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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두 길 (창25:19-34) [2020년 7월 12일, 성령강림후 여섯째주일]
2020-07-11 11:06:35
박신진 목사
조회수   58
설교일 2020-07-12
설교말씀 창25:19-34
설교제목 두 사람 두 길

두 사람 두 길

25:19-34

2020712[성령강림후 여섯째주일]

 

주어진 인생

어렸을 적에 나는 삼척에서 살았다. 여기 삼척 정라진에서 태어났지만, 자라기는 삼척은 삼척인데 장성에서 자랐다. 우리 자랄 때 장성 거기는 온 동네가 새카맸다. 산도 들도 석탄 먼지 때문에 거뭇거뭇했고, 개울도 석탄물이 흘러 까맸으며, 탄광에서 퇴근하는 아저씨들의 얼굴도 새까맸다. 그래도 탄광촌은 돈이 많고 살기 좋은 동네라고 했지만,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형편없이 고달팠고 매일 집집마다 부부싸움 하는 소리, 술집마다 떠드는 남자들 고함소리로 조용할 사이가 없었다. 어린 나였지만 그때 온 나라가 다 가난한 것은 알 수 있었다.

어쩌다가 외국사람이라도 보면 모든 게 다 깨끗하고 수준 높고 위대해 보였다. 한번은 목회하시는 우리 아버지께 미국 선교사님이 방문을 하였다. 선교사님은 인사하는 나에게 꼬부랑 한국말로 귀여워하시며 쓰다듬어 주셨다. 그분이 가시고 얼마 뒤에 소포가 하나 왔다. 거기에는 미제 초콜렛과 역시 미제 오렌지가 몇 개 들어있었다. 또 미제 색연필과 노트들이 좀 들어있었다. ! 초콜렛이 얼마나 맛있었던지! 나는 그걸 아껴먹느라 오래오래 조금씩 빨아먹었다. 오렌지는 어떻게 먹는지를 잘 몰라서, 껍데기를 벗겼더니, 조그마한 과육이 송알송알 붙어있길래 한알씩 뜯어서 오래토록 먹었다. 지금도 그 신맛이 느껴져 침이 고일 정도이다. 왜 어른들이 미제는 똥도 좋다더라.’는 말을 하는지 알만하였다.

어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왜 이런 가난한 나라, 시끄러운 동네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는 좋은 나라, 부자 동네도 많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한 나라에서 사람들끼리 싸우면서 사는지 궁금하였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큰 사람이 되어 나라를 살기 좋게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를 닮아 훌륭한 목사님, 그때 감리교단의 최고 높은 어른은 이환신 감독님이라고 아버지가 말했기 때문에, 나도 이환신 감독님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내가 박씨이기 때문에 이감독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아차렸다.

사람들은 자기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라는 게 있다. 만약 자기가 선택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주어져서 억울한 일을 당한다면 견디기 어려워하는 게 사람이다. 그런데도 아무리 훌륭한 인격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자신의 의사나 결정과는 상관없이 많은 것이 결정된 채로 태어난다. 자기가 한국에서 태어나는지 북한에서 태어나는지는 자기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결정된다. 그런데 한국시민과 북한시민은 얼마나 다른 운명으로 살아가게 되는가! 남자로 태어나는 것과 여자로 태어나는 것, 서울사람으로 태어나는 것과 지방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자기 결정과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건강한 사람도 있고, 타고나기를 아프게 타고나는 사람도 있다.

 

쌍둥이 두 아들

창세기 25장은 쌍둥이 두 아들이 나온다. 이삭은 결혼하고 오래 지나도록 아기가 없었다. 나는 결혼하고 3년이 지나도 아기가 없으니까 우리는 물론이고 양가 부모님들이 아기를 무척 기다리셨다. 점잖은 우리 장인께서는 하루는 심각하게 딸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기를 갖도록 노력하고 기도해라. 그리고 그래도 아기를 갖지 못하면 그 자리를 내어놓아야 한다.” 무슨 그 자리가 대단한 자리라고! 부모님들 마음은 그랬다. 리브가는 몸이 건강했는데도 20년이나 임신을 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얼마나 노력했겠는가! 드디어 리브가가 임신했는데, 쌍둥이였다!

