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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가정의 미래 (삼상2:18-26) [2018년 12월 30일, 성탄후 첫째/ 송년주일]
2018-12-30 12:35:28
박신진 목사
조회수   18
설교일 2018-12-30
설교말씀 삼상2:18-26
설교제목 신앙가정의 미래

신앙가정의 미래

삼상2:18-26

20181230[성탄후첫째/송년 주일]

 

한 해를 보내는 주일입니다. 지난 한 해 52주일마다 은혜를 내려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립니다. 돌이켜보면 즐겁고 행복한 일이 있었던 반면, 허물과 실수와 불만과 고통도 많았던 한해였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하나님께서는 선을 이루셨습니다. 구원해주셨고, 살려주셨고, 다시 일으켜 세우셨으며, 희망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무사히 한 해를 보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독일의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창조질서 네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가정, 국가, 교회, 노동, 이 네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간여하시는 창조의 기본 질서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이 중 첫 번째가 가정입니다. 구약에 가정이라는 단어가 1,850회 나옵니다. 유대인들의 가정교육은 어느 나라에 비교할 수 없이 철저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잘 아는 쉐마 교육이지요. 신명기 6장에 나오는대로,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되는 신앙교육의 헌장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 사도신경을 고백하여 우리 신앙을 분명히 하는데, 유대인들은 사도신경 대신 거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쉐마를 어릴 적부터 외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녀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교육시키라는 내용입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바로 온 가정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하여 복을 주십니다. 가정을 바로 세울 때 우리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지금 어떤 형태의 가정으로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의 가정을 믿음으로 세우면 됩니다. 아직 대가족의 형태로, 3대가 함께 사는 가정이 있습니다. 또는 부부에 자녀들을 데리고 있는 가정도 있고, 자녀들을 다 결혼시켜 보내고 노인이 되어가는 부부가 빈 둥지를 지키고 있는 가정도 있습니다. 재혼하여 새로 모인 가정도 있고, 헤어져 따로 사는 가정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함께 사는 게 좋지만, 안 맞으면 따로 살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혼자 독립하여 사는 가정들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혼밥족들을 위한 메뉴가 식당마다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모든 가정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오늘 한 해를 보내면서, 모든 가정들은 생활 속에서 신앙의 집, 거룩한 성전을 바로 이루어 하나님이 언약하신 복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성경은 엘리 제사장 가정과 사무엘 가정이 대비되어 나옵니다. 엘리 제사장 가정은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해서 결국 실패한 가정이 되었고, 사무엘 가정은 그 어머니 한나가 기도의 사람이고, 아버지 엘가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큰 복을 내리셨습니다.

구약의 욥 가정은 모범 가정이었다가 큰 실패를 겪고 난 후 다시 우뚝 선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 가정은 대를 이어 신앙이 자란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욥 한 사람이 신앙으로 바로 서서 온 가족을 인도한 가정이었지요. 욥기 11절에 보면,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온전하다라는 말은 흠이 없다는 뜻입니다. 욕심과 사심이 없이 겉과 속이 거의 같은 사람을 온전하다라고 합니다. 동기의 순수성이 있습니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성실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시는데(17:1), 그때 완전에 해당하는 말씀이 온전하다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약속을 받고서도 많이 흔들립니다. 그 때문에 가정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요. 결국 장성한 이스마엘을 어머니 하갈과 함께 집에서 내보내야 하는 아픔도 겪습니다.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이 온전하여 지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정직하였습니다. 정직하여 인간관계에 속임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주로 인간관계에서 얍삽하거나 거짓이 있지 않은 것을 정직하다 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정말 정직하지 못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썸 탄다는 말을 쓰지요. 아마 요즘 세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말인 것 같습니다. 남녀가 사귀는데, 예전에는 한 눈에 반했습니다. 차라도 한 잔 드시면서 인생을 의논해 보실까요?’ 하였는데, 요즘 그랬다가는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이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지,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일시적인 호기심인지 진정한 사랑인지, 점검하고 대화하고 시간을 두고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언가 확정하지 않고 살펴보는 기간을 가지는 것을 썸 탄다고 합니다. 문제는 한 사람하고만 썸 타는 게 아니라 두 사람, 아니면 그 이상과 동시에 썸을 탈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시대가 이렇게 변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인간관계에 있어 정직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 의인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멀리피하는 것은 경외가 아니지요. 두려워하되 존경과 사랑으로 감동해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접근하려는 마음이 경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이 너무나도 좋아서, 두려워하면서도 가까이 하고 싶은, 주님 안에 거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이 하나님 경외입니다. 주일 성수 못하면 벌 받을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 집에 오고 싶고 하나님 만나고 싶어서 왠지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이 경외심입니다. 목사님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또한 욥은 네 번째로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악에서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용납하지도 않고 아주 멀리한다는 뜻이지요. 욥은 선과 악 사이에서 썸을 탄 사람이 아니고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이런 가정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가정,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가정입니다.

