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5-0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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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잠25:4-7 |
설교제목 | 그리스도인의 참된 지혜 |
그리스도인의 참된 지혜
잠25:4-7
2025년 8월 31일 [성령강림후 열두째/ 왕국절시작 주일]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고려시절 993년에 거란군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다. 그때 고려를 대표해서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회담을 한다. 그런데 오만방자하게 서희와 담판에 나선 소손녕은 오히려 양국 공동의 이익과 평화를 위해 강동6주를 우리에게 양보하라는 서희의 제안을 수락하고 고려를 떠난다. 서희는 거란의 대군을 협상으로 물리치고 거란과의 화친까지 이끌어냈다. 이 일을 계기로 서희는 ‘외교의 귀재’, ‘최고의 협상가’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런 결과는 단순히 그의 말솜씨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통찰과 거란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뒷받침되었고, 거란의 장수 소손녕을 칭찬하고 높여주는 겸손 속에서도 상대에 기죽지 않는 배짱이 어우러져 이같은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지난 주간에 우리나라 대통령과 외교안보팀은 미국과 정상회담을 통하여 이런 일을 거의 이루고 온 것 같다. 미국은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올해 들어 보호무역주의를 표방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들에게 앞으로는 엄청난 높은 관세로 무역할 것을 요구하였다. 우리나라는 뚜렷한 자원이 없고, 나라의 영토나 인구도 그리 크거나 많지 않은 형편에, 무역으로 이익을 남겨서 국가 경제와 백성들 살림을 유지하는 나라이다. 특히 우리나라 경제에 있어 대외의존도, 그중에서도 대미의존도는 무척 높아서 ‘미국이 기침을 하면 우리나라는 몸살을 앓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그런 마당에 관세를 25%에서 50%까지 올리겠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혼란이요 재난이었다. 7월말, 겨우 15% 선에서 관세협정을 맺고 돌아왔다. 당시 냉혹한 국제정세 속에서 그만하면 다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국방에 관한 부담이 큰 나라이다. 더구나 국제정세를 말하자면 여러 가지 복잡한 나라 간의 이해관계에 맞물려 있다. 이번에는 미국이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에 대한 주둔비를 올리고, 우리나라 국방비를 파격적으로 올려 미국의 부담을 덜어달라는 요구에 내몰리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대통령과 협상대표들은 대략난감한 상황 속에서도 비교적 선방하여 안보국방 부담은 국방비를 늘려 미국 무기들을 구입하는 수준에서 유지하고, 관세문제는 지난 7월 협정에 묶어두는 정도로 협정을 다시 확인하고 돌아왔다. 이번 정상회담과 실무협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는 하지만, 이런 거친 무역 싸움에서 강력한 공격으로 나오는 협상상대를 그래도 당당하게 맞서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통령 공적대담은 성공적이었고, 실무진들의 무역협정 조정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짜 승리이다. 상대를 높여주고 모든 것을 양보해도 우리가 정말 얻으려는 것을 얻어내면 이긴 협상이다. 상당히 지혜로왔던 것은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 상대를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높여주면서 두 나라의 친밀도를 높이고 얻어낼 것을 얻어내었다는 점이다. 이번에 우리가 얻어낸 것은 현 우리나라의 정세에 대한 국제사회의 오해와 불신을 완화하면서, 국방 안보에 대한 무리한 요구를 막아내고, 관세협상을 지나치게 미국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이번 협상에서 미국에 너무 많은 투자약속를 한 것이 앞으로 우리나라 경제에 큰 부담은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계속되는 협상과 실행에서 지혜롭게 관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깨어 기도하자!
