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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순종 (요나3:1-5) [2021년 1월 17일, 주현절 둘째주일]
2021-01-20 10:29:50
박신진 목사
조회수   348
설교일 2021-01-17
설교말씀 요나3:1-5
설교제목 회개와 순종

회개와 순종

요나3:1-5

2021117[주현절 둘째주일]

 

누구 소개를 받아서 중국 드라마를 보았다. <겨우 서른>이라는 드라마인데, 중국의 대도시 샹하이에서 현대화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서른 살의 세 여성들이 겪는 이야기를 재미있고 활기있게 그리고 있다. 중국이 이렇게 변하고 있구나 하는 것과, 사람들은 어느 나라나 똑같이 사랑하고 헤어지고 결혼하고 직장생활을 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켰다. 여기서 특별한 점은 사회주의 중국이 자본주의화되면서 점점 개인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는 유사 이래 어느 때보다 개인이 존중되는 시대이다. 우리 사회도 정치와 경제의 발전과정에서 제일 눈에 띠는 것이 개인 권리의 발전이다. 절대 자기가 무시되거나 포기되지 않아도 되는 사회로 발전하고 있다. 여자들이 결혼했다고 희생하거나, 학생이라고 선생님이 함부로 하지 못한다. 다 자기 권리와 자격을 말하고, 누구라도 여기에 해를 입힐 때는 문제를 삼을 수 있다. 직장에서도 아무리 아래 직원이라도 함부로 다룰 수 없다. 그랬다가는 노조에서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자기 목소리들이 너무 커져서 문제가 많이 생긴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한번 식사 메뉴를 정하려 해도 아주 힘들 때가 있다. 가정에서도 식구들이 각자 주장이 있고 개성이 강하여 화합하는 게 쉽지 않다. 어떤 단체나 교회에서도 자기 목소리들이 너무 크다보니 예전처럼 말 한마디에 화합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자기 권리를 존중하는 것과 함께 자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화합시키는 것이 정말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자녀들에게 자기를 주장하도록 가르치는데, 앞으로는 포기할 줄 아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원만하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끼리의 관계에서는 자기를 포기한다는 것이 더욱 힘들다. 더욱이 잘못된 사람이나 남을 배려해주지 않고 힘들게 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꺾고 매사에 포기하면서 나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때로는 불의 앞에서 참기만 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믿음의 내용이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회개이고, 신앙의 길은 회개함으로써만 거듭남과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늘은 요나를 통하여 자기를 꺾고 하나님께 따르는 믿음의 모습을 배우도록 하자.

 

요나서는 회개와 순종에 관한 책이다. 아주 오래된 짧은 이야기이지만, 강력한 영향을 주는 책이다. 회개가 너무 필요한데 하지 못하고, 순종은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데도, 자기 주장과 자기 이익 실현에 능숙한 현대인들은 회개와 순종을 실천하지 않는다.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도망부터 가려고 하였다. 자기 입장, 자기 바람을 앞세우다보니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없었다. 니느웨로 가라 하셨으나, 그는 니느웨 반대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요나는 자기 주장과 불순종의 아이콘이었다. 현대인 같았다. 하나님의 뜻은 니느웨로 가서 그곳 백성이 심판 앞에 놓여있다는 것을 전하라는 것이다. 니느웨는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다. 앗시리아는 호전적인 나라였고 가혹한 통치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제국이다. 유대인들이 니느웨에 얼마나 반감을 가졌는지 예언서 나훔은 얘기하고 있다. 얼마나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가기를 힘들어 했는지! 그는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탔지만, 죽을 고생을 한 끝에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늘 본문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큰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낸 후에(2:10), “주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했다.”(3:1) 그리고 요나는 이번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굉장히 큰 도시로서 돌아다니는 데 사흘이나 걸리는 곳이었다(3:3). 하지만 역사적으로 니느웨 자체는 사실 그렇게 크지 않았다. 이런 묘사는 그 도시의 막강한 힘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문학적 과장법일 것이다.

어쨌든 요나는 그 원수같은 도시 니느웨로 가기는 싫었다. 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이 임하고 풍랑이 일어나 배에서 던져짐을 당하고, 물고기 뱃속에서 죽을 뻔하다 살아나니 요나는 할 수 없이 일어나 니느웨로 갔다. 요나는 그곳에서 하기 싫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자기는 싫지만, 주님의 말씀이라면 따라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행동인데, 요나는 할 수 없이 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 뜻에 순종했다. 그런데 성서는 이런 믿음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간다.

