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 설교일 | 2025-12-07 |
|---|---|
| 설교말씀 | 롬15:4-13 |
| 설교제목 | 소망의 하나님 |
소망의 하나님
로마15:4-13
2025년 12월 7일 [대림절 둘째주일]
나치 독일의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유대인으로서 후에 유명한 심리학자가 되었던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e)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감옥 안에 있는 동료들이 삶을 포기하고 죽어가는 광경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친구여, 저 조그마한 창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한다. “봐야 회색 담벼락밖에 없지 않소?” “아니, 그 회색 담벼락 저 건너편에 있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어두운 밤에도 빛나는 별들을 바라봅시다.”
지금은 미국과의 무역 협정이라는 어려운 파도를 넘기고, 서민들의 물가고와 경기불안으로 찬바람이 불고 있으며, 국론은 분열되고 미래는 불안하다고 어떤 이는 말한다. 우리 현실은 냉정한 국제 현실의 차가운 벽, 콘크리트 같은 장벽에 막혀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이 현실의 담벼락 너머에 있는 하나님이 열어두신 푸른 하늘을 보는 눈이 있는가? 깜깜한 현실 너머에 하나님이 띄워 놓으신 별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있는가? 국가도 사람들도 어느 때보다 잘 헤쳐나가고는 있지만, 어려운 때이다. 그러나 이때일수록 소망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전도초청주일 축제를 통하여 소망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5백명의 무리가 우리 교회 안팎을 채웠다. 코미디언이면서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성미 집사의 간증에 사람들이 얼마나 감동하고 눈물 흘리고 즐거이 웃었는지 모른다. 중3층에서 몇 사람은 소리내어 “엉, 엉!” 울었다고 한다. 어떤 성도님 남편은 교회에 처음 나와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흘러 예배 처음부터 끝까지 울었다고 한다. 너무 창피해서 눈물을 감추느라 애를 써도 안되더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시고, 오랜 상처를 싸매주시며, 외로움 속에 하나님을 찾고있던 마음을 돌아오게 하신 것이다! 소망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 교인들을 향하여 소망의 하나님을 전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절) 하나님이 소망이시다!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하나님이 새롭게 발견되어야 한다. 낙심한 영혼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유대 백성들이 소망을 찾았듯이 오늘 하나님 안에서 우리도 소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어렵고 병든 우리에게 오셔서 위로하시고 치유하신다! 교회의 현실도 어렵다. 4-5년의 코로나 팬데믹이 계속되면서 교회도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받았으며 도시교회들은 대부분 침체와 위축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아무리 현 정부가 탄핵의 강을 넘어서 새로 출발했다고는 하지만, 올해 우리나라 정치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극단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상처 입은 채 힘겹게 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위로하시고 치유하신다. 본문에서 이르시기를,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한다.’(4절)
또한 5절에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얼마 전 믿는 이들의 자리에서 강의를 하면서 예언서를 인용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싸매시고 치유하신다는 것을 전했을 때, 듣는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았다. 상처입고 외로운 우리는 위로하시고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지금 만나야 한다!
상처를 쉽게 입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욕하고 때려도 상처가 되지 않는 무덤덤한 사람도 있는데, 현대인들은 점점 상처를 잘 입는 민감한 영혼이 되어간다. 치유를 갈망하지만 상처가 깊이 쌓여있다. 상처 입은 곳을 덧나게 하면 더 아프고 더 낫기 어렵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상처 입은 곳에 거듭 상처를 입어 견딜 수 없이 아프고 오래 가는 흔적들을 지니고 있다. 상처는 우리를 과거에 머무르게 하고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며 미래를 향하여 나갈 수 없게 가로막는다.
우리들의 상처는 원수나 적 때문에 생기는 상처가 아니다. 그런 상처는 금방 나을 수 있고 심각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 상처 중에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들, 믿음의 형제자매들 때문에 받는 상처가 너무 아프고 힘들고 오래 간다. 여러분의 남편이 상처를 입고 아파하고 있다. 여러분의 아내가 상처 입고 남몰래 아파 눈물 흘린다. 여러분의 자식들이 상처를 입고 고통에 빠져 있는 것을 왜 모르는가? 늙으신 부모님들이 상처 때문에 힘겨워한다.