그런데 아내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쌍둥이 두 아들이 태 안에서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었다.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다(22). 그 당시에는 종교제도가 있던 때도 아니고 성전이나 제사장도 없던 때이니까, 민중의 소박한 신앙으로 하나님께 물어본 것이다. 거창한 인생의 길이나, 중요한 결정만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이 아니고, 배가 아플 때 몸이 괴로울 때, 까다로운 일들을 결정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 물어보는 태도는 믿음의 자녀들로서는 바람직한 자세다! 이게 사실은 자기 성찰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아들들의 장래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하나님은 이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두 국민이 태 중에 있다는 것이다. 뱃속에서부터 다른 나라로 나뉘는데, 한 족속이 더 강하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계획이다. 이 아이들이 아직 아무 행동도 하기 전, 아직 사람으로 구실도 시작하기 전이었다. 선한 일도 악한 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는 택하여 큰 나라를 삼고, 하나는 또 섬기는 나라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 아이들은 무슨 큰 나라 작은 나라 될 만한 어떤 일을 한 적이 없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아이들에게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실제로 쌍둥이를 낳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쌍둥이 형 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태를 열고 쓱 먼저 나왔고, 어렸을 적부터 허구한 날 들판에서 살더니 날쌘 사냥꾼이 되었다. 그에 비해 야곱은 태어날 때에도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따라 나오더니, 얌전하게 집에서 주로 살며 엄마 안살림을 도왔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는 활달한 성격에 사냥도 잘 하는 에서를 사랑하고, 어머니는 집으로 돌면서 자기를 도와주는 자상한 야곱을 더 애착한다. 이삭이 육십세에 쌍둥이 아들을 낳았으니 리브가의 나이도 적지 않았다.

사람은 주어진 성향, 타고난 재주가 있다. 생긴 것도 타고난 부분이 있다. 타고나기를 좀 작게 타고나거나, 타고나기를 조금 통통하게 타고난 사람들은 요즘 굉장히 억울해 하지만, 한 때는 그런 스타일이 더 사랑받던 시절도 있었다. 그 당시는 기개있게 들판을 뛰어다니면서 사냥을 해다가 주는 남자가 워너비 스타일이었지만, 요즘은 집에 있으면서 자상하게 여자들 말을 들어주고 요리도 잘하는 야곱 스타일이 대세다. 에서는 씩씩하고 매사에 대범하며 맘도 넓었다. 야곱은 간교하고 조심스러우며 자상했다. 성서는 이 주어진 조건이 서로 다르고 좀 불리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타고난 성품이나 신체, 능력, 재주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한 인생의 성취나 보람은 거기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르게 태어남을 받아들여야

사람은 다르게 태어난다. 두 길, 세 길, 백 길, 천 길이 인간의 길로 주어져있다. 키 큰 사람 작은 사람, 머리 좋은 사람 마음 따뜻한 사람, 많이 가진 금수저 아무것도 없는 흙수저, 몸매가 좋은 사람 표정이 좋은 사람- 우리는 각양각색의 사람을 보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뱃속에서부터 서로 싸우는 이 두 쌍둥이를 통해 보여주시는 점이 있다. 사람은 단순히 타고난 것, 주어진 조건, 또는 자기 노력을 따라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자기 노력이나 실력, 선행으로 인생을 다 세울 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인생이 흘러가게 된다는 것이다.

