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19-0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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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요4:6-14 |
설교제목 | 우물가의 대화 |
우물가의 대화
요한4:6-14
2019년 3월 17일 [사순절 둘째주일]
지금부터 18년 전인 2001년에 그 수명을 다하고 사라진 우주 정거장 미르호를 기억하는 이들이 혹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15년의 활동을 마치고 해체될 때 큰 화제가 되었었죠. 설비가 낡아 수리를 계속 해야 하고 유지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폐기하기로 결정했었습니다. 미르호의 무게는 143 톤이나 되며, 지구 400Km 상공 정지궤도에서 고도를 낮춰 내려오다가 원격조종에 의해 공중폭파 되었습니다. 파편은 대기권에 들어와 자연연소되어, 피지의 난디 근처 남태평양 해상에 떨어져 사라졌습니다.
러시아어로 ‘평화’ 혹은 ‘세계’를 뜻하는 미르호는 86년 2. 20일부터 2001년까지 꼭 15년을 우주에 떠있어 원래 계획했던 수명 5년을 세배나 유지하는 동안 많은 일을 했습니다. 지구와의 통신, 관측을 비롯하여 갖가지 우주과학 실험을 했습니다. 그동안 유명한 우주인을 많이 배출했는데, 발레리 플랴코프는 438일 단독 우주 체류기록을 미르호에서 수립하였고, 세르게이 아브데예브는 3차례 체류하여 종합 747일 체류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우주의 무한한 세계와 지구를 연결시키려 했던 인공별 중의 하나였지요.
미르호와 같이 우리 가운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키는 도구가 하나 있으니 바로 대화입니다. 대화는 미르호보다 훨씬 좋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대화는 관계를 발전시키고 유지합니다. 관계는 대화를 통해 점점 좋아집니다.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중요한 네가지 관계가 있으니,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그것입니다. 이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내용과 행복지수가 결정될 것입니다. 마틴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대화에 의하여 유지되고 발전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길에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물가에 그대로 주저앉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기 위하여 사마리아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시간은 유대 시간으로 육시니까 정오쯤 되었습니다. 낮잠 자는 시간이었죠. 너무나 덥고 뜨거웠습니다. 이 시간에 사람들 눈을 피해 우물에 물을 길러 오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보시오. 물 한 바가지만 좀 떠 주시오.”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을 피하여 한낮에 우물에 나왔는데 사마리아 사람도 아닌 유대인 남자가 물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속으로 예수님께 반발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던 유대인 랍비가 보는 사람이 없고 목이 마르니까 사마리아 여자인 자기에게 물 좀 달라 사정하는 것이 마땅치 않게 여겨졌습니다. 여인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나는 너에게 물을 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너는 자신 속에 있는 목마름을 알지 못하고 또 내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나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네가 만일 알았다면 나에게 생수를 달라고 했을 것이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습니까?” “당신은 야곱보다도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은 먹어도 다시 목마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은 한번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다. 그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하도록 새롭게 솟아난다.” 여자가 이 말을 듣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그런 물이 있습니까? 그 물을 내게 주십시오. 제가 물 길러 다니지 않게 해 주십시오.”
지역의 소도시에는 대부분 향교라는 곳이 있습니다. 삼척도 삼척초등학교 옆 예전에 심낙윤 집사님이 사시던 집 바로 뒤가 향교지요. 교동이란 향교가 있는 동네라는 뜻이지요. 향이란 서울이 아닌 지방이란 뜻이고, 교는 학교입니다. 지방 도시의 유교적 전통을 지켜가는 학교가 향교요, 그 향교가 있는 동네가 교동입니다. 우리교회는 원래 죽서루 옆에 있다가 33년 전 86년도에 교동 옆의 남양 양지바른 모래터로 이사 온 곳이 지금의 장소입니다. 보통 동네마다 교동에는 우물이 있습니다. 우물이 잘 보전된 지역도 있어서 지금도 물을 마시는 곳도 있으나, 대부분 물이 마르거나 흔적만 남아있는 곳이 많습니다. 우리 삼척에는 교동 우물이 옛날 형태는 없어졌으나 빨래터와 우물터의 모습으로 크게 복원되어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권사님 한분은 아침마다 빨랫감을 끌고 교동 우물 빨래터에 출근하시더군요.
