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18-1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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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사41:8-14 |
설교제목 | 두려움 |
두려움
사41:8-14
2018년 11월 4일 [성령강림후 스물넷째주일]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라는 무슨 물건 같아서 사람들이 옆에 두고도 무엇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라가 갑자기 움직이면 깜짝 놀라게 되죠. 한번 자라보고 놀란 사람이 솥뚜껑을 보면 자라 같은 느낌이 들어 놀란다는 얘기입니다. 두려움이 어떤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속담입니다. 두려움은 사람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겨서, 모든 행동과 생활에 영향을 줍니다. 두려움을 가지면 여러 가지 행동에 제약을 받고 무기력에 빠지기 쉽습니다. 두려움에 영향을 받게 되면 이유 없이 불안하여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타다가 놀라서 그 비슷한 것만 보면 가슴이 떨리고 식은땀이 나는 한 사람을 알고 있는데 바로 우리 집사람입니다. 오래 전에 아이들이랑 캐리비언베이라는 물놀이동산에 놀러갔습니다. 엄청나게 넓은 놀이시설이 다 물놀이하는 곳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수영장, 파도풀장, 물 미끄럼틀, 사우나 비슷한 시설, 물 쏟아지는 시설, 도랑처럼 물이 흘러 내려가는 곳 등. 그런데 엄청나게 크고 동굴처럼 쑥 빠져 들어가는 물 미끄럼틀이 있었는데, 저는 아내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려고 억지로 밀어서 타게 한 겁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겁에 질려서 다음에 그 비슷한 곳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두려움이 지배했기 때문이죠.
언젠가 호주에 가서 그 유명하다는 모래언덕에 갔습니다. 지구를 거의 반 바퀴 돌아가서 모래바람 날리는 언덕에서 썰매를 타는데,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아이들도 재미있어 하는 겁니다. 그런데 무서워서 그걸 못 타는 두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 집사람이었어요. 결국 우리 부부는 그날 싸우고 말았어요. “아니,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한 번 타보지!” 하는 내 성화를 견디지 못하여 결국 내 앞에 타고 내려가는데, 정말 벌벌 떨더니 기어코 중간에 내리고 만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나든지! 이 모든 것은 그 징그러운 두려움 때문입니다.
보통 두려움은 여러 가지 범주로 나뉩니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다섯 가지 두려움을 말해왔습니다. 첫째는, 생활의 두려움입니다. 하루하루 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요. 어느 날 갑자기 생활하는 것 자체가 두렵고 벅차고 자신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둘째는, 명예를 잃을 두려움입니다. 나쁜 소문으로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받거나, 자신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질 것을 엄청나게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여 모두에게 잘 보이려 애를 씁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이라.’ 합니다.
셋째는, 나쁜 가르침 즉 악도(惡道)에 떨어질 두려움입니다. 사람들에게 속아서 미혹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불신자나 타종교인 들이 선뜻 말씀을 받지 못하는 것은 기독교가 나쁜 가르침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는 두려움을 없애 줄 필요가 있습니다. 전하는 사람이 속이지 않는 착한 사람이라는 진정성을 보여주면 됩니다. 넷째는, 죽음의 두려움입니다. 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두려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언젠가는 죽는데,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인간에게는 있습니다. 큰 사고를 만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 나섬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대인공포입니다. 발표불안, 이성불안, 손 떨림, 대화불안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잘생기고 조건도 좋은데, 이성을 사귀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도 결혼하지 못합니다. 이성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 불안이 있어서 평소 같지 않게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고 머리가 하예져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두려움은 우리 생활에 폭넓게 퍼져있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만약 두려움을 이기고 완전히 해결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대단한 인물이 틀림없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때문에 아무리 머리가 나쁘거나 힘이 약해도 큰일을 할 수 있고, 자기 생활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서는 두려움을 이기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실은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위협에 맞서 싸우고 있으나 그들 중 대다수는 근본 원인이 아닌 결과적 현상만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어서 두려움과의 싸움에서 실패합니다.