말 때문에 상처를 주고, 돈 때문에 상처를 준다. 일 때문에 상처를 주고, 신뢰의 관계를 배신할 때 상처를 준다. 금방 상처를 싸매주지만 곧 다시 상처 입히는 사람들도 있고, 별 상처는 아닌데 방치해두어 좀처럼 치유되지 않고 오래 가는 상처도 있다. 사람으로서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도 있다. 마음에 상처를 주고는 물질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치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물질이나 육체로 상처를 싸매려고 할 때 그 상처가 덧나서 오래 가기도 한다. 그러니 상처를 주지 않도록 피차에 힘쓸 일이다.
하나님은 치유의 근원이 되신다. 육체의 질병도 하나님의 질서와 방법으로 돌아가면 치유된다. 그러나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깊은 마음의 상처가 큰 문제인데, 하나님은 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신다. 사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고질적인 상처도 하나님께 나오면 치유된다. 찬송 부르다 울고, 기도하다 또 눈물을 그치지 못하며,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운다! 이러는 동안 하나님은 물로 씻어 깨끗함같이 오래 묵은 고통들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이다. 성령은 위로하는 영이다. 하나님의 영, 위로의 영이 바람처럼 불어와 우리 마음을 채우면 한숨을 걷어 가시고 고통을 덜어주신다. 은혜받으면 상처가 씻은 듯이 치유된다.
2.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치유해주시는 소망의 하나님,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뜻이 같게 하시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신다.(5-6절) 망가지고 상처입고 전쟁으로 파괴된 세상 속에서,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분열을 넘어서서 하나 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깊은 마음을 만져주심을 경험하고 눈물 속에서 마음이 치유되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영적 교제를 통하여 불같은 성령이 임함으로 갈라진 우리가 하나라 되는 경험을 한다.
은혜받은 사람들은 주 안에서 서로 다른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가 된다. ‘예수 안에서 뜻이 같게 하시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신다!’ 은혜받으면 하나 된다. 구원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영광돌리게 된다! 성령의 위로를 놀랍게 체험하면 하나 되는 역사가 나타난다. 주님 안에서 ‘자신의 삶과 상처들이 치유된’ 사람들이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 될 수 있다.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8-9절)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을 인하여 하나가 되어,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원래 문화과 습관이 너무 달라 하나 되기가 어려웠다. 특히 할례라는 제도는 언약의 표로 사람들이 생식기에 행하는 표적인데, 이런 민감한 절차에 대해 생각이 완전히 다른 유대인과 헬라인은 교회에서 완전히 갈라졌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두 혈통의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시고, 먼저 믿는 자와 나중 믿는 자가 하나 되게 하시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하나 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 모두가 하나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소망을 주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유대 사람들, 엄청나게 배타적이다! 자기들만 옳다 한다, 자기들만 잘 났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도 치유와 구원이 있다고 강력하게 증거한다.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그것을 확증하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희망일 뿐만 아니라 계약 바깥에 있는 이방인들의 희망도 되심을 바울은 강조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몰라서 그렇지, 우리 기독교인들도 굉장히 배타적이다. 요즘 많이 쓰는 말로 ‘메타인지’라는 말이 있다. 나를 나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메타인지가 잘 발달하지 않았다. 그냥 고집만 부리는 게 능사가 아니다! 하나 되려면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의 말, 타종교의 말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다르고 감정이 다르고 입장이 달라도 하나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믿음이란 이름으로 외고집을 부리고 타협할 줄 모르는 우리를 꾸짖으신다! 상당히 입장이 다르고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견해들이 교회 안팎에 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을까, 왜 이렇게 생각이 다를까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깊은 위로와 은혜를 체험하면 그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정으로 뜨겁게 하나 될 것이다.
