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0-08-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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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요한4:11-26 |
설교제목 | 코로나시대의 예배와 믿음 |
코로나시대의 예배와 믿음
요4:11-26
2020년 8월 9일 [성령강림후 열째주일]
이번 여름은 역사상 처음 있는 여름이다. 더위나 장마보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이 더 걱정되는 여름이기 때문이다. 아마 여름에 마스크를 끼고 생활하는 것도 처음이고, 사람들이 아무도 외국으로 안 가고 국내에만 여행하는 것도 최근 들어 처음 있는 일이며, 학교가 언제 방학을 했는지 개학을 하는지 헷갈리는 것도 전에 없던 일이다.
우리 삼척제일교회학교는 이번 여름에 어렵게 성경학교를 했다. 유치부는 7월 한달동안 주일마다 정규예배와 같은 시간에 여름성경학교 내용을 공부하고 노래를 배우고 활동하였고, 초등부는 8월 들어 지난 주일과 이번 주일에 3시간씩 시간을 정해서 여름성경학교 초등부 과정을 배우고 활동하였다. 많은 어린이들이 나오지 못했다. 아마도 코로나바이러스 조심하느라 성경학교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에 있든지 모든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전달되기를 바란다.
지금은 코로나시대
지금은 온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을 받고 있는, 코로나시대라 할 수 있다. 너무나 인류사회에 이 바이러스가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원전과 기원후를 예수님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게 아니라, 코로나 이전 B.C.(Before Corona)과 코로나이후 A.D.(After Disease)로 나뉠 것이라고 말한다. 엄청나게 전파력이 강하기 때문에 이대로 가면 지구촌 사람들의 70%인 54억 명이 감염될 것이라고 한다. 현 의료체계가 감당하려면 우리도 노력해야 하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손씻기, 마스크 착용이 그것이다. 내년까지 예방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면 한 고비 넘기게 될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란 홀로 지내야 안전하다는 얘기다. 모여서 함께 이야기하거나 활동을 하지 않고 떨어져서 비대면으로 지내라는 것이다. 대부분 아이들은 개학을 해도 거리 두기 때문에 짝과도 대화도 많이 못하고 서먹서먹함을 다 풀지도 못했다고 한다. 배달음식이나 상품택배와 같은 배달문화가 발달할 것이고, 많은 것이 온라인으로 해결되고, 대화, 상담, 회의도 온라인으로 진행하게 될 것이라 한다. 발달된 인터넷을 통하여 온라인으로 모든 생활이 가능해지고, 인공지능까지 활용하게 되는 이른바 비대면문화, 언택트(Untact) 시대가 오고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떨 것인가? 전통적으로 모이기에 힘쓰던 교회는 어떻게 믿음을 유지해야 하나? 비대면 예배, 온라인 예배가 가능할까?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교회의 전통적 신앙 방식이 달라질까? 이제 이전보다는 훨씬 작은 집회인원으로, 예배를 지금처럼 함께 모여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드리는 예배로 하든지 방송을 켜서 온라인으로 드리는 비대면예배로 하든지 선택할 수 있게 될까? 영상예배를 활용한다면 우리의 믿음과 예배는 어떠할까?
A권사네 이야기를 해보겠다. 주일예배는 물론이고 새벽기도까지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A권사네 집이 코로나사태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생활, 예배생활의 변화다. 그 교회는 3월부터 6월까지 거의 넉달을 영상예배 위주로 예배를 드렸다. 몇주째 영상예배로 드리니까 그렇게 편하더란다. 물론 A권사와 남편은 옷을 단정하게 바꿔입고 예배드리는 시간과 자세를 갖추어 거실에서 예배드렸지만, 장성한 아이들은 자기들 스마트폰을 켜놓고는 편한 복장과 자세로 예배를 드렸다. 어느 주일에 둘째 딸은 몸이 불편하다며 방에서 누운 채 예배드리기도 하였다.