값비싼 가구로 치장하였으나 지붕이 없는 집을 상상해 봅시다. 큰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면 집안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물에 젖어 못쓰게 됩니다. 그래서 손상된 가구와 옷가지와 마룻바닥을 치우고 뜯어내는 데 며칠이 걸립니다. 그러고 나서 몽땅 새것으로 교체하는 일이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복구 작업이 마무리될 즈음, 또 한 차례의 폭우가 내려 새로 장만하고 설치한 것들이 다시 모두 비에 젖어 버립니다. 실망한 집주인은 지루하고 힘든 복구 작업을 재개합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또 비가 내려 모든 것을 손상시키고, 그의 힘을 빠지게 하고, 재산을 축내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결국 낙담한 주인은 복구 작업을 중단하고 그 모든 고통들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체념해 버리겠지요.
물론 이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아마 당신은 왜 집주인이 지붕을 얹고 나서 복구 작업을 하지 않는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는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두려움이라는 위협에 맞서 싸우고 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들은 위협하는 세력은 쳐부수지 않고 실망과 혼란, 낙심과 절망과 같은 결과적 현상만을 해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두려움이라는 적과 싸울 때 어리석게 대처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두려움이 인간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규명하느라 바쁜 상담가 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유를 갈망하기를 주저한 채 두려움의 종노릇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지붕에 구멍이 뚫린 채 비에 젖은 가구가 방치된 집에 살고 있는 주인과 같은 것이죠. 그들은 집안에 외로이 칩거하면서 이제는 아예 복구 작업을 할 생각조차 않습니다. 두려움을 해결하는 데에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맞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회피하는 데 급급합니다.
생활의 두려움이나 사람들의 평판에 대한 두려움, 잘못된 길로 끌려갈까봐 두려워하는 것, 혹은 죽음의 두려움이나 사람 앞에 나서는 두려움을 해결하십시오! 우리에게는 두려움이라는 끈질긴 적이 있으나, 동시에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도 있습니다. 여기 성경이 말하는 두려움을 이기는 길을 함께 발견하기 바랍니다. 두려움이라는 지붕을 고치고 그 안에서 자라는 불안과 실망, 혼란과 열등감, 낙심들을 해결하셔야 합니다! 두려움을 그냥 두고 다른 것을 고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요, 결국은 실패할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두려워말라고 크게 외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무엇을 믿고 이 포로 당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두려워말라고 할까요? 그때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포로 당하였고, 바사와 바벨론에 포로 당하였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살기는 어렵고 죽거나 병든 사람들이 속출하는데, 어찌 두렵지 않습니까? 무엇을 믿고 두려워말라고 하는 겁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당신이 택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벗이라고 하며, 자기 종이라고, 또 좋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 하며 굳세게 하며 붙들어 주리라고 힘 있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으로 붙들고 도와준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야곱의 자손들은 버러지 같아도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거듭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두려워하는 히브리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거침없는 말씀을 여호수아서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워낙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행한 일이 많고, 모세의 지도력과 권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 모세가 죽고 젊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려 할 때 그는 너무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두려워말고 담대하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왜 사람은 두려워합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위협이 커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그 위협이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사실에서 오는 게 아니라, 사실에 대한 내 마음의 태도에서 오는 것입니다. 저는 고소공포증이 있습니다. 높은 데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남보다 더 두렵게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똑같이 중국 태항산 잔교를 걷는데 나는 왜 다리가 떨리고 오금이 저린단 말입니까! 시카고의 시어즈빌딩에서 모든 목사님들이 투명 유리 위에서 버젓이 사진을 찍는데 나는 왜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어 못 찍는단 말입니까! 위험하다면 같이 위험한 것이지요. 나만 위험한 게 아닙니다.
