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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시51:1-7) [2025년 3월 23일, 사순절 셋째주일]
2025-03-22 15:29:28
박신진 목사
조회수   40
설교일 2025-03-23
설교말씀 시51:1-7
설교제목 회개

회개

51:1-7

2025323[사순절 셋째주일]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면 자신이 회개하였는지를 돌아보면 된다.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고, 아무리 교회에 등록되고 착실하게 예배를 드리며 기도생활을 해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회개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 교회는 위로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걱정 마, 괜찮아, 뭐 어때?’를 반복해주는 무한긍정의 모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면이 있다 해도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은 회개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구원받았는가 아닌가를 알려면 회개했는지를 점검해보면 된다. 구원과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큰 문제와 관련하여 분명하게 거쳐야 할 단계와 과정이 있다. 교리와 교파에 따라 주장하고 강조하는 바가 있고, 거기에 구원파나 신천지 같은 이단도 있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지만, 꼭 있어야 하는 게 회개를 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우리 삶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는데,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 모두가 죽음 앞에서는 겁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생명의 주관자시오, 시간의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가까이 모시기 위해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편 51편은 참회시다. 이 시편은 신구약을 통틀어 죄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이다. 이스라엘 왕이었던 다윗이 밧세바와 범죄한 이후에 충직한 군인이었던 그의 남편 우리아를 격전지에 보내 죽게 하는 죄를 지은 것이 드러난 후 그의 영혼이 깊이 고뇌하는 모습을 이 시는 보여준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고 본시에 관한 표제가 적혀 있다. 시편 51편의 배경 이야기는 존경받는 왕의 이야기로는 입에 담기조차 역겨운 범죄의 사연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이야기로부터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얘기하려는 것은 우리 인생도 예외없이 그런 역겨운 죄악의 일면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는 다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그런 마음 속의 욕망을 감추고 있다.

다윗이 왕이었을 때였다. 군사들은 전쟁 중이었지만, 후방의 정세는 비교적 평화로왔다. 그러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된 왕은 시험에 빠져 밧세바를 범하였고, 그 죄를 감추려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게 했다. 결국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엄청난 죄를 범하였지만, 그 결과로 오히려 다윗은 꿈같은 나날을 보내는 것 같았다. 자신의 부끄러운 행위가 벌을 받기는커녕 행복을 가져다주는 듯했다. 그러나 거짓과 범죄 위에 쌓아올려진 일시적인 평안과 쾌락은 오래 갈 수 없었다. 삼하 1127절은 그 상황을 요약해서 말한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어느 날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이 다윗을 찾아와 말한다. “왕이시여! 성읍에 두 사람이 살았는데, 한 사람은 부유했고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암양을 딸처럼 사랑하며 돌보았죠. 어느 날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방문했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양떼나 소떼 가운데 한 마리도 잡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이웃집 사람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다가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대접했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다윗은 화를 참지 못해 이렇게 소리쳤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한, 그 놈을 절대 살려둘 수 없다!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그러자 나단은 다윗을 진정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맡겼다. 그런데 네가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으니, 칼이 네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다윗 왕이 충직한 장군 우리아에게 한 짓이 바로 그 부자의 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음을 선지자는 일깨워주었다. 정신이 든 다윗이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회개하며 쓴 시편이 바로 이 시이다. 이 시편은 다윗 왕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중차대한 문제를 아주 생생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시편이다. 우리는 어떻게 죄에서 구원받는가?

 

성경에 의하면, 죄는 매우 보편적이고 깊이 있게 우리 삶에 뿌리내려 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죄를 자꾸 문제 삼고 죄와 투쟁하는 것을 오히려 비판한다. 지금 인간을 격려하고 힘을 넣어주며 꿈과 희망을 줘도 살까 말까 하는 판에 왜 그렇게 인생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자꾸 퍼뜨리느냐고 노골적으로 불평하기도 한다. 교회에서 죄의 고백이나 죄의 문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안 하면 안 되겠느냐, 분위기가 너무 나빠진다고 한다. 여기서 다윗은 간음과 살인과 기만과 그 밖의 여러 죄를 범했지만, 꿈같은 나날을 보내며 행복과 평안을 누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죽었고 밧세바라는 아름다운 부인은 후궁이 되었으니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하겠다. 죄를 마치 없는 듯이 평안하게 보내려는 생각, 이것이야말로 위험한 생각이다!

