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18-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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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행20:22-27 |
설교제목 | 성령에 매여 사는 사람 |
성령에 매여 사는 사람
행20:22-27
2018년 8월 5일 [성령강림후 열한째주일]
바울은 예수님 다음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는 데 바울이 없었더라면 이뤄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역사는 어떤 한 사람의 힘으로는 움직여지지 않고 전체적인 흐름과 모든 변화요인이 합쳐져서 하나의 결과로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기독교역사에 있어서는 바울이라는 한 개인이 미친 영향과 그 성과가 정말 놀랄 정도로 대단합니다. 바울이 있었기에 예루살렘교회가 바로 설 수 있었고, 바울이 있었기에 아시아교회들이 튼튼히 서서 이방선교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며, 바울이 죽기까지 전진했기 때문에 유럽으로 미주로, 아시아로 복음이 온 세계에 널리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여러분과 제가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신앙과 인생을 요약해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죠. 22절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여기 바울의 인생을 요약하는 장면에서 바울은 ‘성령에 매여’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의 생애는 성령에 매여 있는 삶이었다는 겁니다. 영어번역으론 ‘compelled’인데, 이것은 어떤 힘이나 강한 영향력으로 끌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성령에 붙들려 산 사람입니다. 성령의 지시에 따라, 성령의 영향력으로 끌려가는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워치만 니의 인간 구분을 몇 번 말씀드렸는데, 7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던 기독청년들에게 영향을 많이 준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을 세 종류로 얘기하는데, 육에 속한 사람, 혼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을 보면 이 세 종류의 사람을 잘 설명해줍니다. 아마 이런 인간 이해는 웨슬리의 이해와도 비슷하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웨슬리는 인간을 죄 아래 있는 인간, 율법 아래 있는 인간, 은혜 아래 있는 인간으로 이해했습니다. 워치만 니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비슷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적 본능에 따라 사는 사람, 육체의 욕망을 위주로 사는 인간입니다. 먹고 싶은 것 다 해보고, 보고 싶은 것 다 보고, 가고 싶은 데 다 가고, 가지고 싶은 것은 가져야 성미가 풀리고, ‘본능에 충실하게’ 후회 없이 살고 싶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막 사는 것이고, 또 어찌 보면 아주 마음껏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동물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육에 속한 사람’들만 살게 되면, ‘정글의 법칙’이 통하는 야수와 같은 세상이 되는 겁니다.
제가 원주 있을 때 지방 청장년들과 함께 교정선교를 여러 해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이라는 생각이 들어 감격적으로 선교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차차 그것도 관습이 되고 시들해지더군요. 사람이 변화되기가 어렵더라고요. 교도소에서 매주 예배드리고 선교하고 세례를 베푸는데, 출감하고 나서 다시 교도소로 들어오는 재범률이 아주 높은 거예요. 재범률이 64%라고 합니다. 청송교도소는 아주 중범죄자들만 들어가는 곳인데, 그곳 출신은 80%가 넘는대요. 아니, 얼마나 고생을 하고 나가는데 개과천선해야지, 다시 죄를 짓고 그곳으로 돌아온다는 말인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취직이 잘 안되고, 인간관계나 삶의 장의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먹고 살기 위해 재범을 하게 되고, 다른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의 진짜 본질은, 그들의 본능적인 범죄욕구, 육에 속한 자아가 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안 되니까 옛날로 돌아가는 겁니다. 인간이 변화되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건전한 생활로 교정하기 위해서 수년이나 담안에 갇혀 생활을 하는데도, 담밖에 나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타락한 본성대로, 잘못 먹은 마음대로 살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에 완전히 몸을 담근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 주머니 속에 돈이 다 보인답니다. 그래서 저절로 손이 가는 거예요. 그걸 절제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자기가 둔 돈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언젠가 서재를 정리하는데, 책꽂이에 두터운 성경교재가 있는데, 그 책갈피를 뒤적이니 돈 10만 원이 든 봉투가 나오더라고요. 내가 예전에 꽂아두고 언제 써야하겠다 했는데, 잊어버렸었어요. 그들은 그걸 그냥 냄새를 맡는답니다. 출감 후 6개월에서 1년 사이만 잘 참으면 또 담밖에서의 생활이 정착하여 재범률이 확 떨어진다는데 그 반년을 참기가 힘듭니다. 육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이렇습니다.