오늘 우리는 잠언을 읽었다. ‘잠’은 ‘바늘 잠’ 자이다. ‘바늘로 콕 찌르는 말’이 잠언이다. 정신차리라고, 지혜롭게 하라고 바늘로 콕 찌르는 말이라는 거다. 잠언 31장 중에서 앞의 아홉 장은 공식적인 지혜의 가르침이다. 주로 고대 이집트, 바벨론, 이스라엘의 공직사회에서 젊은 국가 일꾼들인 행정관들에게 지혜로운 삶과 행동을 일러주는 교훈을 담은 책이 잠언이고, 왕이 젊은 행정관들을 교육하는 교재로 썼던 것이 잠언 1-9장의 내용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잠언 10-31장은 짧은 지혜의 속담을 수집해 놓은 것이다. 몇 개의 지혜 묶음들을 편집한 것이 잠언이다.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이해하도록 하고,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를 드러내어 행동 지침을 주기도 한다. 이 속담들은 명령, 금지, 권고, 훈계의 모양을 띠고 있는, 구약의 대표적인 교훈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처세술,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오늘 말씀 4-5절은 그릇 만드는 자가 쓸만한 그릇을 만들려면 은에서 찌꺼기를 제해야 하듯이, 왕 앞에 악한 자를 제해야 왕위가 견고해진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6절, 7절은 왕 앞에서의 자세와 태도를 말한 것이고, 15절까지 이어지는 내용은 왕 앞에 선 신하의 처신을 다룬 내용이다. 6-7절은 겸손과 겸비를 다루고 있다. 6절을 새번역으로 읽어보자.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높은 사람의 자리에 끼어들지 말아라.’ 실제로 궁정에서 왕과 함께 살아가는 신하들에게 더 높은 지위와 권력을 얻으려고 성급하게 출세를 위한 자리로 뛰어들지 말라는 비유적 가르침이다.
6절은 금지명령이고 7절은 그 이유이다.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교만과 성급보다는 겸손과 겸비가 결국 보상을 받을 것이다. 높은 자리에 남보다 앞서가려고 억지로 올라가지 않는 분별력이 궁정에서의 ‘더 나은’ 처세이며, 그 분별력으로 인정받고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더 나은’ 처세란 욕심에 따라 높은 곳을 탐하는 성급함을 버리고 ‘이리로 올라오라’(7)고 권유받을 때까지 스스로 낮은 곳에 처하여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궁정의 신하가 처신해야 할 기본자세이다.
6절은 훈계를 두 가지로 전하고 있는데, 결국 요점은 ‘너는 더 높은 자리나 더 존귀한 자리에 앉지 말라.’는 것이다. “왕 앞에서”와 “대인들의 자리” 즉 높은 사람의 자리라는 말은 왕실에 대한 관심과 계급, 정치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얘기이다. 7절은 6절에 나오는 조언에 귀를 기울어야 할 이유를 말하는 부분이다. ‘저리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을 듣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자기의 자리가 있음에도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으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자기의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민망한 일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만일 그대가 적합한 경의를 표한다면, 그대는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권력자들 속에서 자기 자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 또 권력자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속담이 필요한 사람은 야심을 가지고 국가 관료가 되어 성공하려는 사람이고, 그들에게 이 조언은 큰 도움이 된다. 이 속담은 잠언에 나와있으면서 신약성서의 구원의 가르침과도 일치된다. 눅14장(7-14절)에 보면,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누가복음 본문은 높아지기 위해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 높아지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를 말한다!
여기 잠언은 그 말씀의 배경이 왕과 신하의 관계이다. 즉 고대의 왕궁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고대의 왕궁은 왕이 있는 곳이다. 의미를 확대하며 왕이 있는 곳은 어디나 왕궁에 버금 간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예수를 왕으로 삼고, 왕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왕이신 예수가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니(눅1:79), 그를 따라가다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물게 된다. 그곳이 우리의 왕이 계신 궁정이며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궁정에서 더 낮추고 겸허하게 행동해야 한다. 궁정 신하들에게 겸손을 교육하는 잠언의 말씀은 내 삶의 자리인 하나님의 궁전에서의 사는 방법 역시 겸손이라고 가르쳐준다.
이 잠언의 말씀은 히스기야 왕 시대에 수집된 지혜의 말씀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히스기야 왕 시대에 필요했던 지혜는 세상에서 샬롬으로 머무는 방법으로서 겸손과 낮아짐을 오늘 여기에서 우리 삶의 방법으로 현재화해서 행하는 것이다. 실력과 지혜를 갖추되,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낮추며 살아가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이다.
남미 에콰도르의 빌카밤바 지방, 파키스탄의 훈자,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코카서스 지방은 세계 3대 장수지역으로 불린다. 이곳에는 몇 가지 공동점이 있다고 한다. 문명과 떨어져 있고, 고원지대의 분지로 기후와 환경이 쾌적하며, 주식이 잡곡과 채소와 과일이고, 부지런히 일하고 충분히 섭취할 뿐아니라 칼슘과 각종 미네랄과 희귀원소를 함유한 생수를 마신다고 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천성적으로 겸손하고 낙천적이어서 늘 기뻐하며 감사하며 산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그 지역 사람들이 장수하는 비결이라고 한다.
