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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몸을 입으시다 (요한복음 1:12- 14) [2019년 12월 8일, 대림절 둘째주일]
2019-12-08 13:45:55
관리자3
조회수   496
설교일 2019-12-08
설교말씀 요한복음 1:12-14
설교제목 하나님, 몸을 입으시다

하나님, 몸을 입으시다

요한1:12-14

2019128[대림절 둘째주일]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대림절 둘째주일에 거룩의 옷을 입고 성전을 찾아오신 모든 교우들께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대림절을 지나면서, 먼저 이해인 님의 다시 대림절에라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밝고 둥근 해님처럼/ 당신은 그렇게 오시렵니까/ 기다림밖엔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당신은 조용히 사랑의 태양으로/ 뜨시렵니까//

기다릴 줄 몰라 기쁨을 잃어버렸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이제 우리는 기다림의 은혜를 새롭게 고마워합니다/ 기다림은 곧 기도의 시작임을 다시 배웁니다//

마음이 답답한 이들에겐 문이 되어 주시고/ 목마른 이들에겐 구원의 샘이 되시는 주님

절망하는 이들에겐 희망으로/ 슬퍼하는 이들에겐 기쁨으로 오십시오/ 앓는 이들에겐 치유자로/ 갇힌 이들에겐 해방자로 오십시오//

이제 우리의 기다림은/ 잘 익은 포도주의 향기를 내고/ 목관악기의 소리를 냅니다//

어서 오십시오, 주님/ 우리는 아직 온전히 마음을 비우지는 못했으나/ 겸허한 갈망의 기다림 끝에 꼭 당신을 뵙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첫 기다림이며/ 마지막 기다림이신 주님/ 어서 오섭시오//

촛불을 켜는 설레임으로/ 당신을 부르는 우리 마음엔/ 당신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환한 기쁨이 피어오릅니다.’

 

시인은 기다림밖엔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조용히 사랑의 태양으로 뜨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기다릴 줄 몰라 기쁨을 잃어버린 마음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절망엔 희망으로, 슬픔엔 기쁨으로, 앓는 이들에겐 치유자로, 갇힌 이들을 해방하시는 이로 오시라고 주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첫 기다림이며 마지막 기다림이 되십니다. 촛불 켜는 마음으로 설레며 주님을 기다린다고 조용히 시인은 고백합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대림절 둘째주일을 맞이하면서 여러분의 마음가짐은 어떠십니까? 아기 예수님 태어나시던 날, 베들레헴의 여관주인이 급하게나마 정성껏 준비한 말구유를 기억합니다. 몸을 입고 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우리 마음가짐이 그날의 깨끗한 말구유만 같아도 좋겠습니다.

 

1. 하늘을 바라봄

성탄의 계절이면 우리는 동방박사들을 떠올립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고개를 하늘을 향해, 위로 들었습니다. 성탄은 하늘이 우리 곁으로 내려온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별을 보고 인도함을 받은 동방박사들은 먼 곳에서도 남 먼저 아기 예수님을 영접하고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아도 하늘에 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탄을 통해 그 하늘이 우리 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요한 114절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가 사는 곳에 오셨다. 우리는 그 영광을 두 눈으로 보았다.’ 성탄의 의미가 잘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하늘이 땅으로 내려앉았고, 영원이 시간 안으로 들어와 우리가 보는 실제가 되었습니다. 먼 데 계신 하나님은 이제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요! 그 거룩하고 영원하고 위대한 하늘이 비천하고 죄 많고 모순된 땅에 임한 것, 이것이 성탄입니다.

그러기에 성탄을 기다리는 계절엔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영원 절대한 차원을 말합니다. 인간이 항상 꿈꾸지만 스스로 가 닿을 수 없는 세계가 바로 하늘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는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금방 알게 됩니다. 이 목숨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에 묻혀 뒹굴다가 어느날 가버리면 그만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차원을 바라보고 하늘에 잇대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하늘이며 인간은 높은 하늘의 차원을 가져야 함을 일깨워주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한해가 저물어가는 대림의 계절에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믿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 말씀, 그 하나님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 사는 곳으로 오셨습니다! 성육신! 육신이 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불완전하고 작은 자가 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성육신은 그분의 영광이 땅에까지 확대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위엄은 온 세상에 더욱 빛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드디어(!) 땅에까지 몸이 되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놀라운 성육신 앞에 그 밤에 하늘의 천군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 찬송했습니다. 성탄의 밤, 목자들은 몸을 입으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고, 동방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가장 고귀한 예물을 드렸으며, 하늘의 별과 양들까지 하니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던 것입니다.