저는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예배에도 참석했으며, 착한 일을 하기도 했고, 불쌍한 사람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옳고 그른 문제가 나오면 의분을 가지고 의로운 편에 서는 것도 피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내가 굳이 죄의 문제로 그렇게 고심할 필요가 있을까요? 도대체 내게 무슨 회개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저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짜증이 나고 교회를 떠나고 싶습니다. 나를 좀 편하게 해주세요!’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다. 실제로 죄를 많이 설교하는 교회보다, 행복과 평안을 주로 설교하는 교회가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인다는 말도 있다.

죄는 뿌리깊게 우리 삶에 들어와 있다. 근원적인 문제를 잘못되게 하는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죄의 각성, 죄에 대하여 직시하고 죄의 진실에 대해 눈을 뜨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온 인류에게 보편적이며, 또한 심각한 이 죄의 문제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다면 우리는 결단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무엇보다 앞서 자신을 살펴야 한다. 다윗은 목욕하는 여인에게 음욕을 품고 그 남편을 전장에 보내 죽게 하고 그 여인을 후처로 삼아 자식을 낳고... 하는 동안 자신을 살피지 못했다. 자기가 얼마나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잘못된 길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다. 세상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신을 살피지 못하게 방해한다. 바쁘게 만들고, 세상 즐거움에 취하게 하고, 자기들끼리 어울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함부로 말하면서 죄책감을 모면한다. 그래서 자신의 죄과, 죄악을 외면하게 만들고 있다. 심리학을 가지고 죄를 좋게 설명하거나, 법을 가지고 죄를 피하게 만들기도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며 능력을 선포하고 은혜를 전해준다. 그런데 성경의 능력과 은혜, 구원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왜 그럴까? 성경에서 선포된 구원의 복음을 현실로 누리기 위해서는 선행 조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회개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다,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복음이 내게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오늘 시편 51편을 우리가 함께 읽은 것은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위대한 인물들의 모습을 보면 회개가 빠지지 않고 나타난다. 성인들의 전기나 역사 속에 나타난 영적 거인들의 모습에는 한결같이 진정한 회심을 체험하고 나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맛본 사람들이다. 오늘 설교에서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죄에 대한 회개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죄를 회개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절한 죄악의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구원은 그만 두고라도 인간이 최소한의 존엄성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죄의 문제로 인간이 비참과 불행을 벗어날 수 없다면 죄를 해결하는 길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다윗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길은 바로 회개다!

사람들은 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끈질기게 죄의 문제를 씨름하는데, 우리는 죄와는 상관없는 사람처럼 그 문제를 건너뛰려고 한다. 우리는 지금 혼란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 보수이든 진보이든 입장을 달리하면서도 공통된 생각들이 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한다. 자기네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정치가, 경제인, 이 시대의 언론이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지 않다.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이 세상이 온전해질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입장이 분명하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하나다! 그건 죄의 문제다! 개인이든, 사회이든, 온갖 문제의 원인은 죄다. 여기서 출발해라!’ 이것이 성경의 관점이다!

 

먼저 죄를 깨닫는 것, 자각이 필요하다.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성서는 사람에 대해 매우 정직하다. 왕이나 선지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죄와 허물을 가려주지 않는다. 어느 정도 편집과 교정은 하나 근본적 팩트 자체를 바꾸지는 않는다. 모세, 아론, 다윗, 제자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들의 실수와 허물, 결정적인 약점을 성서에서는 다 까발려놓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완전하시고, 인간은 약하고 불완전하다는 이 진리를 성서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로역정><넘치는 은혜>라는 책을 쓴 존 번연은 회개의 문제를 놓고 장장 18개월이나 고민했는데, 그 기간 동안 앉으나 서나 고민만하며 지냈다고 한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하다고 느꼈는지, 한번은 들판의 기러기를 보면서 차라리 기러기가 되어 회개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기도 했었다. 어떤 날은 지옥의 열린 문턱까지 끌려가 지독한 유황냄새를 맡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웨슬리 목사님의 동생 찰스 웨슬리는 간음이나 도둑질 같은 죄는 말할 것도 없고 거짓말이나 다른 죄를 범한 적도 없는 모범생 그리스도인이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었고, 옥스퍼드 대학시절부터 거룩한 생활에 매진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매주 교도소를 방문해 복음을 전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찰스도 찬송시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고백하기를 계속하고 있다. 다윗 같은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이 경건하고 총명한 젊은이가 참회의 길을 철저히 걸어가고 있다!

