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5-0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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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눅8:26-39 |
설교제목 | 문제보다 큰 은혜 |
문제보다 큰 은혜
누가8:26-39
2025년 6월 15일 [성령강림후 첫째/ 삼위일체주일]
이번 주일은 삼위일체주일이다. 성령강림절을 지내고 다음 주일로서 강단색은 흰색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말할 때 가장 대표적인 말이 삼위일체 교리가 아닐까? 우리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제일 어려운 내용이 이 삼위일체 교리였다. 교회 역사에서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 몸을 입으신 성자 예수님, 그리고 자유자재하셔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을 말하고, 이 세 위격이 한 분 안에 존재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시라고 하였다. 여러분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전하신 존재 가운데로 나아오는 완전한 계시의 주일이 되기를 축복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경제가 어렵다지만 사람마다, 어린아이들까지 스마트폰을 들고 있고,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챗GPT’를 켜면 세상 모든 이치가 몇 초 이내로 다가와 설명되는 시대이다. ‘삼위일체주일을 몇 문장으로 설명해달라’고 했더니, ‘기독교 전통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절기라면서,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신비를 되새기는 날’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가? 햇빛이 밝게 비치고 초여름의 생명력이 푸르게 온 땅을 채우지만, 우리 삶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다. 중한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병을 이겨내었지만 항상 조심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웃음 가운데에도 약간 그늘이 있다. 자녀들 문제로 속 썩는 부모의 마음을 누가 알랴! 자녀는 평생 과업이요, 기도의 제목이다! 지난해 후반기부터 계엄정국이라 알려진 올 전반기까지 경기가 바닥을 찍어 어렵지 않은 사업이 거의 없다할 정도가 되었다. 다들 좋은 옷 입고, 깨끗이 정돈하고 외출하지만, 어려운 사정은 누구에게나 있다. 가정 문제는 얼마나 심각한가! 교인과 목회자들의 얼굴에 어두움이 드리워 있다. 부부의 불화와 이혼, 자식들의 방황, 가족들의 불신이 심각하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미국교회도 어려움이 많다. 6월에 연회들을 주로 하는데, 은퇴하는 한 여자 목사는 남편 둘과 함께 강단에 나가 은퇴 소감을 말했다. 한 사람은 전 남편, 한 사람은 현 남편이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의 삶에는 문제도 있지만, 언제나 문제보다 은혜가 크다. 믿음으로 나가면, 그렇게 문제 속에서도 넉넉히 이겨내어 함께 기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큰 어려움이 있어도 힘을 잃지 않는다! 낙심하지 않는다! 성령과 함께 할 때, 큰 문제는 오히려 은혜가 됨을 그들은 교회생활과 세상에서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우리 삶에는 항상 문제가 가득하지만, 문제보다 큰 은혜, 고통보다 큰 기쁨이 있다. 우리는 그러한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큰 문제
본문 누가8:26-39은 전체 22-56절 말씀 가운데 있다. 앞뒤의 말씀들과 관계가 있다. 여기에는 큰 문제 4가지를 극복하시는 예수의 사역이 나온다. 22-25절은 풍랑의 문제 즉 자연 재해를 극복하신 모습을, 26-39절 오늘의 본문은 귀신을 물리치시고 사람을 회복시키시는 일을, 40-56절에는 혈루증 걸린 여인의 질병과, 회당장의 딸이 죽은,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시고 승리하신 예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큰 문제들이 속출한다. 풍랑, 귀신들림, 불치병, 그리고 죽음의 문제다! 그러나 여기 성경말씀은, 문제보다 더 큰 은혜(!), 예수의 능력이 모든 문제를 물리치고 이겨냄을 보여준다. 풍랑을 이겨내셨다! 귀신을 물리치셨다! 불치병도 고치셨다! 죽음도 더 이상 그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 중 본문은 귀신을 쫓아내신 능력을 보여준다. 귀신은 엄청나게 큰 문제이다. 고대인은 귀신이 자연을 조절하고 사람의 재산을 빼앗아 가며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었다. 이 귀신은 사람의 귀, 코, 혹은 입을 통해 들어오는데, 귀신은 초자연적인 힘이기 때문에 사람이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술이나 점술, 동물의 희생 제사나 여러 가지 의식으로 귀신을 달래거나, 귀신과 싸워야 했다.
오늘 성경에서 보여주는 귀신은 귀신 중에서도 아주 강하고 독한 귀신이다. 그 귀신은 이 사람에게 들어와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고 다니게 하거나, 집에 있지 않고 무덤 사이에 있도록 하였다. 옷을 입지 않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사람에게서 버림받게 되는 일이고, 집이 아닌 무덤에 있으면 더 이상 사람들과는 어울릴 수 없는 반사회적인 행동이었다. 더구나 이 귀신은 예수님이 그 이름을 묻자 ‘군대’라고 했다. 군대 귀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군대’ 하면 강하고 센 세력을 말한다. 군대란 개인의 이름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이 그 귀신의 이름을 물어볼 때 ‘군대’라고 한 것은 이 귀신들린 사람이 자기 개인의 본성과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상태임을 보여준다. 큰 문제, 어려운 문제가 엄습하여 절망과 좌절과 공포와 근심에 싸여있는 사람이다.