21세기가 된지 20년째를 맞이하는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셔서, 하늘이 있음으로 땅이 있는 것인데, 지금 땅의 사람들은 하늘을 잃어버렸습니다! 잠자리에서 깨자마자 스마트폰을 켜고, 거리를 다니거나 의자에 앉았을 때, 일을 할 때나 장을 볼 때도 그 작은 폰 모니터에 얼굴을 파묻고 살아갑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별을 우러를 겨를이 없이 살아갑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사는가 의심스럽습니다. 수많은 상업광고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살기 때문에 하루 수천 번씩 무언가를 사라고, 무언가가 좋다고 설득당하는 중입니다. 하늘을 잊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가지니까 기복신앙이 됩니다.

대림절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부름의 나팔소리가 들리는 때입니다. 여러분, 거룩한 전쟁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리십니까? 인간의 번영과 세속의 때가 끝나가고 있다고,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외치는 천사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을 파고드는 대림절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제는 하늘을 바라볼 때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땅에 파묻히고 세속문화에 푹젖어서 죽음과 타락을 노래하는 이 어둠의 세월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땅에 붙은 여러분의 몸을 일으키세요! 땅에 묶여있는 눈을 위로 들어올려야 합니다. 별을 바라보십시오, 영원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사람들로 부름받았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영혼을 울리는 기쁨의 찬양을 부르십시오!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서로 교제하며 기도를 나누는 것, 사랑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기쁘게 희생하는 것이 바로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하는 일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하늘을 보다 메시야 예수를 만났듯이, 이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계절에 하늘을 바라보며 주의 나심을 맞이합시다!!

 

2. 하나님의 하향성

하나님은 본질상 인간의 차원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차원에 계십니다. 그래서 완전히 다르다, 아주 높으시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철학적으로는 절대타자라고도 부릅니다. 우리와는 절대 같을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영어로는 대문자 ‘O’에 정관사를 붙여 ‘the Other’입니다. 고대 한 신학자는 하나님을 최고 본질,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최고 신성, 최고 위대, 최고 미, 최고 불사, 최고 불변, 최고 복락, 최고 영원, 최고 권능, 최고 일자-’(안셀름)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이시기에, 온 세상을 지으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완성하실 분이시기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옛날부터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죽음입니다! 그런데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처럼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향성! 가장 낮아지시기까지 낮아지신 것, 그것이 바로 몸을 입으신 하나님, 성탄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너무 편하게 쉽게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1135-7절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우신다.” 하나님은 절대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스스로 낮추시어 인간을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낮아지심 때문에 성탄이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6-8) 하셨습니다. 저 높은 하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말구유로 오셨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저 별보다도 높고 엄위하신 창조주요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오신 것이 바로 말구유로 오신 성탄입니다. 하나님이 몸을 입으시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야말로 십자가에서 완성될 구원 사역의 출발점이 됩니다.

인간의 죄는 욕구충족을 향하여 치달아 갑니다. 좀 더 높아지려 하고, 좀 더 강해지려 하고, 좀 더 많아지려 합니다. 그 아름다운 환희의 정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낙원에서 쫓겨나 실낙원 한 이후로 인간의 삶은 홉스가 말한 것처럼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이기려고 하고 앞서려고 하며 높아지려 합니다. 신분상승욕구, 소유욕구가 몸서리치게 인간을 몰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성은 깨져버렸고 이 사회는 지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속이는 사람, 속는 사람, 죽이는 사람, 죽는 사람의 외침과 신음으로 살기 어려운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은 오실 때부터 죄의 욕구와는 반대되는 길을 걸으십니다. 성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조금이라고 알아차린다면, 우리도 하나님처럼 낮아짐으로 거룩해지는 길로 따라갈 것입니다. 대림의 계절은 하나님의 최고지존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신 것을 따라가는 절기입니다. 인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의 자리,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자리, 가장 불명에스러운 사형수의 자리에 주님은 오십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요 방향입니다. 낮아지신 자리를 기억하고 축하하면서 여전히 올라가려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귀하신 주님, 누구에게도 비판받으실 수 없는 의로우신 주님,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신 사랑의 주님께서 무한하게 낮아지시고 정죄받으시고 미움받으셨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 대림의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하향성을 기억하며 우리도 낮은 곳을 향해 가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욕망으로 높아지려는 우리는 낮은 곳, 어두운 곳, 실패한 곳, 병든 곳 지저분한 곳, 위험한 곳으로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볼 수 있고 가까이 모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사람으로 화목케