좀 전에 언급한 누가 14장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인데,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하신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았을 경우에 초청한 사람이 와서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할 텐데, 그러면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면, 초청한 사람이 와서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가 이 비유의 결론이다.
겸비에 대하여는 성서의 다른 곳에서도 가르친 바 있다. 야고보 4장 10절을 보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였다. 마귀의 공격에 대항하여 이겨낼 수 있기 위하여는 믿음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무기로 무장할 필요가 있는데, 그 중에 최고의 무기가 자기를 낮추는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하나님은 동행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하시고, 마귀와의 싸움에서도 편들어 주신다!
벧전 5장 6절을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였다. 그런데 두 절 뒤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이 말씀이 무엇인가? 종말의 시대에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시어 높여주시기 때문에,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신다! 할렐루야! 마귀 시험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고 낮아져야 한다!!
오늘의 말씀을 모아 두 가지의 결론을 말씀드린다. 첫째, 왕궁에서 신하들이 왕의 통치를 받듯이, 오늘 말씀은 하나님 나라 백성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오늘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겸손한 사람이 된다. 여러분의 생활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게 하라, 그러면 겸비해질 것이고,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높여주실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작아진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케 되는 것은 작은 죄까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죄 많은 이웃과 사람들 앞에서는 우리가 마치 의로운 사람인 듯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베드로나 바울처럼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사람은 겸비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겸손하려고 애쓴다고 겸손해지지 않는다, 자기를 낮춘다고 그냥 낮아지지 않는다. ‘겸손해야지, 겸손할 거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늘 교만하고 오만방자한 말과 행동을 일삼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찰하지 않기 때문에 낮아지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야 진실로 겸손할 수 있다. 능하신 주님 앞에 서라, 하나님이 우리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낮아질 것이다.
부자가 되고 싶은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여러 밭에서 밀을 조금씩만 훔치면, 들키지 않고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음 날 한밤중에 막내딸을 데리고 나와 망을 보게 했다. 남자가 첫 번째 밭에서 밀을 베기 시작하는데 딸이 소리쳤다. “누가 봐요!” 남자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훔친 밀을 가지고 두 번째 밭에 갔는데 거기서도 딸이 또 소리쳤다. “누가 봐요!”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도 없었다. 세 번째 밭에서도 딸의 외침은 어김이 없었다. 남자는 화가 나서 대체 누가 본다는 거냐고 소리를 질렀다. 딸이 대답했다. “아버지, 하늘이 봐요!” 막내딸은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겸비할 수밖에 없다!
오늘 말씀의 두 번째 요점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겸비해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작은 아이에게조차도 자신을 낮추는 진실한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높여주신다. 그런 사람이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굳세게 세워주신다! 진실된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보아 낮아지는 성도가 되기 바란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하나님 나라 백성은 스스로 낮아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높여주신다.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12세기 영성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영적 성숙을 위한 사랑의 4단계를 말한다. 1단계는 자기를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기적이다. 2단계는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목적은 자신에게 있다. 3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있다. 4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찬송하고 기뻐하라! 주의 궁전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위엄과 통치 앞에서 스스로 가장 낮은 자임을 고백한다. 그때 진정으로 하나님과 함께 높이 올리워질 것이다.
잠언의 지혜는 스스로 높아진 사람은 낮아지고, 낮아진 사람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 지혜의 길이요, 진실한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벨기에의 바뉴(Bannoux)는 카톨릭 성지인데, 치료의 샘이 있다. 순례자들은 저마다 양껏 물을 받아서 가져온다. 그래서 씻으면 병이 많이 낫는다고 한다. 그 중에 신비한 것은 오후 예배를 마치고 숙소로 귀가하는 행렬이다. 대부분 휠체어를 탔고, 대부분 불치병 환자들이니, 초라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줄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렬을 복주셔서 그 휠체어 행렬을 보는 사람마다 장관이고 엄숙함을 느낀다고 한다.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겸손하게 나아가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 주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주님 때문에 낮아지라! 그것이 참된 지혜다, 그럴 때 주님이 높여주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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