수가성 우물이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교동 우물입니다. 위의 내용이 이날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이뤄진 대화입니다. 제가 심방을 다녀보니 우리 사회와 생활에서 대화가 정말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대화가 단절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우물 가에서 어느 더운 날 정오에 행로에 지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이뤄진 이 대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대화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대화가 살아있어야 사회도, 가정도, 교회도, 개인도 살아납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대화는 첫째, 생활 속에서 이뤄진 대화요, 둘째, 거리감이 없는 대화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대화는 셋째, 진리의 대화이며, 넷째, 상한 마음과 인생을 치유하는 대화였습니다.
첫째로, 생활 속의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생활 속에 살아있는 대화가 없다면 광야같이 거칠고 외딴 섬처럼 외로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가정에 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식사 시간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식사는 음식물을 위장에 넣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가지고 함께 생명과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대화를 통하여 매일 축제 같은 식사를 나누십시오. 급히 먹으면 체합니다. 천천히 눈을 맞추며 얘기하면서 밥을 드십시오!
권위주의와 엄격성을 강조하는 유교적 문화의 영향으로 우리는 말이 없는 것이 미덕이요, 말이 많은 것은 악덕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삼척에서 자라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자라 중학교 때까지 있었는데, 정말 ‘경상도 문디’들은 무뚝뚝합니다. 대화가 부족해요.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들은 하루에 단 세 마디를 합니다. 회사 갔다 와서 아이의 안부를 묻느라 “아는?”, 정성껏 음식을 차려온 아내를 향하여 “묵자!”, 밤에 잠잘 시간이 되어 “자자!” 이러면 하루가 다 갑니다. 요즘 그랬다가는 경상도 아니라 어디라도 똑똑한 여자들한테 살아남지 못하지요!
생활 속의 대화를 살리십시오! 유치하고 일상적인 대화는 서로의 존재를 강화시켜 줍니다. 아무 목적과 의도를 가지지 않은 그냥 사사로운 대화는 친구나 가족 간에는 너무나 필요한 대화입니다. ‘쓸모 있는 대화’를 하려고 하지 말고, ‘쓸모없는 일상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활대화는 서로를 용납하고 삶의 여유를 누리며 함께 사는 관계를 형성합니다. 생활 속의 대화는 삶을 생기 있게 하고 피곤한 영혼에 힘을 줍니다. 생활 속의 대화를 잘 하는 남자가 인기 있고, 일상 대화를 잘 하는 여자가 인간성 좋다는 칭찬을 듣습니다.
둘째로, 거리감이 없는 대화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사실 참 이루어지기 어려운 대화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나라를 잃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들이 외국인과 섞여서 살다보니 이스라엘 포로기에 일부 외국인과 결혼하여 혼혈 자녀들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선민이 어찌 이방인과 섞이느냐 하여 유대 정통주의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도비야와 산발랏 무리들이 느헤미야의 성전재건을 반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훗날 로마시대에는 사마리아 사람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인골을 뿌리는 성전모독 사건이 있어서 큰 물의를 빚기도 했습니다.
성전 입장을 거부당한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에 성전을 따로 짓고 사마리아 오경으로 경전을 삼아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였는지, 갈릴리 지방으로 갈 때 일부러 요단강을 건너 요단 동편을 지나 다시 요단을 건너 갈릴리 지방으로 갈 정도였습니다. 원래 이웃 간에 잘못 되면 원수 되는 겁니다. 더구나 당시 여자들은 남자보다 신분이 낮다고 보아서 공식적인 자리에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좋으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그냥 하나님의 형상을 띠고 있는 한 사람으로, 인격으로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전제, 여자라는 전제를 다 버리고 대화를 시도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생겨난 인간에 대한 불신을 없애야 대화할 수 있습시다. 계급의식이나 신분구조 때문에 생겨난 거리감을 넘어서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됩니다. 부모님에 대한 거리감을 극복해야 합니다. 특히 시댁 부모, 처가 부모를 제 부모로 알고 대화하기 힘쓰십시오. 선생님에 대한 거리감을 극복해야 합니다. 선생님도 잘해보려 하고 아이들도 선생님을 따르기 원하는데, 이 거리감으로 대화가 되지 않으니 진정한 만남과 관계의 회복이 어렵습니다. 목회자나 신앙 지도자들과의 거리감을 극복합시다.
