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 설교일 | 2026-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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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말씀 | 요한20:24-29 |
| 설교제목 |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 |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
요한20:24-29
2026년 4월 19일 [부활 셋째주일]
영적인 감수성이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우리 주위에 보면 신앙을 쉽게 받아들이고 잘 믿는 사람이 있다. 그리 자세히 설명해주거나 결정적인 사건이 없어도 그냥 받아들이고 순순히 따라오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신통할 수가 없다. 신앙체험도 잘하고 깊은 영성을 금방 가지는 것 같다. 말하자면 영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요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가하면 신앙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왠만해선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세히 설명해주어도 의심나는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교회를 다니는데도 좀처럼 은혜 체험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영적 감수성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면 이런 문제에 부딪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은혜받았다고 울고불고 난리인데 냉랭해서 비판하거나 도망가 버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따돌림을 당하게 했다. 아멘으로 받아들여야지 따지기는 뭘 따지냐고 하면서... 요즈음 이런 냉정파가 예전보다 훨씬 많아진 것 같다. 그래서 기도모임이나 부흥회가 예전처럼 모이지를 않는다. 열정적인 믿음과 차분하고 침착한 믿음, 그런 문제에 아예 휘말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다.
남들은 쉽게 방언도 하고 입신도 하는데, 끝까지 그런 게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 다 울고불고 은혜받았다고 펄펄 뛰는데 끝까지 눈물이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떤 학생은 울고 싶어도 안되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침을 눈에 발라서 운 척 했다고 한다. 자기도 방언을 하고 싶은데 안되니까 대충 할렐루야를 빠르게 반복하다가 뭐라고 쏼라대는 족들도 있다.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고 받고 싶지만 받아지지 않는데 어떡하란 말이냐? 눈물도 안나오고 그런 체험도 안되는 걸 어쩌란 말이냐!
물론 믿는 데에는 영적 감수성이 좋은 것이 훨씬 유리하다. 잘 울고 잘 느끼고 잘 믿어지는 것도 은사다. 그러나 영적 감수성이 좋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잘 느끼고 체험도 잘하는 사람들이 쉽게 받은 은혜를 쉽게 쏟는 경향이 많다. 또 뭔가 모른체 영적 체험만 많이 해서 맹목적인 신앙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쉽게 이단에 빠지거나 영적인 갈급함을 가지고 방황하는 경우도 있다. 체험도 쉽게 하고 깊은 영적 경험을 가지고 있으나, 또한 쉽게 흔들리고 넘어진다.
오히려 영적 감수성이 무딘 사람들, 비판적이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중에는 훨씬 충성하는 경우가 많다. 한번 맡겨놓으면 변치 않고 책임있게 행하는 사람들이다. 감성은 약하지만 의지는 강하다. 은사를 잘 받지는 못하지만 한번 붙들면 단단한 사람이다. 마귀가 좀처럼 흔들지 못한다. 이단이 절대 들어오지 못한다. 의심과 비판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적으로 단단해져 있기 때문이다.
비관하고 의심하는 도마
베드로는 열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 부르셨을 때, 마음에 깨달음과 감동을 느끼고 그날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나섰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예수님이 물으실 때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오니까, 예수님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신앙의 근거를 물으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담대하게 손을 들고 말씀드린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이를 알게 한 이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라고 하시며 크게 칭찬하셨다. 그후 베드로가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가 되고 큰 일을 하게 되는데, 그때에도 베드로는 변함없는 감동과 열정의 사람이었다.
베드로에 비해 볼 때 도마는 어떠한가? 도마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도마는 사사건건 비관적으로 보고 의심하는 성격을 가졌다. 요한은 이러한 도마의 성격을 분명하게 그려주고 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폭탄선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가 어떤 때인고 하면, 반대자들이 많고 신상의 위험을 느낄만한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이 어렵게 결단을 내리고 들어가려고 할 때이다. 물론 당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위험을 각오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자들까지 죽으러 가자고 할 상황은 아니었다. 도마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4장에 보면, 예수님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신다. 이렇게 은혜롭게 분위기를 잡아가는데, 도마가 톡 나와서 말한다.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어찌 그 길을 알 수 있습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참 재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까지 일마다 나와서 산통을 깰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20장 24절 이하를 보면, 아주 절정을 이룬다. 다른 제자들이 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은혜가 충만하여 우리가 주를 보았다 하니까, 도마가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 하였다. 생각해 보라. 이게 얼마나 기분 나쁜 말이요, 불신앙적인 태도인가! 다른 제자들이 다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 공동의 체험이요,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마당에 자기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이렇게 부정적인 말을 하고 초를 치다니!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태도이다. 이미 전에도 도마가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면서 비판적인 말을 할 때 한번도 도마를 꾸짖으신 적이 없으시더니, 이번에도 친히 찾아와 주셔서 도마의 불경스런 요구대로 손을 내밀어 못자국을 보여주시고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게 하셨다. 도마의 비관적이고 의심하는 태도를 정죄하시지 않고 오히려 응답해주셔서 도마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해주셨다.
