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5-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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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눅9:28-38 |
설교제목 | 산 위 영광과 산 아래 고난 |
산 위 영광과 산 아래 고난
누가9:28-38
2025년 3월 2일 [산상변모주일]
한국교회가 큰 부흥을 일으키고 있을 때,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체험해봐야 안다. 체험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꿈꾸고 신비한 입신에 들어가는 것을 사모하였다. 방언과 신유 은사는 제대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확실한 증거로 여겨졌다. 이와같이 60년대, 70년대에 체험적인 신앙이 한국교회를 뜨겁게 달구었고 그것이 교회 부흥과 개인 신앙생활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후에 사람들은 이런 체험은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신비적이어서 이단과 사설들을 교회에 끌어들인다고 하며 정상적인 믿음을 가지는 데에는 위험하다고 보았다. 사실 교회마다 은사파, 기도원파, 용문산파가 있어서 파당을 짓고 문제를 일으키다보니, 그들은 중요한 것은 말씀이요 상식이며 실천이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체험주의 신앙파들은 자기들의 체험에만 파묻혀서 그 체험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모든 신앙을 그것으로만 판단하였다. 그러다보니 말씀 중심의 차분하고 상식적인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단적인 것으로 보였다. 70년대와 80년대 한국교회에서는 말씀이냐 체험이냐, 상식이냐 신비냐- 이 두가지가 교회 안에서 충돌하였다. 어떤 목사님들은 이런 체험들을 잘 이용하여 교회성장을 이룬 반면에, 어떤 목사님들은 방언하는 교인들을 싫어하고 체험적인 것을 위험시하여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기도 하였다. 과연 말씀과 체험, 이성과 신비, 이 두 가지 신앙의 측면은 서로 반대되는가? 성서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쳐준다.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 주간의 부흥회는 그렇게 별난 체험을 하거나 야단스런 집회는 아니었으나, 모두가 뜨겁게 기도하였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집회였다. 특히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만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않은 실질적인 불신자들이 있음을 지적하실 때는 우리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돈과 깊은 욕망에만 마음을 쓰는 세속적인 가짜신자가 교회 안에도 많이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 모두가 속이 뜨끔했다. 사실 교우 가운데는 부흥회 콤플렉스가 있는 성도가 있다. 나도 예전에 좀 그랬다. 부흥회 때의 야단스럽고 별난 찬송과 기도가 적응이 안 되고,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부흥회라면 한사코 참석하지 않는 일부 교인들을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 신앙생활에는 이런 특별한 집중과 초월의 시간이 필요하다.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여 살아서는 충성, 죽어서 영광!! 하나님과 동행하며 평안을 누리는 가운데,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참된 성도가 되시라!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거의 마무리되던 어느 날, 예수님은 가장 신임하는 제자 셋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다. 기도하실 때에 그 얼굴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29절).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얘기를 하였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떠나가실 것, 후에 우리가 알게 된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였다. 이것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제자들이 산상 부흥회를 하고 온 것이다.
제자들은 신기했다. 그들은 졸다가 깨어나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 얼굴이 영광스럽게 변하고 옷이 하얗게 빛나는 것을 보았고, 모세와 엘리야, 완전히 다른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라 바라보았다. 그 경황에도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여기서 함께 지내자는 청을 드렸다. 이 때 구름이 일어나더니 그분들은 사라지고 예수만 보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변형되셨다는 사실이다. 변형, 영어로는 transfiguration 이라 한다. 모양이 변한 것이다. 어떻게 변했느냐? 29절,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얼굴 모습이 변화되고, 옷이 하얗게 변하여 광채가 났다. 예수님의 산상변모주일인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변모하신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고, 우리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자 한다. 오늘날 기독교를 번영의 종교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우리는 변화의 종교로서의 기독교 본질을 살펴보려 한다. 번영은 꽃이 많이 피어난 것을 의미한다. 꽃이 많이 피어 환하고 화려하듯이 그렇게 수가 많고 세력이 강하며 영향력이 큰 것을 번영이라 한다. 사람들은 예수 믿고 개인적으로 번영하기를 원한다. 특히 물질적으로나 생활 면에서 번영을 기대한다! 그러나 예수는 갈릴리 사역에서 예루살렘 사역으로 나아갈 때 번영이 아닌 변형, 즉 변화를 택하셨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를 한가지 얘기해보라 한다면, 하나님 체험에 근거한 충실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지 않고 번영만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의 속사람, 우리 속에 있는 열정과 욕망, 바람이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 속사람이 새로워졌는가? 아니면 여전히 번영을 추구하고, 매일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면서 세상의 욕망만을 따라가는 사람인가? 우리는 교회 다니는 불신자가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결국은 번영도 따라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번영을 먼저 추구한다면 우리는 가짜 신자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면서 물질의 번영, 외모의 번영, 생활의 번영, 소비지출의 번영을 추구하느라, 우리 영혼은 가난하고 더러워지고 방황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교회는 세상에서 욕망을 추구하며, 외적인 화려함과 권력을 의지하는 사람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불신자들로 채워져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늘에 속한 삶이라는 정체성이 확실해야 하고, 그렇다면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삶의 목적, 사명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 말씀이 기록된 전후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의 18-20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신앙고백하는 내용이 나오고, 앞뒤로 열두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시는 구원의 역사와 예수님이 고난 예고가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이성적으로, 말로 분명하게 고백하는 말씀과 교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체험적으로 예수가 신이며 구주임을 고백하고 있다. 교리적인 신앙과 체험적인 신앙이 함께 나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리적인 신앙과 체험적인 신앙이 함께 갖춰질 때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역사가 준비된 것이다.
