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 설교일 | 2026-0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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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말씀 | 사9:1-7 |
| 설교제목 | 그늘진 땅에 빛이 비치다! |
그늘진 땅에 빛이 비치다!
사9:1-7
2026년 1월 25일 [주현절후 셋째주일]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빛과 희망에 대하여 말한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멀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곧 빛이 임할 것이라고 쉽게 말한다. 미래 희망의 빛, 현재 가능성의 빛, 어두움 속에서 비쳐올 하늘의 빛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빛을 섣불리 말하기 전에 우리는 정직하게 마주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얼마나 우리 삶이 어두운가 하는 현실이다. 성경은 결코 인간의 어두움을 외면하거니 비껴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둠의 깊이와 크기를 정직하게 드러낸 후에, 하나님의 빛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준다.
이사야 9장은 포로기의 어두움에서부터 나온 말씀이다. 자신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죄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나라가 망해 바벨론에 포로잡혀가고 예루살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만큼 무너져 멸망하였다. 사 9장은 밝은 찬가로 시작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늘진 땅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출발한다. 이 말씀은 현실의 어두움 속에서도 밝은 빛이 비친다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땅에 “평강의 왕”이 오심으로, 마침내 빛이 비칠 것이라고 선포한다.
오늘 우리는 선지자의 말씀을 따라 세 부분으로 복음을 전하려 한다. 첫째, 어두움의 그늘진 땅에 대하여, 둘째, 평강의 왕이 오시니, 셋째, 새 날을 여는 빛에 대하여- 이다.
어두움의 그늘진 땅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은 흑암이 없다, 즉 빛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말씀이지만, 이 말씀의 배경에는 깊은 절망이 깔려 있다. 그들은 하늘을 쳐다보아도, 땅을 바라보아도 ‘환란과 흑암과 고통의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출구가 없었다.
여기 1절에 나오는 스블론과 납달리 땅, 곧 갈릴리 지역은 북이스라엘의 변두리 땅이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앗수르의 침략을 가장 먼저 당한 땅이었고, 가장 먼저 정복당한 실패의 땅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딴 나라와 혼혈되어 버려진 땅, 군사적으로는 패전의 땅이요, 종교적으로는 순결을 잃어버린 우상숭배의 땅이었다. 사람들은 이 지역을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렀다. 경멸과 체념이 섞인 이름이었다. 다시 말해 이 땅은 아무 기대도 희망도 없는, 어둠의 땅이ㄹ는 것이다.
사회학자 엄기호의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2016)는 망가져가는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을 담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컴퓨터를 리셋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듯이 그렇게 이 나라 사람들이 삶의 리셋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 분노, 자책, 무기력으로 치닫는 개인이 늘어나고 있다. 개인에게서 좀 나아가 사회적 시선으로 볼 때도 존엄을 짓밟는 국가,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과 그 속에서 개개인의 각자도생이 중심이 된 사회를 말하고 있다. 구의역 사고, 강남역 살인사건, 세월호 사건, 이태원 사고 등 지난 몇 년 간 한국 사회의 병폐를 드러내는 사건들이 있었다. 10년 전에 낸 사회진단이지만, 이 시점에도 타당한 말들이다.
‘이.생.망.’이라는 말을 아는가?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말의 준말이다. 어린 중학생들이 이런 말을 하는 시대이다. 자포자기한 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날마다 꿈을 꾸고 미래의 비전을 얘기해도 부족한 어린 아이들까지 이러하다. 취업준비하는 젊은이들도 요즘 이력서에 그냥 “쉼”을 가진다고 써놓는다고 한다. 이유없이 그냥 쉬는 시간을 말하니 어쩌라는 것인가? 요즘 이런 풍조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역사의 그늘보다 심각한 것은 영적 그늘, 신앙적 그늘이 드리운 것이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사망의 그늘’이란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어려움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으나 소망 없이 살아가는 상태, 숨은 쉬지만 방향을 잃은 인생을 말한다. 죄와 두려움, 불안과 좌절에 눌려있는 삶이다. 오늘 우리 현실이 그렇다. 경제적 불안, 관계의 깨어짐, 세대간의 갈등, 끝나지 않는 경쟁, 겉으로는 발전했지만, 속으로는 점점 더 깊은 그늘에 들어가 있는 것이 이 시대의 모습이다.