높이 계신 하나님이 몸을 입고 낮아지신 것은 결국 인간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이고 사람끼리 서로 화평하여 사랑하며 살도록 하시려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2-13)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죄에 매여 사는 인간에게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끼리 화목하지 못한 것입니다. 요즘 너나 없이 교회들이 화목의 결핍으로 많은 시련과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5:17) “평화는 인류 최고의 이상이다.”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 괴테의 말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며 우리는 눈을 돌려 옆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이 있어, 이웃과 화평하며 살기가 어렵습니다. 이웃을 좋아하면서도 가까이 오면 배척하는 마음이 동시에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만 중히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우리는 이기심, 자기중심성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교육과 교양을 통해 어느 정도 안 그런 척하도록훈련을 받습니다. 이기심을 제어하고 잘 어울려 삽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이 생겨 스스로 제어하기가 어려워지면 와르르 무너져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자기중심성을 치유하려면, 우리 중심에 나 대신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합니다. 평생 신앙인으로 살면서도 마음에 주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들이 의외로 너무 많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다스리고 주님이 내 생각도 이끄셔야 할 텐데, 항상 자기 감정과 이익과 자기 입장만을 내세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빨리 하늘을 바라보고 아기 예수님을 내 마음의 중심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마음과 눈으로 내 이웃, 내 형제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파편사회라고 부르는 걸 아세요? 파편처럼 부서져서 다 혼자 잘난 맛에 산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로 묶여있던 것이 다 깨졌습니다. 또 우울사회, 혹은 피로사회라고 합니다. 우울해요, 우울증 공황장애 등의 마음의 병이 깊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의욕이 없고 지루하고 피로를 느껴서 아무 일도 못합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선진국 반열에서 최고 높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들 있지만, 특히 젊은이들의 자살률이 제일 크게 늘어난답니다. 조급한 마음, 불안한 마음, 소외된 마음이 전염병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이웃에게 귀기우려 주고 이웃을 중요하게 여겨주는 것이 절망을 이기고 낙심에서 건지는 중요한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복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 암울한 시대에 진정한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힘은 아기 예수 나셨다는 복음입니다. 하늘이 땅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주변을 돌아봅시다. 내 이웃을 챙겨봅시다. 마음과 귀를 빌려 줄 사람이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동방박사처럼 하늘의 별을 따라 가는 자는 그분 안에서 이웃과 친구를 새롭게 만납니다. 예수님이 가장 중요한 명령에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을 연결시켜주셨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이웃을 사랑하며 평화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전라도는 복음화율이 거의 40%가 될 정도로 기독교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 성인으로 추앙받아 마땅한 여자 전도사님을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님입니다. 그녀는 열일곱에 증도로 시집와서, 나이 40에 거리에서 복음을 접하여 예수님을 믿고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너무나 큰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여 이렇게 결단합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내가 받은 예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겠다.” 이후 신학교에 진학을 해서 40세 만학도로 열심히 공부를 하며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 신안 앞바다의 수많은 섬들을 다니며 하나님의 사랑을 저들에게 전해주었는데, 별명이 대리거지였습니다. 왜냐하면 잔칫집에 가서 음식을 얻어다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를 다니던 1931년부터 6년 동안 무려 세 개 교회를 세웠는데,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큰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한 해에 고무신이 무려 9켤레나 닳도록 동분서주하면서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6.25전쟁이 나자 공산당원들이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란 죄목으로 문전도사님을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문전도사님은 그들의 총대에 순교를 당했고, 순교하는 순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시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죄 많은 이 영혼을 받으소서.”

이후 문준경 전도사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증도섬 90%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신안군 전체로 퍼져나가 14개 면, 1,004개 섬 가운데 약 100여 개의 교회가 세워지고 이분의 전도를 통하여 훌륭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대학생선교회의 김준곤 목사님, 성결교의 대표원로 이만신 목사님, 한신대 총장을 역임한 고재식 박사, 법관, 기업가 등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두 문 전도사님이 믿음으로 낳은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몸을 입으시어 아기 예수로 이 땅 위에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 오신 뜻은,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라고, 예수님처럼 아래로 자기를 낮추어 내려가라고, 이웃을 향해 나아가 평화를 이루라고 하신 뜻임을 기억합시다. 이 대림절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따라 나아갑시다! 문준경 전도사님처럼 낮아져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합시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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