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 설교일 | 2026-02-15 |
|---|---|
| 설교말씀 | 마17:1-9 |
| 설교제목 | 변화산 위에서 길을 묻다 |
변화산 위에서 길을 묻다
마17:1-9
2026년 2월 15일 [변화주일]
올림픽은 전세계가 평화를 주제로 모이는 최고의 행사다. 지금 우리나라도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에 참가해 세계와 어깨를 겨루고 있다. 특별히 지난 금요일 아침에 전해진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경기에서 18살 고등학생 최가온이 따낸 금메달 소식은 온 국민을 잠에서 깨우기에 충분했다. 최가온은 이날 결선에서 90.25점을 기록, 2018년 평창과 2022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리스트인 미국교포 선수 클로이 김 언니의 88점을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한국 설상 종목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이자, 이번 대회 대한민국 선수단 전체 1호 금메달이었다.
2023년 세계적인 익스트림 스포츠 대회 X게임을 시작으로 각종 국제 대회를 휩쓸며 이번 올림픽 금메달 후보로 꼽힌 최가온은 17년 3개월이라는 최연소 하프파이프 금메달리스트라는 이름값을 해내며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특히 1차 시기에 파이프 끝에 보드가 걸리며 크게 넘어지는 위기를 딛고 대역전 드라마를 써내 더 극적인 금메달 소식이었다. 2차 시기에도 최가온은 중간에 넘어져서 우려를 낳았으나 폭설이 이어진 가운데 3차 시기를 기어코 완성해 냈고,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1차 시기 이후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림픽 여기서 그만 해야 하나’라고 생각해서 크게 울었다.”고 전한 최가온은 “머릿속에서 ‘할 수 있어. 너는 가야 해’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내 다리를 믿고 해보자’며 이를 악물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는 대역전극이었다!! 시상대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고 눈물을 훔친 뒤 걸어 나오던 최가온은 무릎 통증 탓에 줄곧 다리를 절뚝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어린 선수의 담대한 투지에 깜짝 놀랄 만큼 감동을 받았다. 자기 아버지도 자기 딸의 이런 투지에 “딸을 존경한다!”고 얘기하더라. 또 부모님에 대한 사랑, 코치에 대한 감사, 선배 금메달리스트인 클로이 김 언니에 대한 존경, 친구들과의 화목한 관계를 보여주는 인간미 넘치는 선수라는 면에서, 금메달 소식을 방송으로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더라. 우리나라의 미래는 이런 인간미 있고 인생에 대한 의욕이 가득한 젊은이들이 만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지 모르겠다!!
오늘은 우리 주님의 산상변모주일이다. 하루는 주님이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오늘 말씀 2절을 보니까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하였다.
1. 산 위의 빛과 산 아래의 현실
마태복음 17장 1-9절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눈부신 순간을 기록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었고, 하늘에서는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장면은 말 그대로 예수님 사역의 절정이다. 하인리히 오토라는 신학자가 표현한 <Das Heilige>, 거룩 그 자체, 신성의 계시이다! 하늘과 땅이 겹쳐지는 순간, 영원과 시간이 하나가 되는 장면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평생에 한번이라도 이런 신성의 경험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내 경험과 이성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 크고 위대한 초월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여기 오늘의 마태복음 본문은 마태복음의 중간으로서 예수님의 공생애 복음사역 후반부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복음사역 후반기에는 십자가가 있다. 전반부의 산상설교와 오병이어 기적이나 병자를 고치신 사역도 중요하지만, 후반부의 십자가 사역과 온 인류의 죄를 사하시는 속죄와 부활의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사역을 감당하고 가기에는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먼저 변화산에서의 신성의 체험, 은혜체험이 필요하다고 보신 것이다.
이 영광의 산은 16장의 고백과 17장 이후의 고난 사이에 놓여 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16:24)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면 귀신 들린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 실패한 제자들, 울부짖는 아버지, 믿음 없는 세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산 위의 영광은 곧 산 아래의 눈물로 이어진다. 구원이 이뤄지기 위해서 먼저 변화가 필요하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이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기독교의 길은 무엇인가?
