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19-0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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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요한3:1-8 |
설교제목 | 거듭남 |
거듭남
요3:1-8
2019년 6월 30일 [성령강림후 셋째주일]
오늘의 설교는 너무 평범한 제목이라 시시하게 여겨지기조차 합니다. 사람들은 거듭남에 대하여 너무 자주 듣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심각한 주제인지를 잊고 삽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교리는 신앙교리의 핵심이요, 우리 믿음과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제가 이 설교 한번으로 그 문제에 대해 충분한 말씀을 드릴 수는 없겠지만, 다시 한 번 거듭남에 대해 도전을 받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역자들은 5월에 참으로 뜻 깊은 세미나에 이틀간 다녀왔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세미나’인데, 1세기 전에 영국 웨스트민스터교회에서 목회하였던 위대한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의 목회와 설교를 배우는 세미나였습니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한마디로 요약해서 ‘Logic on Fire’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불 붙은 논리’라는 말인데요, 뛰어난 설교가였던 로이드 존스는 논리, 교리, 사상이 분명했어요. 그러나 신앙 논리를 어렵게 메마르게 전하지 않고 불을 붙여서 감동적이며 열정적으로 전했던 것입니다.
특히 그는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바로 설 수 있다는 개혁주의 전통 교리를 고수합니다. 그의 설교의 내용과 방법에 감화를 받아서, 사실 로이드 존스에게서 받은 은혜를 좀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세미나에 참가하기 전에 저는 130페이지 정도 되는 작은 책을 하나 읽었는데, 4편의 로이드 존스의 시리즈 설교가 담긴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세미나에 참가한 다음, 저는 여러분에게 죄의 깨달음을 주제로 이미 설교하였고, 오늘은 거듭남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밤에 니고데모라는 한 바리새인의 방문을 받습니다. 흔치 않은 야간 방문입니다. 그 사람은 먼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에 대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이때, 예수께서 느닷없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밤에 찾아 온 사람에게 중요한 주제를 던지신 거죠.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느냐,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않느냐?’하는 의문을 제시하자,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이시기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바람이 불어도 그것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다.’ 하십니다.
거듭남의 교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경말씀인 이 구절은 말 자체는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영으로 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실제, 우리가 거듭나는 것을 놓고 생각할 때는 이것이 단순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이렇게 스스로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거듭났다는 게 무엇입니까?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저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2학기가 되었을 때,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게 무엇일까, 나는 거듭났는가?’ 이 문제가 걸렸습니다. 실제로 내가 거듭난 경험과 확신이 없는 것이었어요. 거듭나지 않은 채로 목사가 되는 길, 신학교를 계속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배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중생, 거듭남, 영어로 born-again’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거듭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을까요? 저는 배고프면 참아도 궁금하면 못 참는 성격이라, 그 때도 친구들을 모아놓고, 기숙사 자체 ‘거듭남 토크세미나’를 여러 번 열었습니다.
우선 짚고 넘어갈 사실은 세상에서 보통 사람들은 거듭남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교양이 있고 안정된 인격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거듭나야 한다는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현대인들 대부분은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본성은 타락하고 부패하여 아무리 노력해도 바르게 될 수 없으니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아니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요? 대단하게 잘 하지는 못해도 큰 문제없이 무난하게 가고 있는데, 왜 다 뒤집어엎으라는 소리를 하느냔 말이요?’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기의 입지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교적 괜찮은데 왜 그래? 이만 하면 어때서?’ 