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 설교일 | 2025-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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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말씀 | 요1:9-14 |
| 설교제목 | 몸을 입으시다! |
몸을 입으시다!
요한1:9-14
2025년 12월 14일 [대림절 셋째주일]
미국 서부에 로키산맥이 있다. 캐나다에서 미국 남부까지 험준하고 높은 산맥 4800km가 길게 이어져있다. 로키산맥 해발 3천m 지대는 수목한계선으로 그보다 높은 곳에서는 식물이 자랄 수 없다. 폭풍 같은 매서운 바람이 불어 웬만한 나무들은 살아내지 못한다. 그런데 거기서도 생명을 유지하며 사는 유명한 나무가 있다. 일명 ‘무릎꿇은 나무’(Kneeled Tree)라고 하는데, 이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지 않고 옆으로 자라기 때문에 그 모습이 마치 무릎을 꿇고 있는 것 같아서 ‘무릎꿇은 나무가 된 것이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나무인 것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꿇은 나무‘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오늘은 대림절 셋째주일이다. 대림절 세 번째 초에 점화하였다! 우리는 2천 년 전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성경에서 읽고 안다. 처음 오셨다 하여 초림 예수라 부른다. 초림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아기로 말구유에 탄생하셨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를 또한 기다린다. 다시 오신다 하여 재림 예수라 부른다. 재림 예수는 올라가신 그대로 공중에서 내려오심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 인생과 역사를 완성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신앙적으로 보면 우리는 초림 예수와 재림 예수 사이에서 시간의 중간을 살고 있다. 그래서 처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잘 모시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며 기다린다.
이런 ‘영적 중간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기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과 믿음의 대화를 시작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성탄 캐롤이나 칸타타 찬양, 혹은 성탄 장식과 등불, 성탄의 선물들과 여러 가지 모임에 마음을 빼앗겨, 성탄의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님을 내 마음과 내 생활에 모시기를 소홀히 한다면, 이것은 진정한 성탄절이 될 수 없다.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을 신뢰하라! 주님과 동행하라!!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다스리시면,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진다. 주님이 내 마음을 다스리시면 심령천국 이룰 것이다. 주님이 내 생활을 다스리시면 생활천국이 되겠지? 주님이 주인 되시는 가정, 주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 되면 가정천국, 지상천국이 될 것이다.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심
주님은 자기를 비우시고 낮아지셔서 몸을 입어 세상에 오셨다. 원래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영원초월하시고, 전능하시다. 우리 인간은 일시적이고, 상대적이며, 스스로 설 수 없는 무력하고 허무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하실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냥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감당할 수 없어 미치거나 죽을 것이다. 하나님이 워낙 위대하시고 초월하시기 때문이다. 아파트 목사관이 고층인데도 단 음식에 날파리 같은 게 날아온다. 참 신기하다. 그런데 날파리가 아무리 멋지게 날아도 인간과 대화를 나누거나 음악감상을 같이 할 수 있는 날파리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위대하고 초월하신 하나님이 제약이 많고 무력한 육신이 되셨다! 하나님이 인간과 대화하고 동행하고 같이 살기 위해 몸을 입으신 것이다. 요한복음 1장은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 존귀하고 영원하신 로고스가 비천하고 허술한 육체가 된 것을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이 몸을 입으셨다!!! 몸을 입고 사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육체가 되셨다! 인간과 대화하고 함께 일하고 같이 살기 위해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다!!
