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0-0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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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시139:1-12. 23-24 |
설교제목 | 왜 악과 고난이 존재하는가? |
왜 악과 고난이 존재하는가?
시139:1-12, 23-24
2020년 7월 19일 [성령강림후 일곱째주일]
리 스트로벨이 쓴 <The Case for Faith>(믿음사건)이라는 책의 초반부에 찰스 템플톤이라는 사람과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찰스 템플톤은 그 유명한 빌리 그래함의 파트너였다. 열다섯 살에 기독교에 귀의한 이후 그는 빌리 그래함을 만났고, 그의 복음전도운동에 파트너로 참여한다. 그의 열정적인 설교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일부는 그가 빌리 그래함을 능가할 것이라는 예견도 했다. 교회를 세워 12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사역을 그만두고 신앙을 저버리고 불가지론자- 모르겠다는 것이다-가 되었다.
그 인터뷰에서 찰스 템플톤은 그가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라이프지에 실린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비가 오지 않아 먹을 것이 없어 죽게 된 아이를 안고 울고 있는 한 어머니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았을 때 찰스 템플톤은 “사랑의 하나님이 있다면 이럴 수가 없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단지 비가 내리는 것인데, 왜 비를 내려주시지 않는가?”라며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의 의심은 커져갔다. 찰스 템플톤은 빌리 그래함에게도 그의 신앙에 대해 도전해서, 전도활동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빌리 그래함은 “내가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으로 믿고 인정하겠다.”라는 고백으로 신앙으로 돌아왔다. 이에 대해 찰스 템플톤은 “이성적인 자살”이라고 하며 모든 활동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는 무신론자는 아니라고 한다. 그보다는 “세상에 하나님이 있다고 믿을만한 증거는 없다”고 하며 ‘모르겠다’는 불가지론에 빠졌다. 그는 이성과 신앙은 같이 할 수 없다, 기독교에는 이성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것들이 너무 많다고 하였다. 정작 찰스 템플턴은 예수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는 “예수는 실존했던 모든 인물 중 가장 존귀한 인물이다.”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립다(I miss him).”라고 고백한다. 그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을 떠나게 된 것은 악과 고난의 현실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그런 악과 고난이 실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죄 없는 자들의 그런 고난을 두고 보시느냐 하는 점이다.
오늘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대한 지식과 돌보심을 신뢰하는 노래이다. 1-6절, 내가 어디 있든지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돌보신다. 하나님은 나의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생각을 밝히 아시며 내 앞뒤를 둘러싸시고 살피신다. 7-12절, 하늘에 올라가도, 땅끝에 가 있어도, 바다 끝에 거주해도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실 것이다. 흑암이 나를 덮고 모든 빛이 밤이 되리라 해도, 주 앞에서는 밤이 낮과 같이 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가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다! 시인은 이렇게 존재가 충만한 하나님께 인도하심을 간청한다. 23-24절,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뢰를 고백한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변함없이 곁에서 돌봐주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신앙고백이다.
하나님은 완벽한 세상을 만드실 수 있는데 왜 코로나19와 같은 악과 고통의 현실을 존재하도록 두시는가? 사람들은 말한다, 영원히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큼 세상은 이번 고난으로 불가역적으로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질병의 크기가 세계적이고, 또 그 영향이 긴 시간 동안 미칠 것이며, 질병과 바이러스 자체가 근원적으로 완전히 뿌리뽑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그토록 정보를 공유하면서 방역과 치료에 모든 의료기술과 경제력을 쏟아붓고 있는데도, 현재 세계적으로는 1400만 명 정도의 확진자가 생겼고, 사망자가 60만에 육박하고 있다. 나라별로는 미국이 370만을 넘어서고 있고, 브라질이 200만, 인도가 100만을 넘어섰으며, 러시아 75만, 페루 35만 순으로 환자가 늘고 있다. 미국의 사망자가 14만 명을 넘어섰고, 브라질 7만 6천, 영국 4만 5천을 넘어섰다. 전파속도가 빨라지며 앞으로 1년 이상 장기적 유행이 불가피할 것이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요 세계 3위의 부자라고 알려진 빌게이츠는 5년 전에 어느 자리에서 마치 지금의 이 코로나 사태를 예언하는 듯한 강연을 했다. 곧 인류를 위협할 엄청난 재앙이 나타날지 모르는데 그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바이러스일 것이다, 바이러스가 수천만의 사람을 희생시킬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에볼라 바이러스가 아프리카에 발생하여 만 명 정도의 희생자를 내고 사라졌을 때, 빌게이츠 같은 사람은 이 현상을 보고 교훈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아프리카의 세 나라 시골을 중심으로 발생해서 의료진들의 노력으로 퇴치했으나 앞으로는 훨씬 크고 강력한 바이러스 전염이 세계적으로 전염될지 모르니 잘 대비해야 한다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100년 전에 대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처럼 강력한 독감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1918년 독감은 100년 전에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창궐하여 3천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세계인구 19억 때 5억 명 가량이 감염되어서 세계인 네 명 중에 한 명이 감염되었고, 세계인구 2%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 세계가 뒤숭숭할 때 일어났는데, 전쟁 때보다 2배 이상의 인구가 희생되었다. 전쟁 말기에 군부대와 야전병원에서 감염이 진행되고, 군인들이 자국으로 돌아가서 국민들에게까지 전염시켰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무오년 독감이라 불렀던 이 독감으로 인구 절반이 앓았고, 14만 명이나 사망한 사건이다. 우리는 질병 자체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처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전염병이 왜 일어나는지, 또 어떤 마음과 사상으로 세계가 대처해야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지금 얼마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염되고 피해를 줄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19는 하나님이 인간을 징벌하는 것일까? 그런 면이 조금은 있다. 역사와 세계를 깊이 바라보는 이들은 한결같이 이런 상황을 예견해왔다. 핵무기와 기후, 식량, 전염병 중에 어떤 것이 터질 것 같다고, 때가 가깝다고 말했다.