 

오늘 성경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엘리 제사장의 잘못된 가정과 한나의 거룩한 가정을 성경이 대조함으로 무엇이 참된 신앙가정인지를 분별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예배를 온전히 드리는 가정이 참된 신앙가정입니다. 당시 엘리 대제사장은 제사장 가문 중에서 유력한 비느하스 가문이 아니라 이다말의 후손이었습니다. 출신은 별로 좋지 못했던 것이죠. 그러나 혼란한 사사 시대에 대제사장직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유능하고 실력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름대로 존경받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가정이 건강치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패륜아들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바로 앞부분을 보면, 그들은 심히 큰 죄를 저질렀는데,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멸시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니아추인데,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훼방 및 경멸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도 당시 제사장직의 세습에 따라 제사장들로서 누구보다 제사를 거룩하게 드릴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탐욕만을 채우는 데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화목제물로 쓰이는 고기 솥에 갈고리를 넣어 자기 것으로 삼았고, 제물의 기름을 태우기 전에 교기의 날 것을 떼어 자기들 욕심을 채웠습니다. 이 제사는 화목제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분쟁을 끝내고 화목이 이뤄졌음을 감사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다듬지 않은 돌로 단을 쌓고 흠없는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회막문에서 잡았으며, 그 피는 제사장들이 제단 사면에 뿌려 정결케 하고, 내장과 콩팥, 간 등을 제단에서 불살라 드렸습니다.

화목제는 기름 부분만 번제단에 태우고, 살코기 부분은 제사장과 제물 바친 자가 나누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은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로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의 두 아들은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을 무조건 자기 몫으로 하고, 여호와께 태워드리기 전에 먼저 자기가 취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한마디로 예배와 제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원칙대로 거룩한 마음으로 하지 않고 식욕을 채우려는 욕망만 가득했던 것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내 기분에 맞추고 내 욕망을 채우는 것이 예배입니까? 아니지요! 예배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정성을 다해 신앙을 고백하고 주께 영광 돌려드림으로, 피조물 가운데 주님이 홀로 높임을 받도록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평안을 얻고 위로를 받는 것은 예배자에게 자연스럽게 뒤따라 오는 부록이지, 그것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 아닙니다. 예배란 철저히, 주님 중심,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서 회개를 시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회개가 가시적으로 있든 개인의 예배 준비로 삼든, 중요한 것은 회개함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분께 맞추려는 진심이 예배를 예배답게 하는 첫 단계인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주님 눈높이에 나를 맞추는 예배가 참 예배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자기 소욕에 기뻐하는 대로 예배를 드림으로 예배에 실패하였고, 후에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간음하는 일을 비롯하여 온갖 죄를 저지르다가 결국 동시에 둘 다 망하는 비극을 당하고 맙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지난 한 해 동안 어떤 예배를 드렸습니까? 시간과 방식과 모든 예배의 자세가 자기 중심적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참된 예배를 드렸습니까? ‘네 자식 귀하거든 예배를 바로 가르쳐라고 전통적인 목회자들은 강조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목회자 리처드 백스터는 소도시 키더민스터에서 오래 목회했는데, 시골 소읍의 교회가 후에 큰 부흥을 이뤄 목사님이 떠나실 때는 큰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백스터 목사님의 부흥 비결은 예배의 활성화에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 예배도 전통적인 지루하고 무기력한 예배를 벗어나는 것이었지만, 특히 가정예배를 모두 드리도록 했는데, 이렇게 생활 속에서 예배가 살아나자 경건한 부흥의 역사가 교회 전체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가가호호 아침 저녁으로 찬송과 기도, 그리고 성경 읽는 소리가 온 마을에 메아리쳤다는군요.