두 번째는 ‘혼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물론 개념을 좀 명확히 해야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한마디로 이성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본능은 철저하게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육하고 계몽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습니다. 웨슬리가 말한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믿음으로 말하면, 내 나름대로 잘 믿는 것, 이것으론 안 됩니다. 정말 사회를 어지럽히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좀도둑들이 아니고 공부 잘하고 이성이 계발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큰 사기는 똑똑한 사람이 칩니다.
작년에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준 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유명대학에 다니는 기계공학과 대학원 학생이 스승인 교수에게 꾸중을 심하게 들었다고 해서 사제 폭탄을 만들어서 그 교수를 해치려고 한 사건이었습니다. 사제폭탄을 교수 방 앞에 놓으니까 잘 포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누가 보낸 선물인가?’ 하여 교수님이 풀어보자 폭발하였습니다. 다행히 죽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 교수가 죽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학생이 공부 잘 하는 학생이고 모범적이고 성적이 우수했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때에도 물리경시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고등학교 때에도 수상경력이 있는 특출한 학생이었습니다. 대학 대학원에서 다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이고 논문지도를 받는 중이었습니다.
교육의 문제점을 가지고 TV에서 토론회도 하고 야단이었었습니다. 패널로 나온 교수들이 평생 칭찬만 듣고 자란 청년이 교수한테 들은 꾸중을 소화하지 못해 결국 그런 사고를 내고 말았다고, 그걸 통제할 인격적인 바탕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성의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 이성은 보기보다 무기력한 부분이 많습니다. 결국 혼에 속한 사람도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이성을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하며 문제를 삼고 섣불리 고치려고 할 때 공동체는 깨지고 인생이 불행해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세 번째의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그 육체와 이성이 성령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예수 믿는다고 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를 수십 년 다녔어도 성령이 그 안에 없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 성령에 매여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냥 겉모습만 그리스도인, 기독교 문화를 가지기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닙니다.
제가 36년 목회해보니, 정말 교회에 다니는 ‘육의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한 ‘이성의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육의 본성에 어긋나면 참지 못합니다. 탐욕스럽고, 화 잘 내고, 잘 삐치고, 쉽게 계명을 어깁니다. 그들은 이성을 가지고 남을 잘 비판하고 평가하며, 옳고 그름을 날마다 따지기 좋아합니다. 바울은 그들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폭탄 같은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내 노력, 내 기준을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게 정말 중요합니다.
서울 신촌의 대학가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얘기하는데, 박사만 수십 명이 나오는 교회입니다. 그렇게 이성적이고, 엘리트이고, 일류대학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인데, 부부 상담을 해보면 부인에게 폭력을 쓰는 남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대학가 교수세계가 얼마나 타락되어있고 시샘하고 경쟁하며 작은 이권 가지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지 창피해서 말을 할 수가 없답니다. 사람은 이성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의 챔피언이었습니다. 이성의 사람이었던 겁니다. 이성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박살내려고 작정을 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메섹 가는 길에서 바울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박살내셨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깨졌습니다. 그의 교만이 깨지고, 그의 이성적 판단의 오류가 깨지고, 그의 육체적 욕심이 깨어졌습니다. 그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령에 매여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통치를 받고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이끄는 대로 이끌리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바울은 율법적인 인간, 이성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교만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이성의 판단으로 쓸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그의 옛사람의 눈을 멀게 했고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와 새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는 머물러 있지 않고 복음 안에서 전진했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에 매인 복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행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또 7절에는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바울은 아시아 터키 다소 사람인데, 자꾸 성령께서 마게도냐지방, 유럽으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유럽선교를 시작합니다.