2. 변화를 추구하는 기독교: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늘의 음성은 단순하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절)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나?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나를 따르라!(16:24) 변화를 추구하는 기독교는 외적인 번영보다 내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교회가 아무리 부흥되어 전 국민 6천만이 예수 믿으면 뭘하나, 내가 변화되어야 하지! 교회가 세상에 예수를 보여주지 못하는데, 전국민 복음화시켜 교회 나오게 하면 뭘하나? 하는 것이다. 외적인 번영보다 내적인 변화가 더 중요하다! 예수님은 변화산 위에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게 변형되셨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2절). 헬라어로 ‘변형되다’는 단어는 ‘메타모르포오’이다. 나비가 번데기에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하는 것처럼, 완전히 안에서부터 모양까지 모든 것이 바뀌는 내면의 변화, 본질적 변화이다.
예수님은 산 위에서 ‘변형’되셨다. 그러나 그 빛은 본래 그분 안에 있던 것이 드러난 것이다. 참된 변화는 외부에서 덧칠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가 그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기독교는 이렇게 묻는다.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가? 나는 고난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는 원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약자를 향해 어떤 마음을 품는가?’ 번영은 환경의 문제이지만, 변화는 존재의 문제가 된다. 나의 내면의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가?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에 깊이가 있는가, 진리가 있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인간으로 믿나, 하나님으로 믿나? 하나님으로 믿어야지! 먼저 여러분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리하여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라!
3. 번영을 추구하는 기독교: 산 위에 초막을 짓다
베드로는 말한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이 고백은 솔직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준다. 영광을 경험하면 머물고 싶다. 감동을 붙들고 싶다. 빛나는 순간을 영원히 고정하고 싶은 것이다. 번영을 추구하는 기독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신앙은 나를 높이는 수단이 되고, 예수님은 내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도구가 되며, 십자가는 장식이 되고, 고난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신앙 실패의 증거가 된다. 번영의 신앙은 산 위의 빛을 “결과”로 삼으려 하고, 하나님을 소유로 삼으려 한다. 그래서 종교적 체험은 귀한 것이지만, 그 체험 자체를 목표로 삼을 때 타락하기 쉽다. 영광을 보증으로 삼고, 형통을 신앙의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베드로가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름이 덮고 음성이 들렸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초막 제안을 승인하지 않으셨다. 하늘은 제자들이 변화의 산 위에 머물러 있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왜일까? 예수님의 길은 초막이 아니라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체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힘을 얻는 과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은 그 자체로 위대하지만, 제자들에게는 목적지가 아니라 통과점인 것이었다. 번영을 추구하는 기독교는 예수님의 빛을 소비하려 한다. 하나님의 신성을 이용하여 만족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는 예수님의 길을 따른다.
4. 참된 기독교의 길: 빛을 보고, 십자가를 따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신다. 빛나는 상태로 공중에 머무르지 않으셨다. 구원하시는 주님이신 예수님의 신성을 발견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으신다. 병든 아이가 있는 자리로, 실패와 탄식이 있는 자리로 가셨다. 번영의 기독교를 추구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변화의 기독교를 보여주신다.
참된 기독교는 세 단계를 거친다. 영광을 본다> 음성을 듣는다> 산 아래로 내려간다! 영광만 보고 내려오지 않는 신앙은 신비주의가 된다. 원주에서 만난, 기도 많이 하는 착한 권사님 한 분은 매일 교회에서 주무시고 집에 있을 때도 기도방이 있어서 항상 기도하신다. 그를 따라 기도 같이하는 권사님, 집사님들도 몇 있었다. 뭘 많이 보고 만나고, 신비한 음성으로 기도한다. 병도 많이 고치고, 꿈도 많이 보여주셔서, 이런저런 일을 알려주신다. 그러다 보면 신비주의가 되기 쉽다. 믿음이 생활과 분리된다. 가정이 정돈이 되지 않고, 자녀들이 다 마음을 못잡고 방황한다. 그러나 이런 신비와 함께 말씀에 대한 집중, 말씀 순종에 겁나게 철저했다. 교회에 덕을 세우고 가족들이 잘 되더라!
반면에 또 어떤 신앙은 세상만을 생각한다. 내려오기만 하고 영광을 보지 못한 신앙은 율법주의가 된다. 하나님을 너무 원칙적으로 만난 사람들이다. 이렇게 살라, 저렇게 하라는 원칙이 있다. 그런데 은혜가 없다. 예수의 인간적인 면, 도덕적인 가르침에 감화를 받고 따라간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죄의 은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에 대한 만남과 체험이 없다. 그래서 너무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정의롭게만 믿으려 한다.
