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19-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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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로마서 8:26-30 |
설교제목 | 모든 것이 합력하여 |
부모가 출장이나 여행을 다녀오면 가방이나 손에 선물이 들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현관 앞으로 뛰어나와 부모를 반기지만 그들의 관심과 시선은 온통 선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엄마, 뭐예요? 아빠, 고마워요!” 선물을 받아 챙기고는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갑니다. 이제 목적을 이루었다는 것이지요. 부모는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다가도 한편으로는 아빠 엄마보다 선물이 더 중한가 하여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받거나 잘 되면 감사를 표현합니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많은 것이 부모님에게서 오기 때문이죠. 그러나 사실은 무엇을 주거나 가지고 오지 않아도 부모가 계심으로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모님의 존재 자체가 감사한 것이지요. 자녀들도 부모의 기대를 채워주고 공부도 좋은 성적으로 잘 하고, 취직도 앞서 가며 내세울 만한 직장에 취업할 뿐 아니라, “우리 아이는요...” 하면서 자랑하고 싶은 위치에 가있다면 감사하겠지요! 그러나 건강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우리 아이들의 존재 자체가 감사한 일입니다. 진짜 감사는 물질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존재로 인한 감사입니다.
50년대 전쟁 이후와 60년대 개발국가일 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여러 나라의 원조를 받아 살아야 했습니다. 학교에서 어릴 때 원조 받은 우유가루나 옥수수빵 나눠주던 것 기억합니다. 그러던 나라가 아직 통일이 안 되었고 주변 강대국들의 눈치와 설움이 좀 있지만, 세계 경제 10위권에 드는 나라가 되었으니, 스스로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의 심성이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은 좀 실망스런 결과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행복지수가 중위권 정도에서 올라올 줄을 모릅니다. 살만해졌는데 왜 그럴까요? 마음자세의 문제입니다. 지금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마음의 감사를 회복하는 일이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사형통은 아니더라도 ‘만사협통’인 것입니다. 그냥 감사하며 밀고 나가면 합력하여 잘 될 것입니다. 이런 ‘만사협통’의 믿음을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삶을 더욱 크게 축복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어려움을 재료로 사용하셔서 우리 인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고통이 있더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이겨내십시오. 고통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 28절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한 것은 직접 자기가 체험한 데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바울이 체험한 하나님은 ‘만사협통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옥에 갇혔을 때나 병들었을 때나, 시험을 당할 때나 고통을 겪을 때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수가 있었습니다. 살만한 데도 불평을 일삼는 이 나라 백성들은 이제 바울의 이 마음, 어떤 일을 당해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바울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회심하고 3년 후에 예루살렘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이 3년 기간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기도하고 공부한 기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체험도 하고 기도도 할 만큼 한 바울이 사도들을 찾아간 겁니다. 그러나 반응이 안 좋았어요. 보름을 머무는 동안 열두 사도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만 그를 만나주고 전체적으로 싸늘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에 머물러 그들과 함께 교제도 나누고 또 같이 사역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후에 때가 되면 예루살렘교회에서 정식 선교사로 파송받아 안정적으로 지원을 받으며 마음껏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고 함께 생활했던 11제자와는 달리 나중에 영적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을 뿐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바울은 선교를 위해 준비된 사람이었지만 신학교 졸업장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그 계획을 듣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거절당한 바울은 쓰라린 마음을 안고 고향 다소로 내려와 교회 없는 목사로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얼마나 베드로가 원망스러웠을까요? 그렇게 다소에서 10년 이상을 지냅니다. 13년 동안 그렇게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소에 머무는 동안 많은 신앙체험을 합니다. 그는 계시를 받았고 환상을 체험하여 3층천에까지 올라가는 경험을 합니다.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수련한 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더 큰 일꾼으로 준비시켜 더 위대하게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후에 바울이 목숨 걸고 온 세상에 복음 전할 수 있었던 것, 말씀의 기초를 탄탄히 다져 성경에 들어간 바울서신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기간의 훈련과 준비가 바탕이 되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다소에서의 경험과 성장이 없이 바로 선교사로 파송받았다면, 그처럼 깊이 있고 영향력 있는 사역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계획대로 되지 않게 하시고, 다소에서 10년 이상 머물게 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회심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준비할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바울의 계획대로 되지 않아 힘들고 속상했지만, 바울을 더 다듬고 훈련시키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결국은 잘 된 일입니다. 원망할 일이 아니라, 계획대로 되지 않아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헤쳐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바울은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로마서를 기록합니다. 로마는 고린도에서 그리 멀지 않아 배타고도 며칠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를 방문해서 직접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이 강했지만 어쩐 일인지 가지 못합니다. “길이 막혀서” 몇 년 동안 가지 못했지요. 바울은 데살로니가에도 3주밖에 머물지 못했기 때문에 가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가지 못했지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데살로니가 전후서이고 로마서입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바울 서신에서도 맨 처음 써진 책이고, 신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먼저 써진 책입니다. 로마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앙교리를 집대성한 바울의 최대 역작입니다. 하나님은 불가능과 거절의 상황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감사할 것뿐입니다.
