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5-0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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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눅4:1-13 |
설교제목 | 시험 당할 때 |
시험 당할 때
눅4:1-13
2025년 3월 9일 [사순절 첫째주일]
지난 주간 목요일, 3월 6일은 유명한 화가 미켈란젤로의 생일이다. 1475년 3월 6일, 성베드로 성당의 돔을 만든 미켈란젤로가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의 대리석 채석장에서 자랐다. 13살 때 메디치가 세운 미술학교에 선발되었다. 어릴 적에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젊은 시절 그는 피에타상, 십자가에 달려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으로 유명해졌다. 이때 18피트짜리 대리석 다윗 상도 만들었다. 교회 율리우스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때 이미 그는 천재의 칭호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작품을 만들기까지 그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낡은 옷을 입고 지내면서 거의 갈아입지 않았고, 종종 목욕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돈을 자라 쓰지 않았고, 아무 것이나 먹고, 옷을 입고 장화를 신은 채 잠을 잤다. 그는 잡담을 싫어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여자들을 싫어했다. 그는 어떤 것에도 애정이나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고 미술에만 정력을 쏟았다. 25년간 침식을 같이하며 돌보아준 하인 외에는 친구들도 없었다.
그는 종종 그림으로 그린 그리스도만 집중해서 생각했고, 순교자 사보나롤라에게서 들은 설교를 생각하고 했다. 미켈란젤로는 말년에 ‘그림이나 조각은 나를 쉬게 하지 못한다. 내 영혼아,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의지하라.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두 팔을 펴시고 우리를 안아주신다’라고 기록해 두었다. 그는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도는 공생애 전에 40일을 시험받으셨다. 이탈리아 말로 격리를 뜻하는 단어가 ‘콰란티나’인데, 40일 이란 말에서 왔다. 예수님의 40일 시험기간을 표현한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따로 구별되어 이 기간을 시험을 이기는 기간으로 지켜왔다. 미켈란젤로가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그림에만 집중했듯이, 그렇게 말씀과 기도에만 집중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과만 깊이 사귀는 절기로 지키려는 것이다.
40일의 의미
시험받으시기 전에 예수님은 광야로 갔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살아가시기 전에 먼저 통과한 땅이 광야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기 위해 광야를 통과해야 했을 때 겪었던 유혹들을 예수 역시 모두 겪었음을 보여준다. 광야는 외롭다, 거친 음식을 먹어야 한다, 편히 쉬지 못하며,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춥다. 이런 광야를 지나야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코로나 전염병 시기를 지내고 우리는 사회적 거리 두기와 격리란 말에 아주 익숙해졌다. 격리하여 안전을 도모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광야시험과 연관 있는 것을 아는가? 영어 단어로 ‘격리’는 ‘quarantine’이다. 중세 유럽인들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조롱과 회유를 이겨낸 이 40일을 악마가 인간을 유혹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간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에 유행하던 흑사병 같은 감염병의 증상도 악마가 인간을 조종하기 위해 유혹해서 그 부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배가 항구에 정박하기 전에 해상 격리 기간을 40일로 정했다.
그래서 이탈리아어로 40일을 뜻하는 단어 “quarantena”에서 유래하여 격리라는 단어 ‘quarantine’이 만들어졌다. 공교롭게도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명하고 폭우를 내린 기간도 40일로서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요나서에서도 선지자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라고 예언했는데, 그 심판 앞에 다가올 기간도 40일로 정해졌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동하는데 걸린 40년을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가 부활절 전에 사순절을 지내는 것도 예수가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하며 고통과 유혹을 이겨낸 것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사순절이 악과 죄에서 40일 격리의 의미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자. 올해의 사순절, 영적으로 구별되는 기간, 거룩한 ‘콰란티나’를 지나면서 유혹을 이기기 바란다.