9장의 말씀이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9:10-13).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거나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닌데, 인생의 많은 부분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에서는 선택과 예정의 교리라고 한다. 나도 그런 생각으로 힘들어 했던 적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목사가 되도록 예정해 놓으셨나? 내가 모의고사 성적이 넉넉함에도 불구하고 시험당일 지각해서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니까 어머니가 그 비슷한 얘기를 하셨다. 어릴 적에 너를 목사로 서원한 적이 있다고. 이런 법이 어디 있나? 내 인생을 하나님 그 분이 마음대로 정하시다니! 더구나 목사는 자유가 없고 수도사처럼 얽매여 살아야 하지 않는가!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적으로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이냐? 우리가 노력하며 살 필요도 없는 것 아니냐?

그러나 우리는 인생에 대해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한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죄인이다. 원죄가 인간을 타락하게 하여 제대로 된 인생을 살지 못하고 짐승처럼 살게 되어 있다. 잘난 사람, 부자들도 타락하여 얼마나 못되게 더럽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가! 원죄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아 거룩한 천국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매일 기도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 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스스로 똑똑한 줄 알면서 제멋대로 살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택함받은 인생, 예정된 사람이 있다. 왜 그걸 하나님이 마음대로 정하시는가? 하나님이 일부라도 사람을 선택하여 구원받게 하시는 것을 피조물인 우리가 나무랄 수는 없다. 다만 받아들이고 감사할 뿐이다.

 

한 뱃속에 있는 두 길

사람은 각자 다르게 태어난다. 그러니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감사하면서 살라.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다.’ 하는 것이 앞에서 말한 중요한 가르침이고, 오늘 설교에서 또 하나 더 중요한 가르침은 뭐냐 하면, 한 뱃속에 두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23절이다. 한 뱃속에 두 길이 있다! 에서가 있고 야곱이 있다. 리브가의 태중에 에서라는 인생과 야곱이라는 인생이 들어있다. 물론 그들은 태어나서 각자의 길을 살았다. 그러나 뱃속에 두 개의 가능성을 가진 두 길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두 종류의 사람을 즐겨 말씀하신다. “좁은 길로 가는 사람과 넓은 길로 가는 사람”, 좋은 열매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 맺는 나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을 대비하고, 신명기 3015-20절은 인생을 생명과 복, 사망과 화의 길,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의 길로 나눈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이냐, 가나안의 바알이냐를 선택하라고 백성들에게 요구하였다. 사도 바울은 불의의 도구와 의의 도구로 사는 사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과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로 구분한다.

오늘 창세기의 말씀을 인간에게 적용해서 보면, 모든 인간의 뱃속에는 두 개의 길이 들어있다. 어거스틴은 모든 사람이 세속의 도성을 추구하는 사람과 신의 도성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진다고 보았다. 경건주의자 윌리엄 로에게 있어서는 경건한 삶과 경견치 못한 삶이 나누어진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느냐,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사느냐를 묻는다. 성서에서부터 현대사상에까지 믿음의 길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두 길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아일랜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자기 무덤 묘비에 이런 말을 새겨달라고 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우리 안에 있는 두 개의 길 사이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살다가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의 어정쩡한 삶을 자기에게 빗대어 위트있게 말한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욕망의 삶과 영의 소욕을 따라가는 경건의 삶 사이에서 결단하지 못하고 매일 세상과 육체에 휘둘려 끌려가는 노예의 삶을 말하는 뼈있는 유머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에서의 인생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택한 인생이다. 세일 산에서 족장이 되어 신앙의 계보에서 사라져 버린 것은 그가 선택한 것이다. 에서의 인간형은 인생이란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는 뛰어난 신체와 활달한 기개를 가졌고, 대인관계에서도 모남이 없는 멋인 인간이었다. 그러나 활쏘고 육체를 단련하면서 다른 길로 가버렸다. 야곱은 하나님을 선택하고 신실한 길로 갔던가? 아니다. 야곱은 더 치사하고 세속적인 사람이다. 그가 신앙의 계보를 이은 것은 하나님의 예정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야곱이야말로 하나님도 아니고 세상도 아닌, 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살았다. 그러나 결국 요셉을 낳고 하나님의 선택을 따라갔다.