 

다윗은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도 하던 짓을 계속했다. 그때 선지자 나단이 비유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객관적인 하나의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그러자 그 이야기에 대해서 다윗은 잘못되었다고 흥분하여 정죄한다. 그런데 그것을 바로 당신의 일이라!’고 나단이 일깨워준다. 우리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말하고 방송에서 드러나는 엄청난 죄악에 대하여 흥분한다. 그러나 그 미움, 그 거짓말, 그 폭력은 우리 안에도 있지 않나? 양심을 가지고 있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이 시대의 무서운 폭력과 음란과 거짓이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우리는 죄를 깨닫고 자각함으로 회개해야 구원받는다!

죄를 깨닫는 것, 그 죄를 인정하는 것은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부끄러운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어 자신을 부끄럽고 초라하게 만드는 복음을 싫어한다. 하지만 구원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회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회개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의 첫 번째 단계는 죄를 자각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던 일을 멈추어, 내려놓고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는 것이다. 자기성찰! 다윗같이 사려 깊고 똑똑한 왕이 왜 자기 죄를 몰랐을까? 나단이 와서 비유의 말씀으로 다윗을 쳐서 다윗으로 하여금 자기를 돌아보게 하기까지 다윗은 몰랐다! 놀랍지 않은가?

나는 43년째 목회를 하고 있다. 어떨 것 같은가? 다윗의 이 경우는 우리 현실에서도 사실이다! 다윗은 온갖 죄를 저질렀지만 그의 추태 시리즈는 끝날 것 같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자기를 돌아보지 않은 채 하던 일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일컬어 쾌락 열광주의’(pleasure mania)라고 부른다. 3‘S’라고 한다. Sex, Screen, Sports! 요즘은 거기에 중요한 한가지가 추가된다. AI(인공지능!) 그것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줄거운 인생의 도구다.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런 현대문화에 몰두해 있는 동안 죄와의 대면을 회피한다.

 

죄책이라고도 하고 죄의식이라고도 하는 이 무겁고 아프기까지 한 감정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어설픈 몸짓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도 여전하다! 사실은 깊은 죄의식과 죄책을 안고, 안 그런 척 하면서 살고 있다. 나단이 죽을 각오하고 다윗을 멈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도 다윗을 닮았을까? 자기 죄를 변명하고 지나쳐버리며 망각하기를 그렇게 매일 식은 죽 먹듯이 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근원적인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잘못하거나 죄를 짓다 발각되면, 우리는 맹비난을 퍼붓는다. 무슨 투사라도 된 듯이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본래 그런 존재이다. 그러면서 자기 죄에 대해 간과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부패한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갖가지 묘안을 짜낸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정말 자신을 직시해보라. 여러분은 신앙양심에 비춰볼 때 자신을 인정할 수 있나? 자신의 모습과 태도, 지난 시절들의 행동에 대해서 돌아보라!

자기 잘못은 간과하고 다른 사람 잘못을 열심히 찾고 있지 않나? 성령께서 섭섭해 하신다.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드리셨건만, 왜 그리 잘했다고만 하느냐, 주님이 묻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라고, 그만 따지라고, 자신을 직시하라고 촉구하신다. 무엇보다 믿음의 공동체의 모든 성도는 자신을 살펴야 한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죄에 대한 이 깊은 깨달음,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회개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2) 현대인들은 삶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영화를 즐겨 보거나 게임이나 스포츠에 몰두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일은 죽기보다 싫어한다. 아예 자신을 돌아볼 줄을 모른다.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에 이르라! 생명을 위해 영혼을 위해 투쟁하라! 자신을 살피라! 죄와 싸우라! 죄를 내어놓고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라!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회개에 이르러 영광스러운 구원을  이룰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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