시험을 잘 통과하시라. 올해 사순절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올 한해의 삶이 결정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봄은 농부가 씨뿌리는 계절, 계획과 시작의 계절이다. 이때부터 불신앙과 세속주의, 게으름과 영적인 더러움을 이겨내야지, 그렇지 못하고 죄에 빠져 허덕이면서 생활하다보면 어떻게 올해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겠는가! 우리는 이 사순절에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우리는 재의 수요일에서 사순절을 시작했다. ‘당신은 재임을 기억하십시오. 결국 재로 돌아갈 것입니다.’라는 재의 선고를 받고 손등에 재를 바름으로 사순절을 시작하였으니, 광야 기간처럼 구별되어 유혹을 이기고 시험을 통과하는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바란다! 어떻게든 사순절, 거룩한 콰란티나를 구별된 자로서 살아가기를 힘쓰자!
세 가지 시험: 물질, 명예, 기적
예수님은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물질 문제에 대한 시험, 권력과 명예에 대한 시험, 종교를 기적과 술수로 만들려는 시험- 이 세 가지 시험을 다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이런 시험은 우리에게도 있다. 물질 문제 때문에 속이고 사람을 미워하고,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고, 불의하게 살도록 타협할 때가 있다. 돈 문제이다. 또, 권력과 명예는 나이가 들수록 더 벗어나기 힘들다고 한다. 작은 모임에서조차 누가 인정받나 따지다가, 소외감을 느끼고 갈등을 일으켜 모임이 깨지는 경우도 있다. 또한가지는, 하나님대신 어떤 기적이나 술수를 쓰려는 종교적인 유혹이 얼마나 많은가! 불건전한 신앙생활의 유혹이다. 이런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첫 번째 유혹은 돈의 유혹이다,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된 유혹이다.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처럼 귀를 솔깃하게 하는 유혹은 없다. 누구에게나 떡은 필요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시고 굶주림을 해결하셨다. 예수님도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배고픈 오천 명을 먹이셨다. 육신의 떡을 먹이는 문제, 경제 문제는 중요하다! 넉넉한 떡은 삶의 안정과 풍요를 위한 기본 조건이다. 물질적 욕구의 충족은 우리 모두의 간절한 욕망이다. 그러나 우리 영혼이 배고프고 힘든 이유는 떡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이 없어서이다. 예수님은 신명기 8:3 말씀을 가지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심으로 마귀의 유혹을 이기셨다.
아시시의 성자 성 프란체스코는 부유한 비단장수 아들로 태어나 자랐다. 부족함이 없이 부잣집 아들로 생활했다. 그러나 그가 신앙의 길로 들어선 후 자신의 화려한 옷을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평생 낡은 누더기를 걸치고 살았는데, 그 누더기가 거룩한 옷이었다. 거룩한 옷은 깨끗한 예복이나, 높은 사람이 입는 신분을 나타내는 옷이 아니다. 값비싼 옷도 아니고 화려한 옷도 아니다. 그는 모든 값비싼 것을 포기하고 자기 영혼의 보물을 선택하였다. 우리 모두가 다 성자같은 가난함을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물질의 유혹을 이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그럴 때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 예수님은 그 유혹이 왔을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돈은 필요하다! 돈은 벌어야 한다! 그러나 돈만 벌어서는 안 된다. 건강도 챙기고 바르게 살아야지~!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
두 번째 유혹은 천하만국을 보이며 자기에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것은 세상 권세와 영광이라는 것이다. 마귀를 경배해서라도 세상 권세와 영광을 얻으면 되지 않느냐는 유혹이다. 권력의 유혹, 명예의 유혹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신명기 6:13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셨다. 경배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선언은 온 우주의 유일한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믿음을 고백한 것이다. 참 인간은 사람의 권력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시험을 받았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잡아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시험이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마음과 생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오고 그냥 아브라함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얼마나 생각이 많고 어려웠을까! 예를 들어, 여러분은 하나님이 목사님을 통해 그런 명령을 내리시면 “아멘!”하고 순종할 수 있는가? 아마 하나님께 불순종할 이유가 수없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만 섬겼다. 그분께만 경배하고 순종했다. 예수님도 세상 권세와 영광을 앞에 갖다놓아도 마귀에게 절할 수는 없어! 하며 대적하였다.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세 번째 유혹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뛰어내리라는 유혹이다. 하나님이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는 것이다. 마귀도 말씀을 인용하여 시험한다. 이 종교적 시험은 사람을 하나님처럼 신격화하고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유혹이다. 역사상 많은 이단 종교와 사이비 교주들이 자신을 하나님처럼 신성시하며 이용하였는가? 전도관을 세운 교주는 한때 기적을 많이 행하면서 자기가 발 씻은 물을 만병통치약으로 팔기도 하였다. 지금 신천지 교주는 교묘한 말로 자신을 보혜사 성령으로 포장하여 하나님의 신성을 참칭하고 있다. 이런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사람들은 모두 비웃으며 “저 사람이 나환자를 고쳐주고 죽은 자를 살려주더니, 다른 사람은 구원하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하였다. 그러면서 “네가 정말 메시야거든 거기서 뛰어내려라.”라고 놀려댔다. 얼마나 전도의 기회가 좋은가? 거기서 뛰어내림으로써 하나님의 위력을 드러내고 모든 사람으로 굴복하게 하면 전도가 잘 될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이와 같은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2-25) 종교는 기적이나 외적인 세력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희생을 결단하는 데에 진정한 진리가 있다.