대다수 현대인들은 그렇게 말하고 거듭남의 교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직장인들도, 사업가들도, 남편들도, 아내들도, 모두들 출세하기 위해 경쟁에 몰두하고 있고 생활에 바쁜 중이니, 그들에게는 거듭나라는 말이 무책임한 잠꼬대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일반 사람들에게 거듭남은 죄인의 구원에 대해 말하는 신앙인의 주제일 뿐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가 육으로 태어난 것을 넘어서는 어떤 상태를 전제로 한 것이므로, 우리 삶과 본래적인 육의 요소를 부정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 가운데는 ‘두 번 태어나는 유형(twice-born type)’의 인간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두 번 태어나는 유형은 자기를 성찰하고 살펴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우리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우울하고 내성적인 편이라고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번만 태어나는 유형(once-born type)’의 사람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자기 영혼을 살피는 데는 인색하지만 소위 사회성이 있고 안정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태어나는 유형이든, 두 번 태어나는 유형이든, 기질이 어떻든지, 성향이 어떻든지, 사람의 근본적인 거짓, 위선과 죄의 문제는 그냥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기질이 다르고 성격이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도 거듭남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과 베드로는 성격이 판이하지요, 베드로는 성급하고 열정적인 데 반하여 요한은 차분하고 빈틈이 없는 편입니다. 바울은 또 어떻습니까? 쾌활하고 쉽게 흥분하는 유형이든지, 차분하고 냉담한 유형이든지, 이성적인 사람이거나 감정적인 사람이거나 공통되는 점은 죄의 깊은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으로 거듭남의 유형을 나누기는 합니다. 베드로 유형은 점진적 거듭남의 유형이고, 바울 유형은 급진적 거듭남의 유형입니다. 베드로는 여러 번의 경험과 깎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났고,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결정적 경험 한번으로 완전히 예수를 박해하는 자에서 예수의 전도자로 거듭났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엄청난 다양한 교인들의 유형이 있는데, 그들 모두가 다 죄를 씻고 거듭나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죄인이며,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은혜를 위해서는 모두에게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다만 그 거듭남의 방식과 유형은 천차만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 번연의 얘기를 잠깐 소개합니다. ‘넘치는 은혜(Grace Abounding)’라는 책을 읽어보면, 번연이 회개의 문제를 놓고 장장 18개월이나 고민했으며, 그 기간 동안 앉으나 서나 고민만 하면서 지냈노라고 토로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거듭남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로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하다고 느꼈는지, 한번은 들판의 기러기를 보고 차라리 기러기가 되어 회개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던 때도 있었답니다. 어떤 날은 지옥의 열린 문턱까지 끌려가 지독한 유황 냄새를 맡는 꿈을 꾼 적도 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로이드 존스, 회개, p.46) 사실 저도 번연만큼은 아니지만 신학교 때 1-2년 깊이 고민하였고, 그 결과로 2학년 가을에 하나님께서 “다메섹 도상의 회심 체험”에 준하는 거듭남의 경험을 가지게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람들에게 거듭남의 교리가 부담이 되는 것은 한 마디로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나야 한다는 말을 달가워할 사람은 없습니다. 교만, 자긍심, 자기만족으로 똘똘 뭉쳐진 현대인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항복할 때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거죠!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자존심을 지키다가 멸망 길로 떨어져도 돌아서지 않는 것입니다. ‘죽을 바에는 하나님께 항복하지...’ 그게 이 설교를 하는 저의 심정입니다. 울며 돌아서세요,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존심, 피조물이요 죄인인 내 자존심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입니까!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타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반역하면서 거짓과 위선을 일삼아 그렇지 않은 척 합니다. 범죄한 다윗이 나단선지자로부터 자기 죄를 깨닫고 돌아올 때 다윗이 했던 고백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위하시오니.”(시51:6상) 중심이 진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더러워졌습니다. 주님은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적절히 지적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죄를 짓고 원치 않는 잘못된 삶을 사는 것은 잘못된 환경이나, 잘못된 만남이나, 잘못된 일 때문이라고, 다른 사람이나 바깥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습니다. ‘아 그때 그 친구들과 어울린 것이 잘못이야, 술이 문제라니까, 아니 그런 취미생활 때문에 다 망쳤잖아! 이성과의 잘못된 만남 때문에, 노름 때문에, 게임 때문에!’ 여러분, 그 사람이, 그 일이, 그 말이, 그 상황이 문제가 아니어요. 내 마음이 문제입니다. 내 본성이 타락되어 있어서 이 모든 일이 틀어진 것입니다.
