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5-0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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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창21:14-21 |
설교제목 | 네 손으로 붙들라! |
네 손으로 붙들라!
창21:14-21
2025년 5월 4일 [어린이주일]
20년 쯤 전(2004) 이맘 때, 북한 신의주 근처 용천역 폭발사고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막대하여 북한 주민들이 많은 고통을 겪은 일이 있었다. 그때 역 근처 용천소학교에서 수업 중이던 초등학생을 비롯하여 170여명이 숨지고 1천3백여 명이 부상당했는데, 남북의 관계가 좋을 때라서 우리 쪽에서도 보도를 했다. 그때 집이 무너져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이 8천여 명이었고, 재산피해액이 엄청났다. 수십 년 전에 이리역, 지금의 익산에서 비슷한 폭발사고가 있었는데, 그때의 피해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고 했다.
교회를 비롯한 구호단체들은 긴급 애도와 위로의 성명을 내고 구호사업을 발 빠르게 진행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실의에 빠진 북녘동포들에게 한국교회의 관심과 사랑이 재건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바란다는 성명도 냈다. 내가 시무하던 교회에서도 꽤 큰 헌금으로 동참하였고, 제 친구 중에 큰 교회를 담임한 친구 하나는 중국 쪽에서 따로 트럭 한 대를 섭외하여 피해지역에 보냈다고 하였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우리교회에서도 틀림없이 참여했을 것이다.
용천은 광복 이전 기독교 부흥의 중심 지역 중 하나였다. 용천군 지역에는 신시교회를 비롯 37개 교회가 있었다. 용천면에만 5개 교회가 있었으니, 당시 선교상황을 살펴볼 때 비교적 많은 교회가 밀집되어 있었다. 용천 출신의 대표적인 기독교 인물들은 성산 장기려 선생, 함석헌 선생, 첫 여성 국무총리로 추천되었다가 야당의 반대로 불발된 장상 전 이대 총장과 차병원 이사장 차경섭 선생 들이다. 평소에는 북한 돕기 운동에 냉담하다가 무슨 일이 터지니까 ‘한탕주의’ 비슷하게 너도 나도 나서서 자기 이름을 걸고 돕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쨌든 용천역전 사고로 사망한 희생자 170명 중에 어린 초등학교 학생이 무려 80여 명에 달하였다. 가까이 있던 용천소학교 학생들이 폭발직전 불이 난 기차를 구경하러 기찻길 옆으로 몰려오기까지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최근에는 남북교류가 딱 끊어져서 어떤지 모르지만,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니 문득 북녘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 2,30년 년 전 중국 연길에 갔을 때, 연길 도서관이나 시장에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북한 출신 조선족 아이들, 일명 꽃제비라고 하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던 것을 내 눈으로 보았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이제는 그런 아이들을 볼 수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은 잘 보호받고 대우받으며 풍족하게 사니까 다 평안하고 행복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몇 년 전 21년 OECD 국가 중에서 주관적 행복지수 조사에서 꼴찌를 차지했다고 한다. 통계에 의하면 아이들이 가장 불행한 나라라는 조사 결과였다. 그 이유는 지나친 경쟁 때문에 생겨난 학업스트레스와 은근히 퍼져있는 아동학대 때문이라고 한다.
성서 본문에 이스마엘이라는 어린이와 어머니 하갈의 이야기가 나온다. 불행한 모자의 이야기이다. 하갈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하자 기다리다 못해 아들을 낳기 위해 얻은 둘째 부인이었다. 그 둘째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다. 아마 아브라함의 본부인이 영원히 아들을 낳지 못했다면, 이스마엘은 어머니와 함께 아브라함 가문의 대를 이으며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아브라함은 본부인 사라에게서 100세에 아들을 낳았다. 그 이름이 이삭이었다. 이삭이 자라서 젖을 뗄 날이 되었을 때, 본부인 사라는 정식으로 남편에게 요청한다. “하갈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10절)
아브라함 가정에서 이스마엘은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요, 천덕꾸러기였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아이들은 어떤 사람인가? 많은 부모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누구는 자녀를 인정하고 자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렇지만 뭐 자랑할 것이 있어야지요. 인물이 잘생겼나, 공부를 잘하나, 그렇다고 뚜렷한 특기가 있나, 매일 말썽만 부리고 부모 속만 상하게 하는걸요!” 오늘날 우리들 가정에서 적지 않은 이스마엘들의 모습을 본다. 부모에게 인정받고 사랑으로 대우받지 못하면 바깥을 떠돌게 된다.