시험을 이긴 사람들
사람은 누구나 시련을 당한다. 신자에게도 시험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장소도 무관하게, 시험의 종류는 너무 많아 다 셀 수도 없다. 언제나 시험과 시련은 무겁고 힘들고 아프고 고통을 준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죽이고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온전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고난이 없는 삶은 사실 축복이라기보다 불행이다. 인생의 참된 맛을 모르고 온전한 인격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험은 즐거운 일이 아니며 어렵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를 온전하게 세우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성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온전히 기뻐하며 끝까지 인내하라! 인내는 감정이나 태도에 머무르지 않고 행위에까지 나아간다. 고난이 왔을 때 불평하지 말고 욕하지 말고, 화를 표현하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으며 불쾌한 낯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인내는 평온한 얼굴, 따뜻한 행동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걱정과 염려에 묻혀버리지 말고, 시험을 당했을 때 인내함으로 주어질 하나님의 결말을 바라보라. 우리가 당하는 고난 뒤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라! 시험은 시험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시험을 참고 견디는 자에게 온전함을 이루도록, 성장이 완성되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시험을 통하여 더욱 온전해지고 성장하게 하옵소서! 시험이 우리를 완덕에 이르도록, 기쁨으로 시험을 이기게 하옵소서.’
요한 웨슬리는 회심한 이후에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내주 가운데 살아간 고결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성결의 영을 힘입어 평생 경건하게 살았다. 성인이 된 후부터 일평생 60년 동안 새벽기도를 했다. 경건한 웨슬리 목사님은 홀로 새벽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였다. 꼭 10시 전에 취침에 들어가서 4시 30분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나 60년간 새벽기도를 했다. “기도는 은혜의 수단이고 은혜의 통로다. 은혜받는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금식기도도 수요일과 금요일, 일주일에 두 번씩 꼭 하였다. 금식이란 육체의 욕망을 금하는 기본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누가복음 9장 23절의 주의 말씀을 실천하여, 자기도 모르게 육적으로, 세상적으로 흐르는 육체의 욕망대로 살지 않기 위해서 금식을 항상 했다. 그만큼 경건하게 살았다.
이렇게 설교하면 어떤 사람들은 생각한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경건한 생활이나 거룩한 행동의 공로 때문이 아니고, 예수님의 보혈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죄인이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앞에 죄를 내려놓았으므로, 속죄의 은총이 흘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것이 아닌가?’ 맞다! 경건의 행동이나 금욕의 실천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는 영혼과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구원받았으니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
우리는 경건한 웨슬리를 따르는 감리교도로서, 또 한해의 사순절을 맞이한다. 거룩한 ‘쿼렌틴’, 믿음의 격리기간이라 생각해보자.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주님을 위해 구별된 시간, 주님께로 불꽃같이 뜨겁게 나아가는 시간이 되어보자! 웨슬리는 작고 왜소한 사람이었으나, 경건생활을 철저히 함으로써 88세까지 건강하게 살았고, 그렇게 책을 많이 보고 저술도 많이 했는데, 돋보기 안경도 안 쓸 정도로 눈이 좋았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 앞에 놓인 시험을 이기고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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