여러분 가운데 지난 주간, 강하고 독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처럼 힘들게 살아온 사람은 없는가? 자기를 잃어버리고 문제에 압도당하여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잊어버린 사람은 없었는가? 자기 속에 군대가 들어와 계속 싸우게 하는데 왜 싸우는지,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없었는가? 오래 전에 만두 문제로 식품점 사장이 투신자살했다. 파주에 공장을 세운 진영식품 사장은 그 자살한 사장의 심정을 알만 하다며 하소연을 하였다. 만두소 재료에 단무지 꼬투리나 무 푸성귀를 함께 썼다고 ‘쓰레기를 쓴 회사’라고 했으니, 너무 했다. 그 때문에 식품회사가 쫄딱 망했으니 군대에 침입을 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질병이나 사고가 군대처럼 몰려올 때가 있다. 가족이 아프면 차라리 내가 아프고 싶지 않은가?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질병은 사람의 몸만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까지 상하게 한다. 온 가족들을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되게 해버린다. 사고는 왜 그리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지! 차를 운전할 때마다, 주방에 불을 켜고 끌 때마다 우리는 사고를 조심한다. 어려움은 함께 찾아올 때가 많다. 때로는 여러 가지 큰 문제들에 사로잡혀 우리는 숨도 크게 못 쉴 때가 있다. 군대처럼 몰려온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정체감의 문제로 생의 꼭짓점에 있는 사람들은 없는가? 아이들을 다 키워 대학에 보내고 결혼시키고 한숨 돌리고 나서, 늙어버려 패기도 능력도 잃어버린 남편을 쳐다보고 있으면 여자들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감의 위기를 경험한다고 한다. 회사원들이 열심히 일에 몰려 밤낮없이 일하다가 갑자기 나이 들어버렸음을 느낄 때, 회사와 일이라는 군대에 귀신들려 살다가 ‘나는 누구인가?’ 자기를 찾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러나 해는 져서 어두운데 돌아갈 길은 보이지 않는다. 입시생, 취준생들이 절망하는 소식이 가끔씩 들리고 있다. 세계에 이처럼 청년들이 성적 때문에, 경쟁 때문에 절망하는 나라가 있을까? 나는 이것이 자기의 개성과 이름을 빼앗아가는 획일적 집단주의 ‘군대귀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기쁨과 삶의 재미를 잃고, 마음의 병을 고치지 못한 채 군대 귀신 들리고 병들어 있는가!
군대 귀신 들린 사람에게 예수님 당시에는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였다. 요즘 귀신 들린 사람에게 때로는 폐쇄병동이나 정신요양원에 감금한다. 심지어 압박재킷을 입히고 독방에 감금하며 주사를 놓고 진동기나 전기 충격기를 사용한다. 꼭 귀신이 아니더라도 귀신에 버금가는 큰 문제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스스로 어딘가에 묶어두려고 한다. 바쁜 일에 자기를 묶어두는 사람들이 있다. 일하는 동안 잊어버린다. 술을 지나치게 습관적으로 마시거나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는 사람들, 무슨 중독에 빠지거나 이런 것으로 자기를 정서적으로 묶어둔다. 인터넷 게임과 노름에 빠진 사람들, 채팅이나 음란물에 빠진 사람들이 다 자기 속에 들어와 있는 군대 같은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기를 쇠사슬이나 쇠고랑으로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 중에 이런 일에 결부되어 있는 이들은 물론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군대귀신은 현대의 거리와 시장에, 직장과 가정을 항상 노리고 있다. 우리 각자가 혼자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 무겁다. 방황하고 흔들리고 안정되지 못하여,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여, 문제보다 은혜는 훨씬 크다.
더 큰 은혜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얼마나 크신 은혜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감싸 안으시는지 보여주고 있다. 주님은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 귀신들린 사람의 마을로 찾아오신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복음 중에 복음이다!! 주님이 지키신다! 주님이 붙드신다! 주님이 일으키신다!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러 오시러 주님은 어두운 바다를 건너오신다.
최근에 어떤 일을 계기로 나도 문제와 고난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하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성도들의 삶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깊은 고민과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 우리도 많은 문제들, 큰 문제 앞에 놓여 있다. 삶 자체가 너무 즉흥적이고 막무가내이다. 매사가 시끄럽고 정돈이 되지 않아 보인다. 전쟁의 위험, 폭력과 사고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그늘져있고, 인간관계가 대부분 많이 꼬여있다. 질병과 장애, 상처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육의 모순으로 행복해야 할 시기에 눌려 있는 아이들이 있다. 특히 선진국 아이들을 보다가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 부럽고 미안하고 화가 난다.