바울은 빌립보에 보낸 편지에서 이 화육의 의미를 아주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빌 2장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전반부는 몸을 입으신 것이다. 자기를 낮추시고 비우셔서 몸을 입으셨다. 우리와 대화하시고 동행하시며 동역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혼자라도 외롭지 않고 아무리 가진 것이 없고 적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두렵지 않으며 아무리 재앙과 위험이 들이쳐도 피할 길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였기 때문이다.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 성육신하신 아기 예수님은 성장하시어 때가 되셨을 때 인류를 위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자기를 낮추시고 비우셔서 몸을 입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 하나님 사랑의 전반전이라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후반전이요 클라이막스, 절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본질이시지만 몸을 입으셨다고 하는 화육교리, 성육신 신앙은 구원의 도리를 선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원래 신이 육신이 되면 신적 위상과 권위에 큰 손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의 파트너로 부르신 인간을 죄와 허물에서 구원해내기 위하여 육신을 입으심으로 신의 위상을 포기하시기까지 하셨다. 성서에서는 몸을 입으신 기적을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성령으로 잉태하심과 동정녀 탄생이다. 하나님의 본질과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성령이 잉태하게 하셔야 한다. 성령이 아니고 그 무엇으로 하늘 생명을 잉태할 수 있으랴! 또 동정하신 성모가 아기를 품고 열달을 길러 출산하여야 했다. 순결하고 허물 없는 처녀에게서 탄생한 아기이다! 드디어 이 아기 예수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한 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영원한 생명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다.
예수는 하나님
대림절기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 우리는 다음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왜 예수님이 성령 잉태와 동정녀 탄생과 같은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세상에 오셨을까? 성령잉태설과 동정녀탄생설화는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으며, 아직도 교회 안에서조차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내용이다. 3-40년 전에 감리교신학대학에서도 삼척 송정 출신 한 교수가 동정녀 탄생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가 신학교에서 해임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성을 지닌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신이셨던 분을 보여주려고 성서 기록자들은 성령잉태와 동정녀탄생의 초월적, 신화적 방법을 통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 인간의 죄를 씻어주신 하나님임을 선포하였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죄인이 죄인을 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령잉태는 삼위일체교리로 볼 때 하나님 잉태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신 것이다. 성령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것이다. 성령은 곧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아버지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시다! 마리아의 몸을 빌어 오신 예수님은 본성이 신성을 가지셨다. 이것을 ‘성육신’이라 하는데, 영어로 incarnation이란 말을 쓰는데, ‘카르나치오’ 육체가 됨이라는 뜻이다. 하늘이 땅에 임했다, 하나님이 몸을 입어 인간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탄생하신 예수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나는 신학교 때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어려웠다. 고민도 하였다. 잘 안 믿어졌다. 그러다가 교회역사에서 고대교회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데에 수백 년이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과 예수를 인간으로 믿는 믿음이 있다. 예수가 훌륭하고 위대한 인간인 것은 틀림없으나 신이기도 하신가? 여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못 가지고 있다. 나는 그냥 훌륭한 역사의 위인, 훌륭한 인류의 스승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 이런 생각을 가진 윤리 도덕적인 신앙, 율법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수많은 교리와 기적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모든 게 다 걸려넘어질 것들이다. 예수 인성을 믿는 데에 머물러 있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신앙, 상식적인 신앙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다. 눈을 떠서 아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발견하라! 하나님이신 아기 예수께 경배할 때 비로소 믿음의 세계가 활짝 열릴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14절 하반절은 이렇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면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임마누엘의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였다. 예수님의 모든 모습을 다 보았을 것이다. 남루한 옷을 입고 배고파 하시는 모습도 보았고, 슬퍼 눈물 흘리는 모습과 성전에서 화가 나셔서 장상꾼들을 내어쫓으시던 것도 기억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마지막에 다 떠나버리는 실패한 지도자셨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하면서 요한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요르단의 압둘라왕은 변장을 하고 공공장소를 시찰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일반시민들과 대화하고,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알아보고, 공무원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는 것이다. 왕은 그들이 백성들에게 어떻게 봉사하는지 알아보려 병원과 정부기관들을 방문했다. 압둘라왕이 백성들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하면서부터 공무원들과 병원 직원들이 모든 사람들을 극진히 대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변장을 한 왕이 군중 속에 들어와 민정을 살피니 왕이 백성들의 삶을 복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지만 사람들 속에 와서 종처럼 낮아지니까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인생의 주인이시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 세대는 하나님을 되찾아야 한다. 그분을 끝까지 놓치지 말고 생활 속에서 찾아내어 동행해야 한다.
