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18-0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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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시130:1-8 |
설교제목 | 참회의 계절 |
참회의 계절
시130:1-8
2018년 8월 12일 [성령강림 후 열두째주일,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
어떤 청년이 친구에게서 손거울을 선물로 받고 애지중지하며 들여다보다가 문득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이라는 시가 생각났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참회에 관하여 시편의 말씀을 설교하면서, 광복기념주일이기도 하여 그의 시를 떠올립니다. 젊은 시인 윤동주의 참회록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滿)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는 194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교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이 참회록이라는 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하려면 창씨개명을 하고 개명한 일본이름으로 불려야 했기 때문에, 이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부끄러움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을 담아 이 시를 씁니다. 이 젊은 날의 선택을, 미래에 어느 기쁜 날(아마도 광복이 된 그 어느 날) 부끄러워할 줄 알지만, 그래도 거울 속에 비친 슬픈 사람의 뒷모양으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24년 1개월을 살았으면 요즘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젊은이들과 같은 나이인데, 헬조선을 살아가는 청년들도 아마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참회록을 쓰는 시절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시편 130편은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애송했던 시로, 그의 유명한 찬송 ‘내가 깊은 곳에서’(363장)의 바탕이 되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시편에는 모두 일곱 편의 참회시가 있습니다.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그리고 143편입니다. 이들 참회시 중에서 본문 130편은 여섯 번째의 시입니다.
저도 젊을 때부터 이 시편을 좋아하여 거의 외울 정도로 많이 읽었고, 이 말씀을 바탕으로 루터가 가사를 쓰고 러시아 정교회의 작곡가인 보르트니안스키가 작곡한 찬송가 363장도 많이 부르고 은혜를 받은 찬송입니다. 교회역사에서 크게 사랑받는 찬송이지요.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가 585장)라는 종교개혁 찬송과 ‘내가 깊은 곳에서’라는 참회의 찬송 이 두 곡이 교회에서 워낙 많이 불리어져서, 종교개혁자 말고 찬송시인으로도 크게 알려지게 됩니다. 오늘 설교 후에 우리는 이 찬송도 들을 것이고 부르기도 할 것입니다.
테오도르 베자는 운명할 때 마지막으로 이 시편의 3절,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하지요.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서 겸허히 고백할 정도의 말씀이고 보면, 이 시편이 가진 깊은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가면서 돌아보니,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았나,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번 여름을 보내게 됩니다. 이 시편은 고통의 원인이 범죄에 있음을 겸허하게 시인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합니다. 이 참회록은 부드러운 감정, 단순하고도 진지한 언어, 그리고 죄와 은혜의 본질에 대한 가장 심오한 이해를 결합시킨 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1절부터 4절을 보면, 죄의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께 드렸던 회개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고백합니다. 5절에서 8절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에 대한 갈망과 기다림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증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악은 시인의 개인적인 범죄도 해당되지만 이스라엘 전체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아무런 회개할 마음이나 참회할 일이 없으십니까? 오늘날은 죄를 짓고 못되게 사는 것보다 더욱 큰 문제가 참회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프면 병원에 가서 고쳐야 하는데, 아프면서도 아픈 것을 전혀 못 느끼니 죽을 때까지 그냥 그 병을 키우다가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는 겁니다. 이처럼 서로 칭찬만 하고 자기 합리화만 하다가, 우리의 죄를 알지 못하고 참회할 줄 모르는 것이 현대인들의 치명적인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예배하는 우리들은 사실 하나님 앞에 깊은 참회의 심정을 먼저 내놓아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참회함으로 비로소 심령이 깨끗해질 수 있고 타락과 범죄와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절에서 시인은 ‘깊은 곳’이란 말을 씁니다. 이 깊은 곳이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깊은 곳이란 그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깊고 신비한 바다심연, 또는 골짜기를 가리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많은 고통이 ‘깊은 곳’이라는 한마디의 은유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있을 때 느끼는 인생의 깊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말합니다. 사람은 홀로 남게 되는 것을 정말 두려워합니다. 어린 아이가 자기 혼자 두면 몸부림을 치며 울지 않아요?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감정입니다. 모임에서 소외되면 굉장히 화를 내고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고독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당을 짓고 편을 만듭니다. 고독을 못견뎌하는 것이죠.
인간은 살다보면 모든 것을 상실하고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돈에 자꾸 집착하는 것도 절망하게 될까봐 그렇습니다. 가장 두려운 절망은 하나님마저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에서조차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절망적인 순간에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인간을 진정으로 괴롭히는 것은 육체적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메울 수 없는 죄의 틈바구니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있다는 심정입니다. 구약에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드렸던 기도가 있습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욘2:5) 이런 고독과 절망의 상황을 우리는 솔직하게 고백하며 하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에 보면 절대반지가 등장합니다. 이 반지를 가지기만 하면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됩니다. 절대반지는 다른 다양한 반지들을 압도하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 반지를 소유하는 자는 여기에 들어있는 막강한 힘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반지를 가지는 사람은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고 은신할 수도 있게 되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 반지는 소유자의 마음을 사악하고 탐욕스럽게 변질시켜버리는 부정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절대반지를 잘못 가졌다가 인생이 망가진 자가 바로 골룸입니다. 원래 스미골이었는데, 친구와 연못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우연히 연못바닥에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친구가 발견합니다. 스미골은 그 반지에 마음을 빼앗겨, 친구와 반지를 빼앗으려 다투다가 죽입니다. 그리고 반지의 힘으로 마을을 소란스럽게 하다가 마을에서 추방되지요. 그는 사람들을 떠나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음침한 계곡에서 산짐승처럼 변해갑니다. 모습은 흉측하게, 본성은 야수처럼 바뀝니다. 스미골은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콜록거리는 기침소리를 뜻하는 골룸이 그의 이름이 되지요. 스스로 막강해지고 행복해지려고 절대반지를 탐했는데, 그것이 그를 불행의 늪으로 밀어넣고 망가뜨리고 말았어요. 반지를 소유했지만, 그는 반지에 휘말려 불행의 늪으로 빠졌습니다. 결국 골룸은 반지가 운명의 산에서 용암 속으로 던져질 때 반지와 함께 용암에 빠져 죽습니다.