다 자기 마음이 원해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감정은 늘 육신의 안일과 감각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기 감정대로 하다가는 대부분 게으르고 위험하고 파괴적인 생활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마음은 죄악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의 판단력도 사실은 공정하지 못하다. 자기가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이치에 맞게 생각한다고 하지만, 자기 입장이나 자기 이익에 맞게 생각할 때가 많다. 화장실 갈 때 생각과 화장실 갔다 올 때 생각이 다르다! 그러기에 자기 생각을 너무 강하게 해서 마음을 닫아놓고 사는 사람들은 대단히 위험하다.

회개와 순종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열려있는 자세를 말한다. 교회와 성도들 가운데 오히려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 많다. 남에게 마음과 생각을 닫아놓고 산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한없이 열려있어서 그분이 하라실 때 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을 열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이다. 회개함으로 자기의 잘못된 길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아가는 사람! 순종함으로 제 뜻대로 살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 이런 사람을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에게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인생을 복되게 살 가능성이 많다. 더구나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고집이나 입장을 세우지 않고 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때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임하였고,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난 요나는 아주 싫었던 자기의 원래 감정과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니느웨에 말씀을 전하였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겨우 다섯 개의 히브리 단어로 이뤄져 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요나의 입에 담아주신 이 간결한 메시지는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해외 선교활동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이 말씀을 전했을 때 도시 전체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즉시 회개했다. 사십일이 지나면 불로 멸망하리라는 예언자의 경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니느웨 사람들은 놀라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가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금식하였다. 그들이 모든 나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섰으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던 생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내 마음대로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변화되는 인간개조 공장이다. 돌아보라! 바로 우리들 가운데 그런 변화가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교회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자기 마음대로 살던 생활에서 하나님 뜻대로 사는 생활로 바뀌는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는 종교란 자기 중심주의의 극복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을 의식하고 자신에게 애착을 갖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의식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나의 뜻, 곧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를 버린다는 뜻이다. 요즘 기독교가 그러질 못해서 사회의 지탄을 받고 성령을 근심케 하고 있다. 정말 창피하다! 나는 어떠한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자리, 가는 곳마다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남을 배려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지 않겠는가!

독일 경건주의자 에크하르트는 완전한 존재에 이른다는 것은 나 중심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교훈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회개한 것처럼, 우리 시대 돈을 숭상하고 쾌락만을 추구하는 병든 이기주의의 사람들이 주의 말씀 앞에서 변화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성실한 순종은 오늘날 생각처럼 쉽지 않다. 하나님 뜻대로 철저히 순종하려고 하면 이런 문제들을 느끼게 된다: -남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이익보다 남들의 이익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순종은 우리를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땅으로 보낸다. -순종적인 태도로 사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억울해도 참아야 할 때가 있다. 오른빰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야 하는 경우. -우리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요청받는다. -많은 손해를 보거나 바보처럼 번번이 이용당해야 할 때가 있다.

유대인의 지혜를 보여주는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시냇물 위로 놓인 외나무다리를 한 여인이 걷게 되었다. 그런데 다리가 금방 무너질 것 같았다. 길게 심호흡을 해보았지만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인은 걸음을 멈추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널 수 있게 도와주시면 전 재산을 바쳐 당신의 사업에 쓰겠습니다.”

다리 중간쯤 이르렀을 때, 여인은 이제 절반이나 왔는데 전 재산을 바치는 것은 너무 억울해.’ 하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인은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이 다리를 건너게 되면 저는 땡전 한푼 없는 알거지가 됩니다. 하나님, 제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시겠죠? 제가 재산의 절반만 바쳐도 당신께서는 이해하실 수 있겠죠? 그것도 저에게는 엄청나게 큰 것이랍니다.”

다리를 거의 건너간 여인은 또다시 마음이 달라졌다. “하나님, 재산의 반을 바친다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요? 이 다리는 별로 위험하지도 않잖아요. 하나님! 딱 잘라 10만원만 헌금해도 이해하실 수 있죠?” 바로 그때, 다리의 마지막 부분이 심하게 흔들리며 여인은 순간적으로 몸의 중심을 잃었다. 다급해진 여인은 얼른 고쳐서 기도했다. “하나님! 맨 나중에 제가 지껄인 말은 농담이었습니다.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시다니 너무 하십니다.”