믿는다는 게 뭘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상의 삶과, 내 교회에서 드리는 정규 예배에서 독생자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셨고 거대하게 흘러가는 인류역사의 한 대목, 지금 내 생활, 내 문화로 찾아오셨다는 것을 깨닫고, 그분과 동행하고 그분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밥을 먹고 잠을 자도 예수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운동을 해도 예수와 함께 하는 것이 믿음이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이 강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외쳤던 것처럼, 내가 부르고 말씀을 따르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믿음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육신을 입고 인간 동등해지신 예수와 동행함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신성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 아기 예수가 은혜와 진리의 충만이시다. “충만함”이란 신성의 완전계시를 말한다. 영지주의자들 같은 이단은 몸을 입으신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육신이 되신 예수는 신성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몸을 입으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이라고 선포한다. 예수는 은혜의 원천이셔서, 은혜의 무한한 공급자가 되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 완전히 드러난 절대하신 진리,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오늘 성탄을 앞에 두고 대림절을 지나면서 사랑하는 제일 교우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을 다시 일깨워드린다. “하나님이 육체의 몸을 입으셨다!” 몸을 입고 이 땅 위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1912년 4월 15일 새벽에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온 세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 배는 최신기술의 집약체였고, 떠다니는 궁전이라 불렸으며, 4억 달러, 5000억 원을 들여 지은 군함 같은 배였는데, 침몰했기 때문이다. 이 침몰사고로 711명만이 살고, 1517명은 수천 미터 바다로 배와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침몰 후 이 배의 잔해를 분석한 결과 타이타닉호 침몰의 원인은 선체를 조립할 때 사용한 볼트와 리벳조인트의 불량으로 드러났다. 1달러짜리 불량부픔 때문에 대형사고를 불러일으켰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셔서 예수님이 되셨다는 이 성육신 교리가 대형 타이타닉호의 리벳조인트 부품처럼 중요하다! 교회는 이 성육신 신앙 위에 큰 구원의 배를 만들어 세상 바다로 띄워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성육신 신앙을 가지라!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여기에 신앙의 핵심 가르침이 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이나 착함이 아니다. 이것을 <겸비의 기독론>이라 한다. 자기를 비우실 뿐만 아니라 종이 되신 것, 자기를 종으로 삼으신 것이다. 겸손을 넘어서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해 비천해지신 예수님이신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사랑의 방법이 있고, 여기에 그리스도 제자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 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몸을 입으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구원을 이루신 것처럼, 위대한 일들이 실패의 낮은 자리에서 새롭게 시도함으로 이뤄질 때가 많다. 우리도 낮아지고 비워짐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몇가지 예만 들어보자!
에디슨은 일정 전압에도 견디는 필라멘트를 발명하기 위해 13개월이나 계속 연구했다. 제자가 말했다. “선생님, 11만번이나 실패했는데요.” 그러자 에디슨은 “실패는 무슨 실패,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11만 가지 방법을 알아낸 걸세.” 하였다. 결국 실패하고 낮아진 에디슨은 그 자리에게 계속 연구하여 필라멘트를 발명해서 인류에게 주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38세에 많은 빚을 지고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23년 후에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갔다 왔으므로 그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다.
작곡가 요셉 하이든은 8백 개의 곡을 작곡했는데, 가장 유명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는 66세 때 8백 번이나 반복하여 작품을 써본 후에야 탄생한 작품이라고 한다. 완전히 자기를 종으로 낮춰 갈아 넣어서야 최고의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의 작품인데, 8년 동안 2천 번이나 스케치하고 지우다가 그린 결과였다.
교회도 성도도 자기를 비워야 하나님이 임하신다.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겸비와 인내가 없이는 주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자기의 이름을 넣어 외쳐보자! “000, 몸을 입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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