또, 바울은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갖다 버렸는데, 그날 밤 기적처럼 살아난 거예요. 그리고 다음날 다시 이웃 도시 더베로 가서 몸을 추스르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 있는데, 그 지역에 살았던 청년 디모데였습니다. 이 청년은 후에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바울이 죽어가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고 자기도 복음전도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듬해 바울이 다시 루스드라에 왔을 때 디모데는 바울을 따라 선교여행에 동참하게 됩니다. 예수 믿은 지 1년도 안 되는 청년, 집사도 아닌데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 자신의 젊음과 생명을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고난을 겪으면서도 불굴의 정신으로 복음 전하는 스승 바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디모데를 감동시켰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가장 믿음직하게 여기는 제자였고, 아들처럼 여기며 의지하였습니다.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사람도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루스드라성에서 복음 전하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바울은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고통으로 죽어가면서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돌에 맞은 고통보다 자기를 이런 상황에 내던지시는 하나님에 대한 실망이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 디모데를 만나고 그 고난이 젊은 디모데를 제자로 불렀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 일들이 이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 고통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도 함께 빚으셔서 작품을 만드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이루어 가시는지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빌립보에서도 바울은 엄청난 고통을 당합니다. 그 도시는 바울이 전도한 유럽의 최초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도시는 낯설었고 만만치 않았습니다. 첫 안식일에 동족 유대인의 회당이나 모임 장소를 찾다가 해변에 모여앉은 몇몇 여인에게 말하기 시작하여 루디아라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예수 믿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점치는 귀신들린 여자를 만나 그 귀신을 쫓아내어 주었는데, 그 점치는 여자를 데리고 있는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고발합니다. 귀신을 쫓아내서 점쳐서 돈 버는 일을 못하게 한 것에 앙심을 품은 것입니다. 죄목은 성을 시끄럽게 한다는 소요죄였습니다.