 

우리 안의 두 길

이 설교를 쓰고 있을 때, 10일 금요일 아침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지난 주간의 가장 충격적인 소식이다. 아마도 그가 북한산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그 전날 터진 전 비서와의 스캔들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여자는 변호사와 함께 자기에게 저지른 박시장의 성추행 사실에 대해 증거를 갖추어서 경찰서에 고소하였다. 그 내용은 고인의 죽음으로 더이상 밝힐 수 없지만, 정말 충격인 것은 누구보다 박원순 시장은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여러 성폭력 사건을 맡아 피해자를 변호해왔고, 스스로 페미니스트로서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반응이 있다.

90년대 초반 우리나라 최초의 미투사건 변호에서 유죄를 이끌어냈던 당사자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의 뱃속에도 두 길이 있었던 것이다. 사회정의를 이루며 이 땅 위에 평등하고 모두가 행복한 사랑을 이루어가는 아름다운 길이 있는가 하면, 육체의 쾌락을 위해 은밀한 죄를 여러 해 저지르며 사는 추한 길이 있었던 것이다. 성추행으로 고소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여성 인권을 강조해 온 자신의 일생이 부정될 수 있다는 중압감이 박 시장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니었을까?

재작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노회찬 의원도 마찬가지다. 그가 일한 진보정당은 가장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의 편에 섰던 정당이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부자들만 대우받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의 인간다움을 지켜주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촌철살인의 시대비평과 통찰력은 보수적인 사람들의 고개도 끄덕이게 만드는 깊은 예지가 있었다. 그러던 그가 4천만 원을 받은 것 때문에 결국 자기의 일생이 부정될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아니 딴 사람은 몰라도 어찌 그 사람이 그런 부정한 돈을 받았단 말인가!’ 사람들이 탄식했는데, 바로 그게 인간이다.

두 사람의 저명인사에 관한 안 좋은 예를 들었지만, 사람 속에는 누구나 두 길이 있다. 내 안에 두 길이 상존한다. 아무리 경건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고, 말과 행동을 절제되게 하여 존경받는 사람이라 해도 그 안에 두 길이 있다.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의 마음에도 죄가 엎드려 있다. 육체의 길과 영의 길, 죄의 길과 은혜의 길, 불의의 길과 의의 길이다. 오래 믿은 신앙의 사람도 그 안에 두 길이 있다. 존경받는 성직자도 그 안에 두 길이 있다. 칭찬받고 신임받는 주의 종들, 거듭나고 성화된 사람들에게도 두 길이 있다. 바로 에서의 길과 야곱의 길이다. 정말 놀라운 것은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별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너무 쉽게 넘어진다. 너무 금방 넘어진다. 성적인 죄, 돈의 유혹이 오래 쌓아온 명성과 성화의 습관도 금방 불태워 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도 매일 새롭게 복음은 기독교인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우리는 지금 선택하고 내일 책임져야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보여준 신앙의 계보를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광야의 야만인 에돔 족속이 될 것이냐? 지금 내 안에 있는 야곱을 키워갈 것이냐, 에서의 길로 가버릴 것이냐? 내가 지금 하는 행동, 지금 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깊이 돌아보라!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라. 한 어머니에게서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듯이 우리 인생은 다르다. 차이와 차별이 있다. 너무 못 받아들여서 괴로워하지 말고, 그럼에도 우리를 약속의 계보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라. 인생은 각양각색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리브가와 이삭의 쌍둥이 아들처럼 그 뱃속에 정의와 본능이라는 두 자손을 품고 있다. 거듭난 사람도 마찬가지다.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윤리도덕으로 쉽게 결론을 내리고 나는 상관없는 것으로 피해간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게 다가온 쾌락이 행복을 주고, 내게 주어진 유혹이 이익을 줄지라도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야곱도 약했다.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였다. 아무쪼록 우리는 많은 유혹에 매일 쉽게 미혹되지만, 결국 야곱의 길로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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