백스터 목사님이 그 교회를 떠나고 80년 뒤에 요한 웨슬리의 동역자였던 휫필드 목사님이 키더민스터 마을을 방문했을 때, 여전히 가정예배가 힘있게 드려지고 있었답니다. 감동한 휫필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백스터 목사님의 가르침과 사역, 권징의 달콤한 향기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크게 원기를 회복하게 됐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일주일에 한번만 드려도 좋습니다. 너무 길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짧지도 않게 온 가족이 모여 찬송을 부른 후, 말씀 읽고 메시지를 나누며 서로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십시오! 생활에서부터 예배가 살아있을 때 그 가정은 분명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자녀들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주일은 신학적으로 작은 부활절입니다. 원래 초대교회는 유대교의 규례를 따라 안식일인 토요일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주일로 바뀝니다. 왜일까요? 안식교에서 비판하는대로 일요일이 태양절이기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라,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부활기념일이 바로 주일입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일년에 한번만 드리지만, 주일마다 부활을 기념함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경축하여 부활의 기쁨과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부활에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죄를 이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장날과도 같은 부활기념일인 주일에 모여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과의 영적 일치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신앙가정은 주일을 성수하여 예배를 바로 드리는 가정이요, 이런 가정의 미래는 모든 저주가 떠나가고 잘 되고 번성하며 복이 넘칠 것입니다.

 

다음 생각할 것은 참된 신앙가정은 부모가 신앙의 본이 되는 가정입니다. 안타깝게도 엘리의 아들들은 성소의 여인들과 동침함으로서 바알 제사와 같은 참람한 죄를 저지릅니다. 다산과 풍요를 주관한다고 여겨졌던 바알신에 대한 제사방법은 혼음이 들어있었습니다. 바알신전에 여사제를 두고 그들과 동침함으로 풍요에 이를 수 있다는 잘못된 미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바알 숭배자들은 바알 신전의 여사제들과 함께 음행하는 것을 제사의 절정으로 삼았고, 의무적으로 치렀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들은 우상숭배자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는커녕 그들을 흉내내고 그들의 악습을 따라갔습니다.

두 아들의 악행에 대한 이런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어떻게 했습니까? 23-2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엘리는 두 아들을 책망했습니다. 하지만 책망으로 그치고 아버지로서 권위있는 신앙의 행동을 확실하게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제사장 지위를 박탈하지도 않고, 이런 일들이 드러났음에도 아버지와 아들들이 모여 주님 앞에 눈물로 참회기도를 올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22절에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늙었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나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으로서의 영적 권위를 잃어버리고, 대제사장으로서의 영적인 능력마저 약해졌음을 말합니다. 엘리는 아들들을 권고하였으나, 아들들은 전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25절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예배를 능멸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의 말로는 비참한 실패라고 성서는 경고합니다.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형성되기 전에 바르게 예배하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때를 놓쳐버렸습니다. 그들이 뒤늦게나마 가정을 바로 세우려 했지만,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권고와 돌봄을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제사장 가문의 축복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엘리는 자녀들의 악행을 알고 돌이켜보려고 하였으나, 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교육은 이를수록 좋은 것인데, 엘리는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할 젊은 시절을 놓쳐버렸습니다.

부모만 잘 믿으면 되는 게 아닙니다. 자녀들 역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엘리가 가르쳐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불신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부모의 이해와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신학교에 온 친구들이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니 주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런데 이 복을 걷어차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큰 복을 받고도 복을 누리지 못하고 신앙에서 멀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유산을 남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대단한 유산을 물려줘야 부모노릇 잘 하는 게 아닙니다. 영적 자산, 삶의 태도와 가치관의 근본이 되는 믿음을 물려주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남겨주는 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생명처럼 사랑하지만, 너희에게 물려줄 것이라곤 신앙밖에 없단다. 나는 너희들이 하나님 잘 믿고, 교회에서 바르게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얘들아,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일을 성수해라!” 이것이 본을 보이는 신앙 부모의 권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신학대학장을 지낸 정대위 교수가 숭실중 시절에, 하루는 평양의 식당에서 친구들과 얘기 중 자기는 목사가 되기로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때 같은 식장 옆 탁자에 마침 춘원 이광수 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앉았다가, 도산 선생이 담배불을 끄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목사님, 용서하십시오, 이전 대전감옥소에 있을 때 생긴 재주라 아직 못버렸습니다." 중학생들을 존중하며 목사가 되겠다는 뜻을 격려하는 이 따뜻한 관심이 훗날까지 정대위 교수에게 큰 격려가 되었답니다. 우리는 가정과 사회에서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전해주는 어른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무엘의 가정처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최선을 기울여 서로 사랑하는 그런 가문이 되어야 합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여러분의 가정은 신앙가정으로서 바르게 예배드리고, 어른들이 신앙의 본을 보임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정욕과 세속주의의 홍수가 휩쓸고 가는 이런 세태에서 우리는 주일을 성수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함으로 사무엘 가정과 같이 복된 가정, 잘 되는 가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정들이 다 되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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