 부흥의 시대를 다시 회복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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