온 식구가 영상예배를 정한 시간에 준비된 장소에서 드리면 좋은데, 그렇게 여러 주가 되다보니 이제는 자기 원하는 시간에 녹화로 보기도 하고, 좀 지루하다며 다른 교회의 유명한 어느 목사님 설교를 찾아서 보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시장에서 물건 고르듯 골라보는 재미가 있다고까지 하였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골라 찾아가서 말씀을 듣고 찬양을 선택하여 함께 부르는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예배를 드려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안하고 뭔가 영적으로 채워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사실 준비되지 않은 급격한 예배의 변화는 많은 신앙적, 영적 문제를 가져온다. 건강한 신앙, 바른 예배생활은 준비되지 않은 그런 온라인 예배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교회론과 예배관이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 믿음이 자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태 때문에 교회의 근본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때 섣부르게 예배형태를 바꾸어, 우리가 지켜오던 신앙이 흔들리고 성전예배를 확립하지 못하면, 1)예배가 무너지므로 신앙의 체험과 내실이 흔들리게 된다. 2)공동체의 의미가 상실된다. 신앙이 개인주의화 되어버린다. 3)영혼과 마음을 중요시한 나머지 예배전통과 성전에서 드리는 만남의 예배 현실을 무시하면, 신앙이 현실과 동떨어진 마음종교가 되어버린다. 초대교회의 영지주의 이단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
결론은 예배!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방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는 아무도 없는 낮잠시간에 우물가를 찾아올 만큼 외롭고 소외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러 명의 남자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였고, 지금도 가정을 이루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의 갈증을 가지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생수를 주실 수 있다고 하신다.
여자가 물었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그러면서 예수가 자기들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신가 묻는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그럼 인생에서 목마르지 않게 그런 물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다. 여기서 여자는 단순히 우물의 물이 아니라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 달라는 믿음의 문제, 영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자의 생활 속으로 대화를 가져오신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의지하고 함께 하기를 원했던 남자는 다섯을 거쳐봐도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다. 지금은 여섯 번째 남자인데 남편도 아니다. 여자는 바로 영적 주제로 다시 나아간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 대화에 대한 결론으로 예수님은 중요한 말씀은 하신다.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3-24)
여자의 인생 목마름은 고달픈 인생길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물 뜨러 왔다가 예수를 만났는데,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신다. 이 예수님과의 대화는 예배로 결론이 났다. 무엇인가? 바른 예배, 참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예배인데, 거기에서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생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무식한 성경의 결론은 이것이다. 인생의 근본 문제는 예배에서 해결된다. 예배가 답이다!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25) 이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26)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된 예배이다!
예배의 중심은 그리스도
예배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높이고 내 죄가 사해지는, 하나님 임재의 시간과 자리이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실재이고, 그것을 모든 감각을 통해 경험한다는 데 있다. 하늘의 하나님, 시내산에서 강림하신 하나님이 거기 회막문에서 사람들과 만나시는 것이 예배다. 우리는 세속에 살면서 잊혀진 하나님과 만남을 회복하고 생생하게 경험하기 위해 성소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수가성 여자가 생수를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참 예배에 관한 말씀을 들은 것은 바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예배드리는 것이 우리 삶의 갈증을 해결할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던 삶을 기억하고 다시 체험하는 행위이다. 그 하나님과의 만남, 동행이 가능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 그의 십자가이다. 참된 예배를 말하고 이어서 내가 메시야라고 하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서있는 자리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 예배가 된다. 즉 온 인류는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 예수님을 통하여 참 예배를 회복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신다! 예수가 우리 생명을 살리신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허락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주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일으키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참된 예배가 이뤄지게 된다.
예배가 드려지는 교회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가? 참된 예배가 드려지는 곳이다. 참된 예배가 드려지는 예배자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예배는 사람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다. 하나님은 물론 어디에나 계신다. 그러나 예배하는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드려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므로 아무데서나 하나님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다. 즉 성전이다. 물론 우리는 예루살렘이라는 성전지역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역교회’라는 곳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두실 곳을 구별하셨으므로 그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창을 열고 기도하며, 성소에서 예배해야 한다.
구약은 성전신앙을 잘 보여준다. 신12:5-7.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1)찾아 나아가서,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2)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3)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4)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확고한 성전신앙의 전통 위에 교회가 서있다.