부부를 하나 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라! 지난 주간에 심방한 어떤 권사님 가정은 자기들이 살아가고 있는 동네가 정말 공기가 좋고 살기 좋은 곳이어서 오래된 작은 지병이 나은 줄도 모르게 나았고, 생각해보니 자연의 은혜가 너무 크다고 간증하였다. 별 얘기가 아닌데, 나도 자연의 은혜가 큰 것을 생각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 생각해보라! 은혜 가운데 가족이 하나가 된다! 교회에 은혜가 없으면 자꾸 의견이 달라지고 싸울 일들이 생겨나나, 기도하고 성령 받아 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치유를 경험하게 되면 서로 용납하고 인정하고 이해하게 된다. 따라하자,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절)
3.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거룩한 주의 백성들을 만드는 데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이 있다. 소망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신다. 착하게 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평화를 이루는 종이 되게 하신다.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의 전체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보여줄 수 있는 한 백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서로 조화롭게 살고 모두를 찬양의 삶 속에 맞아들이면서, 그들은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과 감사를 드린다.’(설교자노트 04-11,12월호, p.90) 아무리 세상이 지저분하고 사람들이 타락하여도 우리가 실망하지 않고 소망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 교회와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형편없는 망나니가 복음 앞에 거꾸러지면 거룩한 사람으로 변한다.
제천에 조폭 두목이 있었다. 유명한 깡패였다. 그의 타락된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법으로도 안 되고 주먹으로도 안 되고 돈으로 안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복음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 완악한 심령, 도저히 변할 수 없던 인격이 변화되어 거룩해졌다. 후에 그는 예수 때문에 삶이 완전히 바뀌어 은혜 받아 예수를 간증하며 다니다가 기도원을 운영하게 되었고 곧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 원주 있을 때 그분을 강사로 모셔서 부흥회를 했는데, 조폭식으로 설교하시더라! 거칠기는 해도 거룩해진 것은 틀림없었다!
아무 것으로도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을 지으신 분만이 사람을 본래대로 돌릴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케 하시는 능력이다. 고장 난 인격, 무너진 심령에 예수의 복음을 주라.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신 예수님이 그 사람 속에서 사람을 거룩하게 바꾸어 가실 것이다. 이미 믿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을 날마다 의지해야 진정으로 거룩한 백성이 된다. 세상을 바꾸어 갈 수 있는 위대한 힘은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캐나다의 유명한 영성 신학자 헨리 나우엔의 ‘영혼의 양식’ 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낙관과 희망은 근본적으로 다른 마음가짐입니다. 낙관은 날씨, 인간관계, 경제, 정치 상황과 같은 일들이 나아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희망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 역사 속에서 위대한 영적 지도자는 모두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룻, 마리아, 예수, 루미, 간디, 도로시 데이는 모두 마음속에 기대를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이 기대가 그들의 장래를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장래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오.’(설교자노트 위 책, p.93)
서울 봉천동의 어떤 교회에 과부 권사님이 한분 계셨다. 노점상을 하는데, 부흥회 때 은혜를 받았다. 그래서 똑똑한 아들인 장자를 주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을 했다. 정작 당사자하고는 의논 한마디 없이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버린 것이다. 판사가 될 수도 있었고 사업가로 큰 부자가 될 수도 있는 똑똑한 아들을 주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을 한 것이다. 아들 덕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을 감리교신학대학에 보냈다. 우리 선배다.
이 신학생은 신학교에 다닐 때 항상 검정 고무신만 신고 다녔다. 친구들은 참 스타일이 독특하고 나름대로 멋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실은 가난해서 그랬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군목으로 군인목회를 마친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렇게 실력있는 목사가 목회를 하는데도 개척목회에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이왕 목회할 바에는 선교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선교를 하는데, 목사와 의사를 같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35세에 공부하여 45세에 의사가 되었다. 정말 쉽지 않은 길을 가서 선교의 일을 잘 감당하였다. 소망의 하나님이 가난한 과부의 아들을 의료와 선교릃 함께 하는 유능한 일꾼으로 세워서 선교도 하고 목회도 하게 하셨다. 그의 딸도 의사가 되어 미국 사회에서 큰 인물이 되었다 한다.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을 불들어라! 주님과 동행하라!! 몸과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소망의 하나님이 나와 여러분을 치유하신다! 지금 여호와 라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라! 또 유대인과 헬라인 같은 고집불통들을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과 친구관계를 하나 되게 하신다! 또 속되고 부정한 삶을 사는 우리를 소망의 하나님께서 오셔서 거룩하게 하신다! 주님만 의지하고 따라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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