참된 길은 영광을 경험하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은혜받고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은혜받을수록 체험할수록 교회생활, 가정생활을 반듯하게 잘 하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지 않되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은혜를 충분히 누리는 길이다. 변화산은 우리에게 말한다. 은혜받고 체험하라! 그러나 그와 함께 매일의 생활에 충실하고, 우리가 겪는 인간의 고난을 잘 통과하라!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분별력 있는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외적 번영만을 추구하지 말고, 내적 변화를 이루는 내실 있는 신앙인이 되라!!
5. 우리는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어떻게 우리는 내면이 변화를 이룰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번영 중심의 신앙에서 변화 중심의 신앙으로 옮겨갈 수 있을까?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 건강 달라, 사업 발전하게,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살게 해달라, 자녀들 잘 되게 해달라! 이것만 소원하고 기도하면서 사는 세속적인 신앙생활에 머물러 있는가? 어떻게 하면 참된 경건과 거룩을 이룰 수 있을까? 그러려면 내면이 변화되어야 한다. 번영에서 변화로! 변화를 먼저 추구하라! 그렇게 나아가면 번영도 따라올 것이다!!
1) 그의 말을 듣는 자리로 가야 한다. 변화는 말씀에서 시작된다. 설교를 형식적으로 듣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깊이 마음으로 듣는 자리로 나아갈 때 시작된다. 아까 예로 들었던 신비체험을 많이 한 원주의 권사님은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대로 말씀을 집중하여 듣고, 말씀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철저히 함으로써,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을 이겨내고 덕을 많이 세우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권사가 되었다.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해체하고, 욕망을 드러내고, 우상을 무너뜨린다. 말씀 앞에서 자기를 세우지 말고, 헐어야 한다. 말씀 앞에 자기 생각, 자기 입장을 자꾸 세우면 하나님 말씀에 반항하기도 한다. 그러다 시험에 들고 영혼이 파멸하는 데에 이른다. 우리는 그의 말씀을 듣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빠지고, 새벽기도 못하고 내게 직접 주시는 심방말씀이나 가정예배 말씀에도 집중하지 못하면 영적으로 파멸한다. 말씀을 귀기울여 들을 때 내면의 변화가 일어난다!
2) 십자가를 피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본문의 변화산 사건은 십자가를 따르라는 제자도의 말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번영과 영광만을 추구하는 믿음을 조심해야 한다. 고난을 무조건 제거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난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를 묻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다. 하나님 방식의 승리이다. 예수님을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한다!
3) 기도의 자리에서 인간관계의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맨 처음에 금메달리스트 얘기를 했는데, 굉장히 인간관계가 좋은 것으로 보였다.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이면 친구들과 멀어질 수도 있는데 여러 친구들이 밤새워 응원하고 경기하다 다쳤을 때 모두 함께 울었다고 하더라! 그리스도인들도 산 위의 기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산 아래의 인간관계가 필요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섬김도, 함께 드리는 예배도, 전도도, 신앙교육도 다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변화는 고립된 영적 체험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갈등 속에서, 용서 속에서 이루어진다.
4) 영광을 목표로 삼지 말고 순종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번영은 통제할 수 없다. 외적인 번영을 추구하나 모두 번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순종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영광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순종은 우리가 드리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할 때 내면이 변화된다. 순종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 나라가 이뤄진다. 순종은 어려운 것이고, 때로는 너무 어려워 뼈가 아픈 것이다. 그러나 순종할 때 십자가의 길이 이뤄지고, 진정한 변화가 나타난다. 오랜 교회역사에서 수도원주의가 있었는데, 수도원생활이란 게 자기 육신의 소욕을 내려놓고 순종을 실천하는 생활이다. 순종하면 변화되고, 불순종하면 변화되지 않는다!
결론: 베드로는 초막을 짓고 싶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을 가셨다. 번영을 추구하는 기독교는 머무르는 신앙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기독교는 따라가는 신앙이다. 산 위의 빛은 잠시였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영원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체험은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꼭 있어야 하지만, 우리에게 더욱 시급히 필요한 것은 내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참된 믿음이다!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자리까지 나아가는 참된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