누가복음 가운데 앞의 9장 50절까지 아홉 장에 걸친 갈릴리 사역을 완성하여 마무리하는 것이 예수가 그리스도라 신앙고백하는 것과 변화산에서의 체험적인 신앙이고, 뒤의 예루살렘의 십자가 사역은 이런 뚜렷한 신앙고백과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후에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성적이고 교리적인 신앙과 체험적이고 은사적인 신앙이 짝을 이루어 나옴으로 진정한 변화를 이룬 뒤에, 십자가의 고난과 구원의 완성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변화가 이뤄지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가 구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신앙에는 이성과 신비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너무 이치만 따져도 안 되지만 너무 신비한 영적 현상만 추구해도 안 된다. 신령한 은사와 분별력 있는 믿음,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해야 한다. 공관복음서라 하는 마태 마가 누가에는 이 장면이 다 실려 있다. 그리고 복음서의 가장 중심 부분에, 좀 자세히 말하면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일하시던 것이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이동부분에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신성이 계시된 사건이 세 봉우리처럼 복음서에 나와 있는데, 그 첫 봉우리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시면서 소리가 들렸던 부분이고, 두 번째 예수님 신성을 계시하는 봉우리가 바로 변화산에서 신비하게 변화된 부분이며, 마지막이 바로 부활하신 사건이다.
예수님이 산 위에서 신적인 형상을 띠고 신비하게 변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을 산상변모주일, 혹은 변화주일이라고 한다. 교회는 이 주일을 지키면서 무엇을 기념하는 것인가? 우리는 주현절에서 사순절로 나아가는 이 교회의 시기에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신성이다. 예수님이 그냥 위대한 인물이나 교훈이 되는 스승이 아니라, 절대지존하신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교회는 계속 가르치고 믿어왔다.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보는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가?
한 삼십년 되었을까, 오래 전에 나는 교회에서 어떤 성서공부그룹을 지도하고 있었다. 사십여 명되는 참가자들은 두 반으로 나뉘어 정말 열심히 성서공부에 참여하고 있었다. 구약을 다 공부하고 신약으로 들어갔을 때 예수가 위대한 스승이요, 병을 고치는 자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예수님을 바로 알았다 할 수 없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야 바로 아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신의 본질을 보는 것이 바로 성경공부의 핵심이라는 설명을 두 주에 걸쳐서 하였다. 그랬을 때 몇 사람들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 특별히 자신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너무 인간적인 감동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반성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는 새로운 믿음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간증하였다.
기도원에 가서 특별기도를 하든, 부흥회에서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든, 아니면 소그룹 성경공부에서 특별한 깨달음과 감동을 얻든, 우리에게는 예수의 신적 은혜를 체험할 필요가 있다. 아마 예수님이 세 제자들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간 것은 그런 영적 체험의 필요성을 느끼셨기 때문일 것이다. 은혜받기를 사모하라! 성령 충만하기를 힘쓰라! 체험적인 신앙을 추구하라! 오래 신앙생활 하면서도 그런 뜨거운 경험이나, 깊은 깨달음이 없으면 신앙이 무기력해지고 심지가 깊지 못한 것이다. 뭔가 떨리든지, 뜨겁든지, 눈물이 쏟아지든지, 강력한 임재 앞에서 기뻐지고 새 힘을 얻든지, 이런 것에 대한 체험이 전혀 없다면 아쉽지 않은가!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고, 진리를 깨닫기를 열망하라!
목회하면서 한해에 한 차례 정도 홀로 깊은 산에 들어가 기도할 기회를 가지곤 했었다. 초여름의 산야는 온갖 곤충과 새들이 밤새 우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시간이 정지된 듯 홀로 고독한 가운데 며칠을 있으면서 성경을 읽고 신앙위인의 전기를 읽었는데, 이틀째쯤 되었을 때 성령이 감동하셨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음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나 혼자 깊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았고, 하나님이 우리 삶에 일하시는 역사를 생각하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그냥 그렇게 울며 오래 기도하였다. 산에서 내려왔을 때, 지치고 탈진했던 내가 굉장히 신선해지고 소생하였던 경험이 있다. 우리에게는 기도의 골방이 필요하고 주님과 따로 만나 그 신성을 목격하는 변화산이 필요하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얼굴이 변하시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면서 구약의 성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대면하고 대화하였듯이,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조건과 감정을 뛰어넘는 내적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은혜 받을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체험, 신비한 은사나 거룩의 체험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그냥 인간으로 바라보는 일상의 경험을 뛰어넘는 체험, 즉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보는 체험이 필요하다. 교회의 예배와 성도들과의 만남에서 그냥 인간적인 따뜻함과 사랑을 발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거룩하고 신비한 초월의 체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는 신령한 역사가 필요하다. 높은 산에서의 변화체험, 예수에게서 누리는 신비한 초월의 체험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한다.