군중심리에 의해 즉석재판이 이뤄지고 바울과 실라는 옷이 찢기고 매를 맞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이 친 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엄청나게 맞았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지금 죄도 정하지 않고 사람들의 군중심리에 휘말려 매를 엄청나게 맞고 감옥에 던져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죄수들이 듣더라.’ 죄수들이 그 찬양을 들었습니다. 은혜받은 겁니다.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런 찬송이 아니었을까요?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유를 모르는 억울한 매 맞음과 옥살이, 이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지금은 힘들고 화나고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고통이 변하여 기쁨이 되며, 억울함이 변하여 능력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도가 끝나자 지진이 나서 굳게 닫힌 감옥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손을 채웠던 수갑도 발을 묶었던 차꼬도 풀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왜 하나님이 바울과 실라를 매맞게 하셨으며 감옥에 갇히게 하셨을까요? 기적적으로 그것이 풀리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빌립보는 유럽의 최초의 선교 도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유럽을 맨먼저 복음화하고 미국을 복음화하고 온 세계를 복음화하려는 것입니다. 그 광대한 구원계획의 첫 도시를 예수 믿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고난을 쓰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셔서 그때 바울 실라의 찬송을 듣던 사람들, 그 터가 흔들려 감옥문이 열리고 수갑과 차꼬가 풀리는 것을 본 모든 죄수들과 간수가 가족들과 함께 다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밤에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그렇게 묻는 간수에게 바울이 이렇게 복음을 전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들은 모두 유럽최초교회인 빌립보교회의 창립멤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힘들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감옥에 갇힐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것은 빌립보교회를 탄생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바울은 감옥에서 풀려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체험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바울에게 많은 가시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은혜와 기적만 바울에게 베풀어주신 것이 아니고 가시도 많이 주셨어요. 바울은 너무 괴로웠습니다. 평생 육신의 질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 가로막아 힘들었어요. 잘 돕던 사람들이 때로는 가시가 되어 바울을 찔렀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가시는 안 주셨더라면 바울이 좀 덜 힘들었을 텐데, 왜 그런 가시를 많이 주셨을까요? 특히 육신의 고난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고, 사역에도 큰 걸림돌 노릇을 합니다. 안질이 심해서 나중에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서신을 누가 써주었는데, 마지막에 자기 서명 이름 쓰기도 힘들어했습니다. 간질은 가끔씩 사람들 앞에 거품을 물고 넘어지니 바울의 위신과 권위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가시는 가시 정도가 아니라 말뚝이나 대들보 정도 되는 큰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존재와 사역이 덜컹덜컹할 정도로 힘든 가시들이 있었던 거죠. 바울은 굉장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고 실력이 있는 사람인데다가 좀 냉정하고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약 가시가 없었다면 엄청나게 교만해져서 기고만장했을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교만했더라면 복음 전파에 큰 지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가시를 콱 박아두셔서 기고만장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기도하고 겸손하게 주님만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시도 은혜입니다. 나에게 주신 축복만 감사하지 말고 나에게 주신 가시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바울의 가시 때문에 누가를 만났을 때, 좀 더 가깝게 지냈을 것 같습니다. 누가는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의사였던 누가는 바울이 그런 약한 몸으로 선교여행을 하면 무리인 것을 알아서, 바울을 돌보기 위해 함께 선교여행에도 동행합니다.
물론 누가는 디모데나 디도처럼 목회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을 돕고 주치의 노릇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누가가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책은 두 책이지만, 신약성서에서 분량으로 보면 바울 다음으로 많은 분량의 성경을 쓴 사람이 바로 누가입니다. 바울이 가시가 없었다면 누가는 없었을 것이고, 누가가 없었다면 누가복음도, 사도행전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시에도 실패에도 절망적 상황에도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즈음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제 38년 목회에 이렇게 어려웠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이렇게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슬프고 화나고 속상한 적이 다시 없었습니다. 저는 요즈음 목회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마음입니다. 교회도 무엇부터 손을 대어 치유하고 회복시켜야 할지 모를 만큼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교인들은 다행히 기도하며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과 부교역자들도 여러 가지 말로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이미 하나님이 가정들을 만지시고, 개인들을 치유하고 계심을 봅니다. 주님만 바라봅시다!
저는 요즈음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기도하고 성경과 신앙서적들을 읽고 있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골치 아픈 니느웨길을 버리고 휴양지, 위로 받을 다시스로 가지요. 저와 우리 교회 교우들이 그동안 주의 뜻을 이루노라 하면서도 내가 가고 싶은 다시스로 가지 않았나, 저는 깊이 자신을 돌아보는 중입니다. 이 풍랑이 불고, 배에 있는 많은 것들을 바다에 쏟아버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하면서, 내식대로 응답하고 내 마음 대로 믿은 우리들의 모습이 있지 않은가 자꾸 마음이 걸립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때도 있고, 이와 같은 고통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시를 주시어 우리를 옴치고 뛰지 못하게 콱 찔러버리실 때도 있지요.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만사협통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성령을 거슬러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책임을 누구에게 전가할 필요도 없습니다! 겸손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요즈음 다니엘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매일 밤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위대한 일들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하게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오직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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