그동안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과 삶의 조건을 잘 사용하지 못하고 함부로 다루어 왔다. 1940년에는 지구 14%를 인간이 점유하고 살았다. 그러던 것이 2000년에 이르면 인간이 지구의 77%를 차지하고 산다. 도시문명과 기술발전이 온 지구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그러다보니 동물이 살던 곳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 동물들은 사람 때문에 깊은 정글로 밀려 들어가게 되었고, 많은 동물과 식물이 그 사이에 멸종하였다. 자연을 제일 괴롭히는 당사자가 바로 사람이 된 것이다.
동물이 살던 곳에 인간이 들어와 살게 되니까, 동물의 몸에 기생하였던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접촉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 미생물들도 살아야 하니까... 이제 인간은 동물들의 박테리아 바이러스와 접촉하여 같이 살 수밖에 없다. 지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들에게 병을 주고 폐를 상하게 하여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설명하라는 요구가 생긴다. 하나님의 심판이 아닌가?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하나님이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불러 일으킨 결과가 지금 이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인간은 자기들이 불편하고 자기들이 질병으로 고통받고 죽어가니까, 하나님 탓을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 아니면 ‘이런 질병과 고통이 있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고 뭐고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런 현상을 그냥 두고 보실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그러나 한편으로 코로나 방역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우리는 진지하게 왜 이런 바이러스가 우리 삶을 위협하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전세계 전염병 대유행이 저절로 우연히 생겨났다고 보지 못하겠다. 인간들의 행위의 결과이다! 그동안 우리는 지구와 자연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너무 함부로 사용해왔다. 과한 소비로 쓰레기를 양산하고 편리함만을 추구하여 함부로 자연을 약탈했다.
잘 사는 나라일수록 엄청난 자연 자원을 소비했다. 기름과 전기 에너지를 매일 엄청나게 사용하니 공기가 오염되어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고 기온이 올라가 온갖 기후문제가 생겼다. 물을 정말 ‘물쓰듯’ 써서 엄청나게 오염시켰다. 서울에서 쓰는 물이 흐르는 한강 하류 김포평야에서는 물이 오염되어 논과 개울에 살던 참게나 우렁이 같은 수중생물들을 더는 볼 수 없다고 한다. 가난한 삶을 살며 최소한의 것으로 살던 나라들의 백성들은 큰 잘못이 없지만, 질병이 퍼질 경우 그들의 피해가 더 극심한 것은 아이러니이다!
불신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할 때 주로 말하는 것이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악과 고통이 이토록 세상에 많으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세상에 이렇게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악을 만드셨나? 그러면 하나님이 악의 근원이란 황당한 주장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본질상 거룩하고 공의로운 분이라는 말과 맞지 않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악을 만들거나 악의 기원이 되실 수 없다. 그럼 하나님이 악을 만드시지 않으셨다면 악은 어디서 온 것인가?