그러나 문제보다 은혜가 더욱 큰 것을 믿으라! 우리가 믿음으로 나간다면 이런 여러 가지 복잡하고 시끄러운 문제가 하나씩 극복되어 자리를 찾을 것이다. 전쟁과 폭력의 위험이 끝나고 평화가 임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큰 어려움 속에 있어도 희망의 빛을 발견하고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성령과 함께 할 때, 질병과 장애와 여러 가지 모순되는 일들이 변하여 오히려 은혜가 될 것이다. 할렐루야! 큰 문제가 우리 앞에 늘 있지만, 문제보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라!
2천 년 전 옛날에서 현대로!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고 내일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군대 귀신을 쫓아내시려 예수님은 공간의 바다를 건너 서양과 한국이 하나 되게 하시고, 어디서든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구원의 은혜가 나타나게 하신다. 군대 귀신 들린 오늘의 성도들을 고치고자 주님은 언어와 사고의 차이라는 커다란 바다를 건너오신다. 말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 어떻게 서양의 종교를 우리가 믿느냐고 투정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구원이 있다고, 복음이 있다고 은혜를 끼쳐주신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사람에게 명령하셨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악하고 강한 군대 귀신이 돼지에게로 도망가 호수에 빠져 죽어버렸다. 예수의 말씀이 우리를 구한다. 예수의 말씀이 우리의 벌거벗은 인격, 수치스러운 생활을 찬송과 기쁨의 옷으로 입히신다. 예수의 말씀만이 무덤과 광야에서 들뛰는 우리를 집으로 돌아오게 한다. 예수의 말씀이 자기를 잃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 앞에 방황하는 우리를 온전히 제 모습으로 제 자리에 앉아 자기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군대 귀신들려 지치고 낙담한 우리 영혼에 예수의 말씀을 주라! 예수의 말씀이 우리를 회복시켜 새롭게 할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진정한 기쁨과 재미를 느끼는 삶이 시작될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슬픔과 좌절이 치유되고 희망과 기쁨이 되살아 날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갈등하고 싸움하는 인생이 평화와 안식을 찾게 된다./ 예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원망과 다툼의 가족관계가 화합과 협력의 관계로 변화된다. 예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할 때 직장에서 사회에서 싸우던 사람들이 평화의 손을 잡을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감동과 은혜가 될 때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천국의 모델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설교를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상담과 성도 간의 대화를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성경공부나 지혜로운 프로그램을 통하여 주님의 도우시는 말씀의 임재를 만날 수 있다. 종교나 믿음을 빙자하여 찾아오는 다른 형태의 군대 귀신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먼저 교회를 통해 다가오시는 주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다가가라!
문제보다 더 큰 은혜
존 웨슬리는 인생을 ‘돛’과 ‘노’로 움직이는 배에 비유한다. 돛이 바람을 타면 순풍에 돛 단 듯 행복하다. 그러나 바람을 등지면 그 배는 아무리 쉴 새 없이 노를 저어도 그 수고가 고달플 뿐이다. 배가 순항하려면 나침반도 잘 보아야 하고 바람을 잘 타야 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배의 ‘돛’이라면, 인간의 수고와 노력은 ‘노’라고 하였다. 인생에는 풍랑이 불고, 삶에는 고통이 있다. 많은 문제들이 우리 가는 앞길에 놓여있다.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노 젓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바람을 타지 않으면 모든 ‘노 젓는 수고’도 헛될 것이다.
노를 저어 건너편 언덕까지 가기를 힘쓰라. 그러나 문제 앞에서는 바람이 어디서 어디로 부는지를 잘 살펴서, ‘돛’을 달고 나아가야 한다. 항상 문제보다 은혜가 더 클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우리가 목적한 인생항구까지 갈 수 없을 것이므로! 노 젓기는 평소 성경 읽기, 기도하기, 금식하기, 성만찬 참여하기, 선행하기 등의 경건생활이고, 돛 다는 것은 예수님과 은밀히 교제하며 주의 뜻을 살피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다.
웨슬리는 “하루의 시작은 성경으로 하고, 하루의 마감은 일기로 끝낸다.”고 하며 일기를 항상 썼다. 22세였던 1725년 4월 5일부터 평생 일기를 썼다. 웨슬리는 ‘이론의 종교를 은총의 종교로, 머리의 종교를 가슴의 종교로, 입술의 종교를 삶의 종교로, 의인의 종교를 죄인의 종교로’ 바꾼 장본인이었다. 항상 문제보다 더 큰 은혜의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크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문제보다 훨씬 크다. 많은 사람들은 문제에 싸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다. 은혜로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다. 세상을 지으시는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아버지는 힘이 세다. 아버지 안에서 예수와 함께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문제를 이기고 남을 것이다. 사랑하는 교우여! 문제보다 은혜가 훨씬 크다. 문제가 많다고 두려워하지 말라, 낙심하지 말라! 주님께로 나아와 은혜의 물가에 몸을 담그라! 큰 문제보다 더 큰 은혜! 여러분 안에 이 은혜가 날마다 충만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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