우리가 성서를 볼 때도 전체적으로 도마에게 그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수 있다. 성서에 열두 제자 이름이 모두 네 번 나온다(마10:2-4; 막3:16-19; 눅6:14-16; 행1:13). 그런데 도마의 이름은 중간 쯤에 위치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제자 이름은 그 순서가 대단히 중요하다. 바로 서열이다. 도마는 초대교회 열두 제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도는 아니었으나, 또한 그렇다고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인물도 아니었다.
도마는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을 28절에서 하고 있다. 도마는 가장 헌신적인 제자 가운데 하나였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제자들 중 가장 먼 곳까지 복음을 전하러 간 사도였다. 인도에는 지금도 도마 기념교회가 있고, 특히 사도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체를 직접 만졌다는 손이 전해지고 있다. 10여년 전에 내가 시무하던 교회에 인도 도마 기념교회의 사제가 와서 설교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분과 꽉 악수를 했다. 그분의 손이 예수님을 만진 도마의 손을 만졌을 터이므로...
도마의 신앙적 태도
도마는 분명히 의심 많은 제자였으나, 사실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신실한 성격의 사람이다. 도마의 의심은 불신을 위한 나쁜 의도가 아니라 신앙에 이르기 위한 비판적인 접근이었다. 그는 예수님 부활의 사실성을 확인하고 체험하기 위해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도마의 장점은 무엇인가? 그는 정직하고 겸손했다. 또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도마는 하나님 앞에 적당히 넘어가지 않고 솔직하였다. 도마는 나름대로 쉬지않고 노력했다. 완성이 어디있나, 이루었다 할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길을 가면서 길 위에서 죽을 때까지 찾아가는 것이다. 도마는 한 번 믿으면 변함없이 충성하였다. 헌신하였다. 믿는대로 살았다.
다른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였기에 믿었다. 다만 도마는 소문으로만 대충 듣고 인정하지 않고 철저히 보며 체험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도마는 주님을 만난 뒤에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라는 철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비판적인 교인들과 지성인들의 불순종과 의심을 무조건 악한 것으로 매도해서는 안된다. 도마처럼 믿음으로 가기위해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도마의 경우, 의심 많은 도마라고 불렸지만, 사실을 구도자로서 치열하게 진리와 씨름하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환상이나 신념체계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진리에 근거하고 있는 실질적인 깨달음과 체험의 문제다. 영적인 세계를 믿을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감성과 사고와 의지의 경험과 결단을 통해서이다. 우리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종교적인 체험들을 할 때, 생각해보고 느껴보며 마음으로 결단함으로 우리는 믿음에 이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체험하기 원하고 느끼기 원하며 보기 원한다. 체험하고 만져보고 직접 본 연후에 주님을 믿겠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도마와 같이 부활하신 제자들의 무리에 우리가 함께 있지 못하지 않는가! 도마의 영성이 필요한 때이다. 도마처럼 의심하며 도마처럼 비판하며 도마처럼 부정하고 보는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하다. 따라서 우리도 도마처럼 정직하자. 도마처럼 겸손히 노력하자. 도마처럼 변함없이 충성하자. 그러면 언젠가 우리의 가는 길 안에서 믿음의 진리가 보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일 것이다.
그런 ‘예수는 없다’
우리 시대는 보아야 믿는 실증주의 시대요 과학의 시대다. 따라서 도마의 의심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원로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의 책 ‘예수는 없다’는 그런 고민과 현실을 잘 보여준다. 도마가 믿지 못하겠다고 고백하듯이 진실하게 고민하고 씨름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다만 나쁜 뜻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면 주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셨듯이 여러분에게도 나타나실 것이다.
도마에게 보여주시고 만지게 하신 후에 신앙을 고백하는 도마를 향하여,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신 말씀은 바로 우리들을 위해 주신 말씀이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만지지 못했어도, 마음이 있고 사랑이 있음을 알 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예수의 생명을 시인하는 이들은 복이 있다.
의심해보라, 고민해보라, 비판해보라,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결국 주님의 신비와 거룩함에 이르도록 나아가라. 그리하여 어린 아이같은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보라, 그리고 기도해보라! 보지 못하지만 믿을 수 있는 믿음의 길이 열릴 것이다. 의심하였지만 깨달아 믿고 구원받는 모든 이들은 복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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