그가 마게도냐의 첫 성에 들어갔을 때, 그곳이 바로 빌립보였는데, 점치는 귀신을 쫓아주어 예수의 능력을 드러내었었지요. 그러자 귀신 들린 여자가 귀신의 힘으로 점을 못 치게 되니까 바울을 고발하여 감옥에 가둡니다. 관원들은 바울과 실라를 때리고 감방에 가두어둡니다. 그때 그들은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성령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죠. 그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진이 나고 옥터가 흔들리며 감옥문이 열립니다. 그러면 죄도 없이 갇힌 이 두 사람은 감옥을 탈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때에도 성령에 매여 행동합니다. 그 자리에 있어 자결하려는 간수 가족을 구원해내지 않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3 –24절)
예루살렘에 가면 환란을 당하고 결박됩니다. 그러니 모두가 말립니다. 그러나 성령이 바울에게 가도록 강권하십니다. 박해의 고통이 있지만 성령께서 원하시면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밀레도에서 배 타고 예루살렘으로 바울이 가려할 때 에베소교회 원로교인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엉엉 울면서 성령에 매여 움직이는 바울과 이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자기는 생명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주 비장한 결단을 하는데,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합니다. 가면 안 되요, 큰일 납니다. 그러나 가야해요! 성령이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도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세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실수록 결국 ‘나의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결단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순종하여 따를 뿐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재판받으러 갈 때도 정말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을 하고 간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그곳에서 순교합니다. 그런데 이런 순교가 있었기에 세계 역사가 복음으로 뒤집어질 수 있었습니다.
창41:38,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애굽의 흉년을 다 해결해 준 사람, 그 요셉은 하늘이 보낸 사람인데, 바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었던 겁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사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그러자 바로가 “우리가 이런 사람을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면서 감탄합니다. 단순히 해몽이나 해서 대박을 터뜨린 꿈쟁이가 아니라, 개인적인 배신과 소외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경험하고 바닥에까지 떨어졌다가 하나님에게 감동되어 일어선 진짜 위인을 바로는 만난 것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형제들을 용서하고 자기를 모함한 보디발의 아내와 감옥에서 자기를 배신한 술 맡은 관원장을 다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용서만큼 힘든 것도 없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자서전에서 “내 생애 가운데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것이 ‘용서’라는 단어였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 감정은 ‘복수해라, 원수를 갚아라’고 합니다. 이성의 힘으로도 용서하기는 어려워요. 거듭 마음을 먹어도 용서가 안 되죠. 그러기에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어디 두고 보자’는 게 무섭다는군요. 감신에서 교회사를 가르친 예일대 출신 선교사 박대인 교수의 말입니다. 용서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죽으면서 유언으로 원수 갚을 것을 남겨주는 나라입니다. ‘너 알지, 마장리 김서방 내 대신 꼭 원수를 갚아다오!’ 그러나 여러분, 성령에 매인 사람은 배신과 소외의 고통을 싸매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학생 때 고전공부를 좋아했는데, 배웠던 문구 가운데 ‘學問 如逆水行舟 不進卽退.’가 있습니다. ‘학문은 거꾸로 흐르는 물로 달리는 배와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물러서게 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믿음에도 이 고전의 문구와 똑같이 적용된다고 봅니다. ‘믿음은 거꾸로 흐르는 물로 달리는 배와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물러서게 됩니다.’
우리가 육에 속한 사람, 육체의 본성 아래 살고 있을 때가 있었지만,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하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성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율법적인 신앙에 머무를 때가 많습니다. 혼에 속한 사람으로 가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보다 나의 종교적인 노력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잘못 판단하는 것이지요. 남을 정죄하고 교회를 비판하며 스스로 악습을 버리지 못한 채 있습니다. 여기에 머무르면 우리는 결국 불신자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성령에 매여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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