위협 때문에 아니라 위협 앞에 있는 자아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은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보다는 자아와 관계가 있습니다. 두려움은 자신 속에 자아에 대한 집착이 너무 크기 때문에 생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아를 성취하려고 각별하게 애쓸 때 사실은 두려움을 더욱 크게 느낍니다. 시험이나 면접 때 합격하고 싶은 마음이 강할수록 두려움이 커집니다. 자기가 무너질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약해 보이기에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악마는 어떤 환경이나 조건과 작용하여 우리의 자아를 공격하는 근원적인 무기로 두려움을 사용합니다. 우선 자아를 편안하게 내려놓기를 배우십시오! 너무 강한 자아는 끈질긴 두려움의 원인이 됩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 약간의 손해에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 실패할까봐, 사람들이 욕할까봐, 왕따 당할까봐 늘 애쓰는 사람은 두려움을 그만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려움이 삶에 큰 장애가 되고,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되는데도 두려움을 내려놓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십시오. 물에 빠졌을 때 너무 무언가를 꽉 쥐고 살려고 하면 점점 빠져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때는 그냥 힘을 빼고 놓아버리면 둥실 떠오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원숭이 잡는 방법은 특이합니다. 큰 먹이를 멍에 밑에 놓습니다. 원숭이는 처음에는 조심하다가 결국 먹이의 유혹에 빠져 그 먹이를 꽉 쥡니다. 그 순간 멍에가 툭 내려와서 손을 감싸게 됩니다. 만약 원숭이가 그 먹이를 놓아버리면 손이 빠져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숭이는 그 먹이를 놓지 못합니다. 먹이를 손 가득히 잡은 채 손을 빼려고 하니 절대로 빠지지 않습니다. 결국 손을 꽉 쥐고 원숭이는 잡히고 맙니다. 먹이를 잡은 손을 편다면 원숭이는 자유로워질 것이어요. 자아의 집착으로부터 조금씩 여유를 가지십시오. 자기를 버리세요, 그러면 두려움을 이길 것입니다.
사실, 자아를 무너뜨리는 일, 자기를 내려놓는 일은 말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면서도 안 됩니다. 대인공포증 같은 것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신학교 상급반일 때 나는 자존심이 무척 강하고 자신감도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 앞에서 실수할까봐 무척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거나 얘기할 때면 멀쩡하게 잘 하다가도 어떤 때는 이유를 알 수 없게 가끔 무척 두렵고 떨릴 때가 있었어요. 동생은 웃어가며 편안하게 얘기하는데, 나는 할 말은 많아도 숨이 차고 가슴이 떨려 발음이 편안하게 되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무슨 얘기하려면 숨이 차서 헐떡거립니다.
어떻게 하면 자아의 굴레에서 자유를 얻을까요? 어떻게 하면 자기를 걱정하느라 두려워하는 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저는 깊이 생각해보니, 이런 결론을 얻게 되더군요. 자신 안에 자아를 대신할 어떤 존재를 채워야 한다고요. 나를 내려놓고 어떤 존재를 그 자리에 채우면 태산 같은 든든함이 있을 것이라고요. 여기에 누가 들어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면 됩니다! 이것이 요점이어요.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물리칩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자아에 집착을 벗고 스스럼없이 담대할 수 있으려면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됩니다. 인격을 입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모시어 들이세요!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수의 영으로 채우면 됩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의 능력은 우리를 부드럽지만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나를 대신하는 인격이 되게 하세요!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면 무너질 염려가 없어져서 겁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공포가 몰려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사업에 망하고 빈털터리가 되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몸에 병이 들어 고통이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나 실패가 자신을 결코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왜? 예수를 통하여 자신 속에 든든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자아를 대신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되십니다. 자아를 붙들고 있으면, 상처 입을까봐, 잃어버릴까봐, 망신당할까봐, 죽을까봐 너무 두렵고 겁이 납니다. 이 뻥 뚫린 속마음, 우리 내면이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이 되면 빛의 자녀로서 어둠이 결코 없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사41:10,12-13) ‘죽으면 죽으리라!’ 이게 제일 센 겁니다. 우리는 그냥 대책 없이 자기를 놓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가 계셔서 나를 대신 하시니, 정말 ‘강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1942년 어느 날, 길을 가던 피카소가 우연히 버려진 자전거 한 대를 발견합니다. 그는 자전거를 한참 바라보다가 안장과 핸들을 때어내고 안장 위에 핸들을 거꾸로 붙였습니다. 그리고 ‘황소 머리’라는 이름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로부터 50년 후 버려진 자전거의 안장과 핸들로만 만들어진 이 작품은 영국 경매 시장에서 293억 원에 낙찰됩니다. 어떤 인위적인 기술이나 색채도 입힌 것 없이 단지 버려진 쓰레기에 불과한 자전거가 수백억 원 가치의 고가 미술품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버려진 자전거처럼 되었다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늙었다고, 초라해졌다고, 돈이 좀 없다고, 아프다고, 시험에 안 되었다고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두려움을 이기고 최고의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란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 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두려움을 물리치십시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지금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담대히 이기며 나가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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