성서적 신앙에서 예배는 그 초점이 찾아 나아가서, 드리고,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찾아가서 드리는 것이고, 함께 먹고 가족들과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에서 눈물과 땀과 구별된 물질을 정성껏 드리는 실질적인 예배가 드려지지 않고는 참된 예배라 할 수 없고, 참된 예배가 없이는 참된 믿음도 가능하지 않다. 이 드림은 나눔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주님의 구원하시는 은혜,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영광의 체험 속에서 함께 기뻐하며 감격하는 것이 바로 예배의 축복이다.
성전보다 예배, 건물보다 믿음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빠져 예루살렘 성전을 우상화하였다. 그들은 법궤가 있는 그곳이 거룩한 곳이며, 절대적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신다. 이미 예루살렘성전은 그들의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훼파되고 멸절되었다. 우리는 지역교회로서의 예배당을 절대화하거나 우상화하는 교만에 빠져서는 절대 안 된다. 교회 좀 잘 지었다고, 교회를 크게 지었다고 그곳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보기에도 민망하다.
물론 우리는 장소를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 건물을 지나치게 숭배하는 것도 옳지 않다. 대교회주의에 빠져 모이는 숫자와 모임을 과장하면서 심리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믿음이라 하기보다 불신앙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별된 성전 자체를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여기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성소에서 예배를 통하여 만나주심으로 유지되고 깊어진다. 성전신앙이 없이는 바른 믿음의 성장도 보장할 수 없다. 그만큼 정한 시간에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는 중요하다.
건물보다는 영성이 중요하다. 장소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과의 영적 만남이 핵심이다. 그러나 그런 영성과 만남의 경험을 위해서 우리는 더욱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들려지는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 예배가 드려지는 성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시대가 혼자 생활하면서 비대면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방향으로 간다 할지라도,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위해서 성전으로 모이고 예배하는 한 시간을 지키는 믿음의 부흥이 더욱 필요하다!
사사로이 예배드릴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유투브나 인터넷 영상으로 드리는 예배의 치명적인 문제는 공동체성이 상실된다는 점이다. 예배는 본래부터 공중예배요 회중예배다. 예배는 공동체로 드려야 하고 하나님은 공동체 예배를 받으신다. 개인주의적 영성은 오랜 교회의 전통이 반대하던 것이다. 개인의 믿음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을 강조하는 것이 지나쳐 교회공동체를 떠난 개인주의적 예배는 반기독교적이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교회와 연합하여 예배한다. 존 웨슬리도 고독한 개인주의적 종교(solitary religion)는 기독교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성전에서 주일에 예배합니다!
시65: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구약의 성전 전통과 신약시대의 교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성전으로서의 교회를 중심으로 우리는 믿음이 자라고, 교회로서의 성전에서 예배하고 활동하면서 하나님의 품을 체험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므로, 교회가 성전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전예배가 바른 예배가 된다는 뜻이다. 예배드리는 성전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가 된다. 성전이 중요하다! 성전 중심주의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
주일은 어떤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주일예배에 대한 개념이 약해졌다. 예배는 아무 때나 드려도 되나? 그러나 모든 신자는 주일예배를 드려야 한다. 웨슬리도 영국성공회의 주일예배를 끝까지 중요하게 여겼다. 유대인이 성전과 안식일을 거룩한 장소와 시간으로 여겼듯이, 초대 기독교인들은 주일에 모였다.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읽고 성만찬을 하고 연보를 하고 온갖 좋은 일에 대한 교훈을 들었다.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주일에 단지 부활을 기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중요하다. 그리하여 매 주일 우리는 부활을 새롭게 경험하는 것이다!
오늘의 말씀을 들으시라! 교회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구주로 모신 사람들의 공동체다. 주일은 부활하신 주님을 새롭게 고백하는 예배의 날이다. 교회는 성전에서 주일에 주님을 예배한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곳이 성전이다. 사사로이 예배할 수 없다! 드림으로 예배하며, 만남으로 믿음이 더욱 두터워진다! 우리는 모두 주일에 예배함으로 성전공동체의 일부가 된다. 이것이 교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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