하나님은 아이를 다르게 보시기 원하신다. 이스마엘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까?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아들도 너의 씨니, 그 아들은 그 아들대로 내가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13절) 그뿐아니라 정처없이 광야를 헤매다 빵과 물이 다 떨어져 죽게 되자 통곡하는 하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있는 그대로 존귀하고 가치있는 아이로 보고 계시며, 광야에 샘을 예비해주셔서 그 아이의 갈길을 열심히 후원해주고 계신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인정해줄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저렇게 되면 좋을 텐데,’ 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자녀에게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는가? 우리가 우리 자녀의 존재를 올바른 눈으로 바라볼 때 그 자녀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아이들 속에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면에는 이미 여러분이 자녀를 문제아로 보는 잘못된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른에게 있다. 우리가 먼저 아이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있으며, 아이들을 문제 아이로 바라보고 있는 데 문제가 있다. “네가 문제 아이가 아니라, 내가 문제 어른이다.” 이렇게 시인하자.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들이 성적표를 받은 날 집단 실종사건이 발생했다. 저녁 내내 부모들이 걱정이 되어 찾아다녔는데 결국 밤 늦게야 없어졌던 아이들을 찾았다. 그런데 아이들의 실종 연유가 기가 막혔다. 성적표를 받아보니 지난 달보다 점수가 훨씬 낮았다. 그러자 한 영리한 어린이가 묘안을 냈고 모두가 동의를 하였다. “얘들아, 오늘 집에 들어가지 말자. 이대로 집에 갔다가 틀림없이 혼날테니, 밤늦게까지 나타나지 말자. 부모님들이 몹시 걱정하시다가 밤늦게 나타나면 시험 점수가 나빠도 그런 것쯤은 문제도 안 삼을 거야.” 그래서 아이들이 주머니를 털어 빵 등을 사가지고 공원과 뒷산으로 놀다가 밤늦게야 나타났다.
아이들이 예의가 없고, 이기적이며, 교만해도, 돈을 지나치게 밝히거나 친구와의 관계가 엉망이어도, 학교 성적만 좋으면 모든 것이 미화되고, 그렇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문제시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요즈음은 할아버지가 되어 어떤지 잘 모르겠다. 가정에서까지 그 아이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영원히 거처를 찾지 못하게 된다.
어떤 성실한 가정의 아이가 성적이 형편없이 낮았다. 대부분 ‘양’, ‘가’였다. 그런데 유독 국어만은 ‘수’였다. 우리 같으면 대부분 ‘수’, ‘우’이고, 한두개가 ‘미’만 되어도, “어머, 이 과목은 왜 ‘미’를 받았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이 부모는 전부 ‘양’, ‘가’이고, 국어만 ‘수’ 인데도 진심으로 칭찬해주고 격려해 주었다. 잘하는 국어를 놓고 칭찬하며 격려하는 가운데 자란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원고 1000매 분량의 그럴듯한 소설을 썼다. 지능이 어쩌면 남보다 떨어질지도 모르는 아이가 그토록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세라는 위대한 인물이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요게벳이라는 지혜롭고 용기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히브리 아이들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태어난 모세였지만, 어머니는 그 아기의 준수함을 알아보았다. 여러분 자녀들, 손자녀들이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한 아이로 태어났는지, 얼마나 씩씩하고 훌륭하게 자라고 있는지를 발견하시기 바란다. 우리 자녀들을 우리가 만들었나? 우리가 만들었다면 문제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이용하여 하나님이 만드셨다. 우리 아이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그 작품 안에 있는 위대함을 알아보는 지혜로운 부모들이 되셔야 한다. 할수 있는대로 하나님이 여러분 자녀에게 만들어 놓으신 좋은 점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라! 여러분의 자녀에게 있는 좋은 요소, 위대한 싹을 아이들과 함께 발견하고 붙들라!
오늘날 많은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꿈을 키우며 잘 자라고 있지만, 적지 않은 아이들이 매우 걱정스럴 정도로 타락하고 잘못 되어가고 있다. 바르고 착실하게 자라는 아이들조차 안심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걱정하는 소리는 많으나 무엇부터 해결해야 할지 모른다. 생각해보라! 여기 이스마엘이 겪는 문제는 사실 어른들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약속을 기다리며 성실하게 살지 못한 아브라함이 성급하게 이집트 여인을 첩으로 얻은 결과 이스마엘은 혹처럼 붙은 존재가 되었다. 어린이의 문제는 곧 어른의 문제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큰 혜택이나 좋은 선물을 주기 전에 이해해 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얼마나 우리의 이해를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아이들의 정서를 안정되게 하고 풍요롭게 하려면 이해해 주어야 한다.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청소년까지 조금만 우리 눈높이를 맞추고 여유있게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우리들 문제에 꼭 매여있고 욕심이 앞서서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른들의 죄가 정말 크다. 아이들의 마음이 이해받지 못하여 광야와 같이 메마르고 황폐하면 무슨 좋은 말씀이나 훈계를 주어도 소용이 없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에게 말을 건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다. 그런데, 대부분 엄마가 그 시간에 집에 없거나 엄마가 있어도 아이의 말을 들으려고는 아니하고, “빨리 씻고 어서 숙제부터 해!” 한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와서 바로 또 공부하라는 소리를 듣고는 아이가 공부에 질려 버린다. 학교나 학원에서 돌아오는 피곤한 아이들에게 가슴을 열고, “얼마나 애썼니? 좀 쉬어라, 어려운 일은 없었니?” 하며 따뜻하게 맞이해 줄 수는 없는 걸까? 10등 안에 들지 못했다고, 30등 했다고 야단치기에는 아이들의 성장과정이 너무 벅찬 것이 아닐까? 아이들은 이해받기를 바란다.