더 무서운 것이 신앙의 그늘이다. 예배는 드리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멀고, 기도는 하지만 주님의 응답이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마음의 빛을 잃는다.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계시는가?’ 이런 질문이 던져질 때 그늘이 더욱 짙어지는 것을 느낀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늘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평강의 왕이 오시니
이렇게 어두움을 배경으로 그늘진 곳에 대하여 말할 때, 이사야는 갑자기 깜짝 놀랄 말씀을 크게 외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하나님은 그늘진 땅을 빛이 비치는 땅으로 바꾸는 데 군대를 보내지 않으셨다. 강력한 정지 지도자를 세운 것도 아니다. 법을 만들고 제도를 고친 것도 아니었다.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데 여를 야로 바꾸거나 야를 여로 바꾸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늘진 땅을 빛으로 바꾸시기 위하여 아기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어두운 곳, 그늘진 곳을 바꾸기 위하여 아기가 되어 오셨다. 가장 연악한 아기가 되어,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리까지 오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권력이나 힘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둠을 몰아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작고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생명과 사랑을 간직한 채로 어둠 속으로 직접 들어오신다! 여러분도 작은 예수가 되어, 예수의 사랑이 되어 어둡고 그늘진 곳으로 나아가라!!
이 아기, 평강의 왕은 그에게 주어진 이름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기묘자다,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분이시다. 모사시다, 길을 잃은 인생에게 지혜를 주시는 분이다. 강압으로 이기려 하지 않고, 지혜로 공존 공생하시는 분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연약함 속에서도 능력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만유의 권력을 가지셨다고 자기의 권세를 자랑하시지 않는다.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다, 변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계시는 보호자시다.
평강의 왕이시다, 갈등과 깨어짐을 화해와 따스함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훨씬 심오하고 넓은 뜻이다. ‘평강’은 히브리어로 “샬롬”인데, 샬롬은 빚을 다 청산한 관계를 의미하는 데에서 온 단어이다, 관계의 회복, 삶의 온전함, 하나님과의 화목을 의미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평강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노래한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평강의 왕은 일시적인 정한 기한만 통치하지 않는다. 그의 나라는 무너지지 않는다. 정의와 공의로 세워진 나라, 억압은 사라지고 회복과 치유, 인권과 자유가 흐르는 나라이다. 다윗의 왕위에 앉으시되, 인간 왕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인간의 열심히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어진다고 선언한다!
구원의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이 이루시는 평강의 구주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요,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사람들은 방황하며 고통할지라도, 하나님이 빛을 비추시는데 그 이름은 그리스도 예수시다!
새날을 여는 빛이 비치다!
이제 이사야 9장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진다. 2절이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빛은 점진적으로 비친다. 갑작스럽게 번쩍이며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방향을 바꾼다. 빛이 비치면, 하나님의 빛이 인간의 어둠 속으로 들어오시면,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반복하며 살 수는 없다. 더 이상 바벨론의 세력에 굴복하며 살 수 없다! 사람 눈치 보고, 세상을 두려워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뜻대로 결단하고 나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다. 땅에 속한 사람이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육에 속한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으로 나아갈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 우리는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이다! 빛이 비치면, 사람들은 변화된다!! 처음에는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다가 점점 크게 빛이 비치게 된다. 더 이상 같은 길을 그전처럼 걸어갈 수는 없다! 넘어질 수는 있어도, 완전히 길을 잃지는 않는다. 평강의 왕이 오심으로 빛이 비추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해서 세상이 즉시 완전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변화가 조금씩 시작되었다! 어둠이 마지막이 아니고, 빛이 비취었음이 선포된 것이다! 빛이 점점 크게 밝게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날 성도 한분이 아침에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삶의 의욕이 없고 무기력하여 미칠 것 같다,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목사님 기도를 받았으면 좋겠다 한다. 아침부터 이런 전화를 받으면 깜짝 놀란다. 일단 의욕이 없다는 표현은 굉장히 걱정이 된다. 그래서 아내가 ‘오전에 목양실로 오시면 목사님이 기도해주실 거예요’ 하였다. 그분이 찾아왔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니까 어둠을 물리치고 빛의 역사로 기적과 능력을 보여주셔야 한다. 어떻게? ‘구름이 금방 사라지듯 해결되지 않을지 몰라요, 그러나 믿고 기도하면 틀림없이 함께 해주십니다!’ 안수기도 해주었다. 물론 천둥번개가 친 듯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편안한 얼굴로 돌아갔다. 하나님이 어둠을 물리치고 빛을 비추어 주셨다, 그 빛이 점점 밝아지고 커지고 있을 것이다!!