권력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탐욕과 정욕으로 치달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골룸과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나는 그런 대단한 권력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안심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습니다. 대단한 욕망의 자리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절대반지를 탐하는 골룸의 마음이 들어있어요. 만약 이때 골룸이 자신을 바르게 돌아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가 자신이 스미골이었음을 알고 절대반지의 유혹을 버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면, 불행을 막을 수 있지 않았겠어요? 참회의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깊은 곳에서 참회의 마음으로 주께 부르짖습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2절)
죄가 무엇입니까? 원래의 자리를 떠나버린 것, 잘못 방향이 지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3,4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참회의 거울로 들여다 본 사람은 존재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시면 누가 설 수 있는가 하는 시인의 고백은 ‘죄 없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마음이 들어있는 겁니다. 주님만이 이런 우리 죄를 씻어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습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는 것이죠! 오늘날 탐욕과 경쟁의 사회에서 절대반지를 꿈꾸는 사람들이 골룸처럼 변해버린 자기를 돌아보고 하나님만이 회복시켜 주실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참회의 마음으로 주님께로 돌아오면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사랑과 평화의 따뜻한 얼굴, 하나님 자녀의 본래 얼굴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참회시는 정말 아름다운 구절들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결말이 좋아야 합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진짜 웃는 자입니다. 죄로 번뇌하던 인간은 참회함으로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을 받을 때 구원의 은혜 가운데로 나아가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 은혜가 있고 풍성한 구속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7-8절)
여호와를 향한 시인의 신뢰는 마침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와께로 인도하기에 이릅니다.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는 당부는 그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며 죄로부터 풀어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언약 백성은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체험에 근거하여 분명하게 권면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오직 여호와께 있습니다. 시인은 여러 가지 말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는데, 첫째는 ‘인자하심’이고, 둘째는 ‘풍성한 구속’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건져주시며 깊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권력과 물질의 유혹이라는 절대반지의 저주에 빠진 현대인들을 하나님만이 구원해내십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함으로 믿음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겁니다.
1997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향기’라는 영화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어떤 터키인이 의사를 찾아가 이야기합니다. “손으로 몸을 만지면 몹시 아파요, 머리를 만져도 아프고, 다리를 만져도 아프고, 배를 만져도 아프고, 손을 만져도 아파요.” 의사는 신중하게 진찰을 한 후 그에게 이렇게 답해주지요. “당신은 몸이 아픈 것이 아니고, 손가락이 부러졌네요.” 부러진 손가락으로 몸을 만지면, 어디를 만지든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만지는 손가락이 부러진 것이지요. 손가락을 고쳐야 합니다.
우리 삶을 놓고 보십시오! 무엇이 문제입니까? 부모입니까, 형제입니까, 친구입니까? 사회제도입니까, 정부입니까, 공무원들입니까, 아니면 제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입니까, 학교입니까? 아니요! 이 모든 것을 아프게 하는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상대방이 선을 행해도 받지 못하는 나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비뚤어져 있고, 내 마음이 병들어 있으니, 모든 것이 비뚤게 보이고, 병들었다 판단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부러진 손을 먼저 고치십시오! 하나님께 내 마음, 내 인격을 고쳐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께 풍성한 속량이 있으니, 참회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면서, 고린도교회를 향해 이렇게 권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하)
우리는 소망의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5-6절) 브라질 리우올림픽에서 세계를 감동시킨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아르헨티나 요트선수인 산티아고 랑게입니다. 그녀는 올림픽 전해인 2015년에 왼쪽 폐를 잘라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올림픽에 참가해 요트 혼성 나크라17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랑게는 54세로서 리우올림픽 최고령 금메달리스트였습니다. 믿음은 적극적 기다림, 없는 중에 가지는 소망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제대로 믿어 소망의 위대한 가능성을 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현대인은 참회를 배워야 합니다. 신앙의 위대함이 무엇일까요? 믿음의 연륜이 쌓일수록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고 종교적인 열심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인데, 왜 악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자신의 부족을 깨닫는 데 등한하면서 다른 이들의 허물을 자꾸만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믿음의 연륜이 깊고, 교회 직분이 무거울수록 자신을 돌아보며 참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제자가 광야에서 생활하는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숨은 죄를 회개했지만, 하나님이 그 회개를 받아주시고 죄를 용서해주실 것인지 물었습니다. 스승은 그에게 반문했어요. “제자여, 자네는 옷이 찢어졌을 때 그것을 버리는가?” 제자가 대답했어요. “아닙니다. 그것을 다시 수선해 입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고 해요. “우리가 옷에도 그렇게 신경을 쓰는데 하나님이 자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겠는가?” 돈 오만 원짜리가 구겨지고 찢어졌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 앞에 구겨진 것을 펴서 가치를 회복하면 됩니다.
지금 우리는 인생 중에 참회의 계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회개하는 영혼을 기뻐하십니다. 지금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다시 인생을 값지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절) 용서와 회복이 주께 있습니다. 인생의 완성, 역사의 완성은 거듭나야 합니다. 날마다 나의 마음과 가정이, 교회와 인류역사가 거듭남의 은혜를 힘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자기 허물과 죄를 참회하고 새로 지음을 받음으로 이뤄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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