헬무트 틸리케는 그의 설교에서 부활절 즈음에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 태양빛이 비치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신비를 느낀 감격스런 경험을 적고 있다. 어떤 이들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 삶에 걸어 들어오심을 경험하고 감격한다. 어떤 이들은 찬양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삶에 새 힘을 얻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목사의 설교를 듣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영혼이 소생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한다. 할렐루야! 여러분 속에 신비한 변화산이 있기를!! 영적 체험과 성령의 은사가 충만하기를!!
그런데 오늘 나는 여러분과 함께 36절까지의 변화산 사건 이후로 두 절을 더 읽었다. 그리고 제목도 ‘산 위 영광’에 그치지 않고 ‘산 아래 고난’을 함께 붙였다. 여기에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산 위의 영광에만 머물러 있고, 산 위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종교라면 그것은 생명력이 없다. 산 위 영광과 산 아래 고난이 함께 연결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역사하게 된다. 참된 믿음에는 영광의 빛과 고난의 깊은 골짜기가 공존한다!
이튿날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셨다. 베드로의 말대로 거기에 초막 셋을 짓고 왜 엘리야 모세와 함께 몇 주라도 머물러 계시지 않고, 하루 만에 금방 내려오셨을까? 거기에는 여전히 믿음 없고 죄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툼과 갈등, 질병과 실패가 여전히 가득한 가운데에서 예수님은 질병을 고치고 낙심 중에 희망을 선포하심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신다. 귀신이 역사하고 죄악이 주장하는 삶의 현장 한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하며 귀신을 내쫓으셨다! 여기서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귀신세력을 물리쳤다는 의미보다는 악, 고통, 모순과 실패와 같은 어두움의 부정적인 현실을 물리치신 것이다. 예수님이 죄악과 부정과 불행과 죽음을 물리치신다!!
예수님은 변화산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산 위 영광의 체험을 뒤로하고 산 아래 고난의 현장으로 내려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필요성, 신령한 은사의 필요성을 아셨지만, 동시에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셨다. 그들의 요구와 필요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신 것이다! 던져올린 공이 그냥 하늘에 머물러 있을 수 없듯이, 그렇게 산 위의 하나님 체험도 산 아래의 일상생활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와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변화산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아무리 변화산이 좋고 영광스럽더라도 산 아래의 고난으로 내려와 아픔을 치료하고 고난을 위로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요, 예수 따르는 제자들의 삶이다!
우리는 오늘 주현절과 사순절의 사이에 있다. 주현절은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축하하는 절기이다. 말하자면 은혜 받는 절기이다. 그러나 주현절은 사순절로 연결된다. 주님이 우리 위해 고난당하신 계절, 기도 가운데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는 계절이다.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높이 올라가는 데에 있지 않고, 영광을 따라 높이 올라갔다가, 인생의 고난으로 되돌아 내려오는 데에 있다. 산 위 영광과 산 아래 고난이 만나는 곳에 십자가 신비가 있고 기독교의 진정한 능력이 있다.
외국교회의 한 예화다. ‘레놀라는 자기 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청년이었다. 찬양대원, 주일학교 교사로 일하는 레놀라는 교회의 사랑받는 청년이었다. 켄은 에이즈 환자이지만, 교회에 역시 열심히 참석하였다. 보수적인 침례교회에서 자란 레놀라는 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일 년 가량 한 교회에 다녔지만 모른 척 했다. 어느 날 켄이 병이 들어 몇 주 동안 교회에 나오지 못했다. 그가 겨우 교회에 나오게 되었을 때, 찬양대에서 레놀라가 보니, 켄은 너무 아파서 찬송 부를 때 일어나지도 못했다(미국에서는 찬송을 일어나서 부름). 레놀라는 이 모습을 보다가, 찬송 부르는 동안, 찬양대석에서 내려가서 켄에게 가더니 그들 일으켜 세워 성가대에 참석시켰다.’(강단과 목회 10-1·2, p.81)
교회의 교만한 영광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삶의 고난 한 가운데로 내려와 예수의 이름으로 설 때, 예수의 능력이 나타나고 예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할렐루야! 산 위에 올라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만나고 바라보는 성도여! 하나님 체험이 매일의 삶에서 만나는 가족과 이웃을 향한 정성과 관심, 그들을 향한 희생과 사랑으로 나타나도록 힘쓰라! 변화산의 영광은 세상의 고난과 연결됨으로 비로소 참 의미를 되찾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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