내 자신의 마음이 비뚤어지고 일그러져 있는 것을 아직도 모른다는 말입니까! 영혼 깊은 곳에 있는 나의 타락과 거짓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직도 위선으로 그것을 합리화하느라 이리도 애쓰고 있습니까? 여러분, 언제까지 가면놀이를 하고 있을 겁니까? 우리는 스스로를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마저 속일 수는 없습니다. 인종을 따라 그 피부를 바꿀 수 없듯이, 얼룩말이 그 얼룩을 없앨 수 없듯이 깊이,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와 타락으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 정결한 심령을 가지도록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거듭나는 비결입니다. 거듭 나야 하겠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낳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만물의 근원이시며, 영원한 아버지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아기는 어머니가 낳을 때 나올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낳으시지만, 우리에게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부패와 타락, 거짓을 버리고 중심이 정결해져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 변명하지 마십시오, 핑계하지 마세요! ‘부패한 나요, 내 죄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쏟아놓아, 죄를 인정하고 깊이 통회할 때, 우리는 거듭남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하늘의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윗 같이 머리가 좋고 용기 있는 사람도 죄 앞에서는 형편없이 무너집니다. 우리 삶에는 어두움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빛이 필요합니다. 하늘의 지혜가 있어야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안 되고 하늘의 빛, 영원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위대한 신앙의 대각성 시대를 살았던 영적 거장들의 삶을 보면, 한결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진리의 빛을 풍성히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내 마음을 비추는 빛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을 변명하기에 급급한 위선적인 자아를 밝히고, 겸손하며 진실하게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마음의 빛이 필요합니다. 성결하게 하는 빛, 죄와 어둠을 밝히는 빛이 필요합니다. 신학생 시절에 저희 부모님은 충남 홍성 면사무소 옆 교회에서 목회하셨는데, 시골에서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이 많이 있었어요. 방학 때, 밤에 어머니와 속회예배를 드리러 갈 때에는 꼭 후레쉬 불빛이 필요했습니다. 어두운 길을 가려면 빛이 없으면 두렵습니다,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 이리 잠을 못 이루며 불안하고 두렵습니까? 누가 뭐라고 한 마디만 해도 두렵고 자신이 없습니까? 진리의 빛을 받지 못하여 어둡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을 물리치는 하늘의 빛을 사모하십시오. 성령께서 내 어둔 마음을 비추어 달라고 날마다 기도하십시오! 거듭나면 진리의 빛이 비취므로 두렵지도 불안하지도 않습니다. / 거듭난 사람은 갈 길을 알고 할 일을 압니다.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소위 인플루엔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가든지 존재감이 없고 소외감을 쉽게 느낍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늘의 빛이 비취고 지혜의 샘이 솟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기쁜 영향력, 지혜로운 영향력,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플루엔서가 됩니다. 내 빛을 비추는 게 아니고, 하늘의 빛을 전하는 겁니다.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거듭나야 새로운 성품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기도했던 다윗처럼 우리가 거듭나면 정직한 영혼이 됩니다. 다윗이 범죄한 것은 그가 왕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밧세바의 미모 때문일까요? 아니면 고대의 왕들이 전쟁 때 후방에 있으면서 초조해서 벌인 심리적인 실수일까요? 이 모든 말들은 호사가들의 변명일 뿐이고, 정말 중요한 이유는 그에게 정직하고 바른 마음이 없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성품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이고 흉악한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성품이 변화되는 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이것은 좀처럼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와 계신 것,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것, 이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했던 간절한 소원은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였습니다. 성품이 새로워지는 것이었지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갈2:20).
예수께서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어,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하시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굳게 서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하나님께서 죄를 속량, 값을 주어 사해주심으로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그런 죄를 자꾸 저지르게 만드는 성품 자체를 바꾸어 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거듭남으로 성품이 반듯하게 거룩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는 주님이 그 풍성하신 은혜로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다 사하셨으니, 이제는 바르게 잘 살아야 한다는 정도로 복음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살아야 한다’라는 율법, 의무의 차원을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 심령이 병들고 죽어가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듭나서 성품이 달라졌다! 이제는 악을 행하는 성품이 아니고 거룩과 의를 행하는 성품이 되었다. 이제는 거듭났다! 그러므로 애쓰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성품이 달라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르게 살게 되었다.’ 이것이 거듭남의 복음입니다. 성품이 거듭나서 이미 달라졌기를 축복합니다. 거듭나서 새 존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한때 대학생선교회(CCC)나 다른 보수적인 선교단체, 네비게이토 같은 데에서 “거듭났습니까?” 믿는 사람들에게 계속 물었던 적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큰 도전이 되었고 도움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묻습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거듭나서 타락된 본성이 물러갔습니까? 거듭나서 하늘의 빛이 비추입니까? 거듭나서 성품이 새로워졌습니까?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주여, 거듭남의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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