 

순종은 어렵다. 믿음 좋던 사울도 순종하지 못해서 사무엘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에서 멀어져 갔다. 순종하던 아브라함도 때로는 시험에 빠져 훗날까지 악영향을 주게 되는 잘못을 저질렀던 적이 있다. 그러나 순종에는 보답이 따른다. 요나의 순종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사가 따랐고, 니느웨의 구원이 있었다.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참된 축복과 내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다.

순종하기 싫으니까 억지로 따라오는 것처럼 하면서 말로 다 불순종을 풀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불순종의 말을 해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도 불순종이다. 교회가 합당한 믿음의 방향을 제시했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는 이들은 복이 있다. 그런데 내놓고 불순종한다고 하기는 싫으면서도 실제로는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말로 뒤에서 엉뚱한 얘기들을 한다. 비대면예배를 드리고 속장님들께 출석보고를 왜 하라 하겠는가?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지 못하니까, 하나님께 보이는 간접적인 행동이 아닌가? 그래서 출석확인은 예배의 한부분이라고 하였고... 그런데 왜 출석 보고 하라고 하느냐면서 불평이 많은 것은 불순종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만져주시기 바란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행한다 하면서도 끝까지 순종하지 못했던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삼상15:22-23)

 

미국에는 주마다 자기 주를 상징하는 로고가 있다. 펜실베니아주는 이번 미국대통령 선거 때 바이든과 트럼프 사이에서 승자를 결정하는 주 중에 하나였는데, 그 주의 로고는 갈매기다. 펜실베니아 사람들은 갈매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왜 갈매기가 로고가 되었나 하면, 그 주에 정착한 청교도들, 아미시, 메노나이트, 퀘이커, 다 아주 지독한 보수주의자들로서 그들이 펜실베니아 주로 몰려왔는데, 그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넓은 땅에 정착하여 주로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어느해 가을에 수확을 앞두고 있는 들판에 메뚜기 떼가 몰려왔다. 큰 농토에 메뚜기떼가 구름같이 몰려와서 지나가고 나면 농작물이 남는 것이 없다. 무서운 메뚜기떼가 몰려온 것이다. 그러자 동네의 가장 존경받는 나이든 목사님이 교회에 나가 종을 쳤다. 믿음 좋은 펜실베니아 교인들이 교회 종이 울리니까 교회로 다 몰려왔다. “지금 메뚜기 떼가 날아와서 1년 농사를 다 날려먹게 생겼다.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 모두 모여서 함께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목사님 말씀 한마디에 하던 일을 다 멈추고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유를 달지 않고, 문제를 삼지 않고 무조건 목사님 말씀에 순종했던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더니 갑자기 새소리가 어디선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새인가 봤더니 갈매기였다. 갈매기가 수만 마리, 수십만 마리가 날아오더니 메뚜기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일시에 메뚜기는 갈매기 밥이 되었다. 그리고 갈매기는 메뚜기를 잡아먹고 그곳에 배설을 했다. 그 배설물이 비료가 되었다. 그해 농사는 메뚜기로 망쳐버릴 줄 알았는데, 펜실베니아 교인들이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갈매기를 보내주셔서 메뚜기를 다 잡아먹고 비료까지 주게 했더라는 것이다. 무슨 출애굽기 시대 같은 일이 실제 일어났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 펜실베니아 주 사람들은 갈매기 그림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고 다닌다.

 

설교 맨 처음에 얘기했지 않았나?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사람들이 개인주의화, 개성화되었다. 단체로 무얼 해나가기가 힘들어졌다. 오늘날 교인들도 교회마다 자기 고집, 자기 이해관계, 자기 생각, 자기 마음을 내세우느라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삼척제일공동체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순종하라! 회개한 우리들이 순종하며 한해를 시작하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코로나로 지쳐있는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시든 순종하라! 그러면 평안과 축복이 임한다. 여러분의 삶이 다시스에서 니느웨로 가는 요나의 삶과 같이 되기를 축복한다. 요나는 마음까지 완전히 순종하지 못해 나중에 또 시험에 들었지만, 우리는 마음까지 다 순종함으로 모든 가정마다 진정한 평안과 축복에 이르며, 하나님의 구원이 온 땅 위에 전해지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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