어두운 곳에 빛이 비치면, 심령이 변화되고 그 변화의 표로 기쁨이 나타난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기쁨은 이겨서, 잘 되어서, 해결되어서 생기는 감정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을 때 회복되는 은혜이다. 수확의 기쁨, 승리의 기쁨처럼,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기쁨이다! 여러분의 심령, 생활, 인격 속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의 그늘진 곳이 사라져서 빛이 비추기를 축복한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니 이상하게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네요!’
빛은 단지 감정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멍에를 꺾는다! 어릴 적의 너무 큰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준 기억이 트라우마(상처 흔적)이 되어 있거나 너무나 깊이 새겨진 열등감들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초조해하거니 불안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이것이 멍에가 되어 소화가 안 되거나 항상 편두통에 시달리기도 하고, 안정이 안 되어 행동장애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모든 마음의 멍에를 하나님은 꺾어주신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이 내게 오시면, 압제자의 막대기, 어깨의 짐이 꺾어지고 사라진다! 죄책감, 두려움, 중독, 절망의 사슬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멍에를 꺾고 무거운 짐을 어깨에서 내려주신다! 왜냐하면 평강의 왕이 이미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님은 이북에 있는 당신의 외갓댁에 청년시절에 더부살이하러 가셨다가 그 동네에 있는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셨다. 외로운 청년 시절에 복음은 기쁨이 되고 사랑이 되어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셨다. 그러다 6.25가 터지고 기독교인들은 남으로 피난가야 한다고 하여, 그 교회의 전도사님을 중심으로 청년 10여명이 피난을 하여 제주도를 거쳐 부산에 정착하게 된다. 원래 목회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동료 청년들과 함께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피난 중에 어찌어찌 졸업하였다.
아버지의 두 번째 사역지, 결혼 후 신혼 첫 목회가 지금은 없어진 정라진감리교회였다. 아버지는 목회를 부지런하게 하셨고 교회마다 부흥을 이루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목회를 잘 하시면서도 어머니와 가끔씩 심하게 다투곤 하셨다. 평소에는 평안하고 화목한 것 같다가도, 무엇이 어떻게 꼬이면 심하게 다투셔서 집안 집기를 깨기도 하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 외갓집에 갔다가 며칠 만에 오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서로 싸우시다가 어머니가 장독대 옆에서 어떻게 하다가 간장독이 확 쓰러져 깨져버렸다! 그러더니 간장이 온 집안에 흘러넘쳐서 그 겨울 간장은 다 쏟아졌고 겨우내내 간장냄새를 맡으며 보내기도 했었다.
나는 어릴 적에 큰아들로서 그러는 부모님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남들에게는 평화의 사도요 존경받는 목회자신데, 집에서는 왜 그리 싸우실까? 그것이 내게는 참 떳떳하지 못한 감정으로 남아있었다. 왜 남에게는 구원을 얘기하시면서 두 분은 그렇게 불편하게 사실까? 나는 좀 부끄러웠다. 지금은 삼척공원묘원에 한 묘지를 파서 밤낮없이 일년내 나란히 누워계신다! 목사 사모 직함도 내려놓으시고, 하나님 앞에서 성도로 평안히 쉬고 계시다!
부모님을 생각해보면, 나무 어려운 시절을 사셨다. 무엇 하나 만족한 것이 없었다. 인생이 어둠의 그늘진 곳이셨다. 많은 상처와 열등감을 서로 싸매달라고, 서로에게 어리광을 피우신 것 같다. 나도 그 나이를 지나보니까 많이 이해가 되고 감사하다. 어려운 중에도 우리 4남매를 잘 키워내셨다. 목회도 큰 교회를 담임하셔서 많은 믿음의 제자들을 길러내셨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정은 부모님의 DNA를 비슷하게 타고났을 터인데도 가정불화가 없이 평안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둠 속에 빛이 비춘 것이고, 아내의 사랑과 지혜 덕분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다. (43년 살아보니 얼마나 착한지 모른다! ㅋㅋ)
이사야 9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늘진 땅은 버려진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이 가장 먼저 비치는 자리이다.’ 평강의 왕은 지금 우리 가운데 오신 현재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면 그늘진 곳에 빛이 비추어 기쁨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여러분도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다 해도, 어둠의 그늘진 곳에 평강의 삶이 임하기를 축복한다.
우리는 어두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류의 죄와 악은 우리 시대에도 좀처럼 극복되지를 않는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여전히 어둠의 그늘이 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다. 평강의 왕이 오시는 길목일 수 있다. 오늘도 그 왕을 맞이하며, 그분의 빛 안에서 다시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이사야의 다른 구절을 인용함으로 결론을 삼는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사2:5) 겨울의 한 구비를 지나는 성도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따스한 햇볕같이 비추기를 축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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