왜 세상에 있는 악과 고통을 하나님이 빨리 없애시지 않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악을 없애고 즉각적인 심판을 실행하실 수 있는데도 왜 빨리 없애시지 않을까? 사람들은 몇 가지 이유를 말한다(박명룡,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목회와신학 20-6). 첫째,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을 허용함으로써 인간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신다. 때때로 악과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이 하나님을 만나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은 그 악과 고통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진정한 유익을 주신다. 하나님은 지금 코로나를 보내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스타일을 바꾸라고 요구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반드시 악을 선으로 바꾸실 것이므로 잠깐만 악과 고통을 허용하신다. 마침내 하나님은 악을 더 큰 선으로 바꾸신다. 십자가의 최악을 이용하여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다. 셋째, 고통의 시간은 우리 신앙을 성숙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이 된다. 어린아이가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주지 않아도 결국은 잘 걸을 수 있도록 성숙해지지 않는가! 환난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넷째, 재해를 당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일시적으로 고통을 허용하신다. 코로나19도 불완전한 세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고난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면 악을 선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로마제국에 두 차례 극심한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주후 165년과 두 번째로 주후 251년에 역병이 발생했을 때도, 일반인들은 죽기도 전에 환자들을 거리에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런데 유일하게 기독교인들이 시신들을 매장해주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돌봐주었다 한다. 믿음의 선배들은 자기도 전염병에 감염되어 죽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목숨 걸고 불신자들을 돌보아주었다. 그 결과 전염병 유행이 끝나고 살아남은 비신자들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저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저들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어보자. 나도 교회에 나가야겠다.’ 실제 그 결과 350년 경에 로마 제국 전체 인구 절반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바벨론 포로기에 나라는 망했고 백성들은 흩어졌다. 그런데 포로잡힌 이스라엘은 성전을 잃어버리고 고향을 떠나왔으나 오히려 나그네 된 땅에서 말씀을 되찾았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말씀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말씀대로 사는 삶에 최선을 기울였던 시기가 포로시기였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하시디즘’이라는 유대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때 오래된 말씀이 정리되고 다시 그들의 생활 속으로 돌아와서 실천되었다. 그러니까 나라가 망한 비극과 포로시기의 고달픈 생활이 사실은 이스라엘에게는 축복의 기회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난과 시련의 때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믿음을 잃는 사람들과 같이 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다가가며 은혜를 따라 사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다. 바벨론이 망하고 메데가 건국되어 다리오왕이 자기의 왕권을 견고히 하려고 할 때, 그들 입장에서는 다른 신이었던 여호와 하나님께 매일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스런 행위였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목숨 걸고 기도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아니나 다를까 메데의 무리들이 다리오왕에게 일러바친다. ‘그들이 왕 앞에서 말하여 이르되 왕이여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 다니엘이 왕과 왕의 도장이 찍힌 금령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나이다 하니.’(6:13) 포로잡힌 때 잡혀간 땅에서 그는 매일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위험을 가져다 줄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하는 창을 닫지 아니하였다.
왜 악과 고난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고난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이때야말로 기도할 때이다. 이때야말로 신비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찾을 때이다. 코로나19의 고통이 온 세상을 휩쓸 때 하나님은 제대로 된 믿음을 찾고 계신다. 오직 하나님만을 찾으며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다. 이때 고통을 주신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돌아볼 때다. 과연 우리는 바로 살아왔는가? 우리의 믿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었나? 오랜 순교자들의 헌신과 예배자들의 진정을 생각해볼 때 우리의 교회생활과 예배는 부끄럽지 않았나?
어거스틴은 악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라는 것은 선의 부재라고 파악한다. 그의 유명한 말, “Whatever is is good.”이란 말을 들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선하다. 그러므로 악은 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둠은 빛의 부재현상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결여된 곳에 악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본래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매우 좋았다.” ‘토브 메오드~!’ 영어로 “Very good!”을 계속 외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자 선으로 가득찼다.
왜 이 세상에 악이 있고 고통이 계속되는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성도의 바른 삶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코로나19 펜데믹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 삶에 지혜를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로 서게 하려고 고난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미치도록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아픔 속에서 우리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시려고 코로나의 고통으로 인류를 깨우치신다고 믿는다.
비둘기는 사람과는 달리 안구를 움직이는 근육이 발달하지 않아 이동하면서 안구를 움직일 수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걷거나 움직이면서도 특정 대상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우리 몸이 움직임을 감지하고 눈근육을 움직여 시야를 재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둘기는 이동하는 과정에서 초점이 맞지 않아 시야가 흐려진다. 그래서 비둘기는 조금 가다 시야를 조정하고, 조금 가다가 다시 눈의 초점을 맞추면서 걸어간다. 그래서 비둘기 걸음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비둘기와는 달리 가면서도 잘 본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눈은 멈추어서서 시야를 조정할 시간과 때가 필요하다. 지금은 비둘기가 서서 눈의 초점을 맞추듯이 이 고난과 시련의 코로나 상황을 맞이하여 스스로를 돌아보아 시력조정을 할 때이다. 먼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인간세계는 무엇이 잘못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왜 코로나의 고통이 우리에게 왔는가? 이제 인류는 하나님 앞 바른길로 돌아와야 한다! 다음 주일은 회복주일이다. 우리 친구와 이웃들을 주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자! 우리가 눈을 떠 바로 선다면 이 고통과 시련의 코로나 재앙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큰 축복과 유익의 시간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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