어느 젊은 엄마의 이야기다. 거실 청소를 막 끝내고 쉬려는데, 다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를 부르며 들어온다. 응접실 한 가운데까지 들어온 아이를 보고 엄마는 한숨이 나왔다. 아이의 두 손에는 들꽃이 가득 들려있었고, 치마 끝에는 흙이 묻어 있었으며 지금 막 청소를 마친 응접실 양탄자 위에는 들꽃에서 떨어진 꽃잎이며 다른 잎들이 마구 떨어져 있었다. “아니 얘가? 기껏 청소해 놓았더니, 이런 것 무엇하러 갖고 들어왔어? 어서 갖고 나가!” 아이는 겁에 질려 슬그머니 밖으로 가버린다.
그러나 이 젊은 엄마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이가 왜 그 지저분한 들꽃을 꺾어가지고 왔겠나? 아이는 들에 예쁜 꽃이 피어있는 것을 보고 시간을 들여 땀을 흘리며, 정성을 바쳐서 꺾어 가지고 왔다. 엄마에게 예쁜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이다. 이 일 속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예쁜 마음과 엄마에게 선물하려는 훌륭한 덕성이 있다. 그런데, 엄마는 무서운 얼굴로 소리친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를 다시는 이런 식으로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런 엄마는 훗날 늙어서 딸이 명절에 선물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불평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그러지 말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자. 아이들의 의사를 들어주고 그들의 감정을 인정하자.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자. 아이들과 같이 대화하자.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고, 아이들의 공부나 어려운 문제해결에 인내심을 가지고 도와주자. 아이들이 삶의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자. 아이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자!
어린이날을 제정한 사람인 소파 방정환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사회운동가이다. 어린이들을 위해 1922년 5월 1일에 어린이날 행사를 주최하였다. 소파가 노동절인 5월 1일에 어린이날 행사를 색동회 회원들과 개최한 이유는 당시 어린이들이 억압받고, 자본주의의 오랜 악습인 아동노동을 하고 있어 이들을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하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실제 당시 어린이 인권선언을 보면 어린이에게 낮춤말을 쓰지 말고 높임말을 쓸 것, 목욕 등의 위생을 위할 것, 어린이가 잘못을 했더라도 알아듣기 쉽게 차근차근 설명할 것, 잡지를 읽도록 해서 건강한 정서를 갖도록 할 것, 원족(소풍)을 자주 하도록 할 것(어린이들이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가지도록 함)을 말하고 있다. 실제 방정환 선생이 조직하여 활동한 소년구락부 활동도 1주일에 한 번은 문화재를 보기, 연극 방곡령 공연(1918년) 및 관람, 밤 줍기 행사, 서로 높임말을 쓰기 등의 활동과 규칙이 있었다.
1923년 5월 1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였는데, 색동회라는 이름은 후에 동요작가로 활약하게 되는 윤극영 선생이 예쁜 색동저고리를 떠올리며 제안한 이름이다.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형제별〉등의 동요, 동화, 《칠칠단의 비밀》 등의 소년 소설, 동극 등의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에 힘썼으며, 1928년에는 세계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기도 하였다.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도로시 로 놀트의 ‘어린이들이 살아가면서 배우는 것들’이라는 글을 소개하겠다.
꾸중 속에 살아가는 어린이는 저주를 배운다./ 적개심 속에 살아가는 어린이는 싸움을 배운다./ 비웃음 속에 살아가는 어린이는 자기 속으로 숨는 법을 배운다./ 부끄러움 속에 살아가는 어린이는 죄의식을 배운다.// 관용 속에 살아가는 어린이는 인내하는 법을 배운다./ 격려 속에 살아가는 어린이는 자신감을 배운다./ 공평함 속에 살아가는 어린이는 정의를 배운다.// 적절한 보호 속에 살아가는 어린이는 신념을 갖는 법을 배운다./ 인정 속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는 자신을 좋아하는 법을 배운다./ 포용과 우정 속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는 세상에서 사랑을 찾는 법을 배운다.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자녀들은 가장 소중한 보배인가? 지금 여러분이 잘 돌보지 못하여 거의 학대하다시피 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을 다시 보라. 하나님의 작품인 자녀들을 눈을 떠서 새롭게 보라.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하시는 명령을 들으라! “일어나 네 자식을 일으켜라!” “네 손으로 그 아이를 붙들어 주어라!” “눈을 떠서 이 광야에 솟는 샘을 보고, 네 자식에게 그 샘물을 먹여서 원기를 북돋우어 주어라!” 주님은 우리 아이들과 우리 이웃의 아이들을 우리 손으로 붙들어 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손으로 지켜주라고 하신다. 우리 사회의 모든 어린이들을 우리가 지켜 예수께로 인도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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