상사나 윗사람에 대한 거리감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윗사람이 권위주의로 내리누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더 많은 경우는 필요 없는 거리감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방어하거나 주장하여 대화가 끊어지는 겁니다. 상담에서도 라포(Rapport)를 형성해야 상담이 된다고 합니다. 거리감을 극복하고 문턱을 넘어서야 대화다운 대화가 이뤄진다는 거예요. 대화가 이뤄져야 인간관계가 형성되며, 관계가 만들어져야 외롭고 따분한 삶이 재미있고 풍성한 삶으로 변화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대화는 진리의 대화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저절로 진리에 대하여 대화를 합니다. 예배에 관하여, 삶과 신앙에 대하여 대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잠잠하고 자기 마음을 비워 들으면 언제든지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농담이나 잡담에만 머물러 있으면 재미있고 즐겁기는 하겠지만 공허합니다. 조문도(朝聞道)면 석사가의(夕死可矣), 즉 “아침에 진리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성현은 진리의 대화를 목말라 했습니다. 그런데 공자만 그렇습니까? 사실은 누구에게나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진리의 대화가 되기 바랍니다.
미국 휴스턴서울교회는 개척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부흥을 이룬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는 속회 대신 가정교회라는 개념을 도입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부부 중심으로 많은 작은 모임들을 만들어 가정교회로 삼았습니다. 이 가정교회는 주말(금요일 밤)에 모여 몇 시간 모임을 가지는데, 찬송을 부르고 성경공부를 20분 정도 길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는 식사를 하거나 간식을 나누면서 한 시간이나 두 시간 대화를 나눕니다. 이 가정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을 함께 나누는 대화인데, 이 대화를 통하여 놀라운 치유와 변화가 일어난답니다. 그 교회는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는 인원보다 속회와 같은 가정교회에 참석하는 인원이 훨씬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 속도들과 말씀을 나누고 진리의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인생이 외롭지 않고, 재미있고 보람 있게 됩니다. 진리의 대화를 나누면서 인생길을 걸으면 정말 즐겁습니다. 방향을 잃지 않게 됩니다. 힘이 생깁니다. 진리의 대화를 서로 나누시기를 기뻐하십시오!
끝으로, 예수님의 대화는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대화입니다. 남편을 데려오라는 말씀으로 시작된 대화는 여인의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화는 상처를 어루만지고, 문제에 마주 서게 하였으며, 치유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를 도와 목회하시는 길에 어려움이 있으면 어린 저를 붙들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아유, 속이 시원하다”하셨습니다.
대화를 위해서는 자기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자기 속에 갇혀 있으면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보이고 싶은 나’와 ‘감추고 싶은 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만난 사람들,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나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진정한 대화를 하려면 감추고 싶은 나까지도 내놓아야 합니다. 대화를 하려면 훌륭하고 흠 없는 자기가 아닌, 자기 연약함과 문제와 상처가 드러나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모든 면을 내어놓고 만날 때 진정한 만남과 대화가 가능합니다. 어찌하면 자기의 강하고 높은 벽을 허물고 우리 전부를 내어놓고 친구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합시다.
얼마 전 저는 어느 자리에서 후배와 하루 오후에 쉬는 시간을 함께 하며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내와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혼하게 된 얘기, 사랑하는 아이들과 뿔뿔이 흩어지고 하던 일을 그만 두고 미국으로 가서 관광비자로 임시 체류할 때의 어려운 일들을 들었습니다. 두 해를 매일 밤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살았다고 하더군요. 주변 사람들에게도, 교인들에게도, 직장 상사에게도 다 얘기 못했답니다. 그러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마음을 내어놓을 수 있고 항상 내 편이 되어줄 친구들이라 다 얘기했답니다, 울면서. 얼마나 힘 들었는지, 어려웠는지 다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그렇게 가벼워지고 치유가 되더랍니다.
지난 주간부터 우리는 사업체 대심방을 시작했습니다. 심방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시간이요, 목사와 함께 직장과 가정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인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대화하는 시간이라는 겁니다. 한 번 심방에 ‘감추고 싶은 나’까지 드러내기는 어렵지만 함께 대화하고 기도의 제목을 나누는 가운데 대화를 위한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교회에는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듯이, 교회라는 우물가 대화의 장소를 통해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대화를 통하여 사회적으로 따돌림 당했던 여인이 수가 성의 전도자가 됩니다. 대화는 과거의 상처와 마음의 고통을 치료합니다. 부부 사이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이런 대화가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속회에서 이런 대화가 있게 합시다, 모임에서 이런 대화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바랍니다. 선생님과 대화를 시작하십시오, 목회자와 대화합시다. 멀어졌던 친구와 우물가의 대화를 새롭게 시작하세요! 여러분 모두가 인생길에서 대화로써 아름다운 길벗을 다시 찾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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