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0-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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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고전1:18-31 |
설교제목 | 십자가를 자랑하자 |
십자가를 자랑하자
고전1:18-31
2020년 2월 2일 [주현후 넷째주일]
자랑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지난 주간에 있었던 제62회 그래미상 시상식(2020년)에서 주요상인 올해의 앨범·레코드·노래·신인상 4관왕이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라는 만 18세 되는 어린 여가수에게 주어졌다. 교우들은 찬송이나 복음송만 부르느라 세상 노래는 관심도 없으시지만, 그래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조금 알려면 이런 소식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빌리라는 조그마한 백인 여자는 그래미 사상 주요 4부문 상을 수상한 최초이자 최연소 여성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런데 마지막 결선에서 이 부문 상을 경쟁한 리조라는 상대방 흑인여가수가 주목을 받고 있다. 그것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라기에는 조금 안 예쁘고 착한 척하지 않는 가수라는 점 때문이다. 리조는 음대에서 플루트를 전공한 32세의 흑인 여성이고, 노래도 도발적이고 스스로 나쁜 여자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178cm의 키에 100kg이 넘는 뚱뚱한 체구여서,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데도, 뭘 믿고 저럴까 싶을 만큼 당당하다. 알고 보니 ‘바디 포지티브’라고, 자기 몸 긍정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여자이다. 비록 예쁘장하고 귀여운 여성은 아니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자랑하는 여성이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받는 사람 중에 미국의 16대 대통령을 지낸 에이브라함 링컨이 있다. 나도 링컨을 존경하지만, 그것은 그가 미국의 대통령을 지냈거나 남북전쟁에 승리하고 흑인을 해방시켜서만은 아니다. 링컨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생긴 것도 그리 핸섬하거나 호감을 주는 모양이 아니었고 추남이었다. 그는 배운 것도 별로 없었으나, 자기의 가진 장점을 잘 사용하여 큰일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모든 이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다.
특히 그는 정직하였으며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말을 잘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다니던 교회에서 성경말씀을 들으면 다음 날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잘 전해주는 아이였다. 이런 소질이 결국 그를 변호사로, 정치인으로 만들어 갔다.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지인 게티즈버그의 연설은 세계 역사에 남을 명연설로, 민주주의의 헌장으로 유명하다.
사람은 자기가 자랑할만한 장점을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다. 그 장점을 잘 살려 더욱 발전시킬 때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지역이나 나라도 자랑할만한 풍물이나 장점들을 잘 발전시켜 나갈 때 발전하게 되어있다. 올해 우리 삼척시도 국회의원선거를 하게 될 텐데, 출마하는 후보들 중에서 삼척과 동해의 장점을 잘 알고, 시민들의 좋은 점을 잘 살려갈 수 있는 후보가 뽑힌다면 틀림없이 삼척과 동해가 좋은 도시가 되며, 나라가 잘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에서 자랑할만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어떤 점을 신앙의 좋은 점으로 자랑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문화를 내세우려 할 것이고, 교회의 조직이나 교회가 하는 사회봉사나 취미활동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세상 조직도 그만하거나 그보다 더 나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향하여 교회가 가장 내세우고 자랑해야 할 것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교회의 자랑, 교회의 장점은 바로 십자가의 복음밖에는 없다. 우리의 자랑은 다름 아닌 십자가이다.
멸망하는 사람들
멸망하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존귀히 여기지 않는다. 십자가 목걸이나 교회의 십자가 장식은 좋아할지 모른다. 그들은 십자가 목걸이의 반짝이는 금과 십자가 장식의 아름다운 모양을 좋아할 뿐, 죄값을 치르신 십자가의 아픔과 죄 사함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이 없다. 세상은 십자가가 담고 있는 의미와 진실을 사랑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자랑거리가 아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21) ‘거리끼는 것’은 헬라어로 ‘스칸달론’으로서 올무, 걸림돌이라는 뜻이다. 오히려 유대인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걸림돌이 된다.
그들은 복음에 관심이 없다. 죄에 대해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영혼의 문제를 가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그냥 먹는 일, 즐기는 일, 그것을 잘 할 수 있는 돈과 권력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예를 들면 그들에게 큰 재난이 닥쳤거나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인 일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가 그들을 향해 십자가의 복음을 얘기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2001년에 많은 단체의 대표들과 함께 금강산 남북대토론회에 교회 단체의 대표로 참가했을 때,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나누던 김책공대생은 내가 기독교 목사라는 얘기를 듣고는 정색을 하고 내게 이렇게 물었다. “정말 선생님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고 목회를 한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멀쩡하게 생긴 분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어투였다.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구원에 이르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멸망한다. 그들이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미련해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7:6)고 하셨다.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그것을 준 사람을 찢어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 개에게 성경책을 준다면 개가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개는 먹을 것만 바라는데 성경책은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준다면 돼지가 밟아버리고 신경질을 내며 꿀꿀거릴 것이다.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문자대로 전하는 것은 반발이나 오해를 살 수 있다. 그들은 복음을 경멸하는 것도 모자라 복음에 대해 화를 내고 오해를 산다.
나는 신학생 시절이나 목회를 하면서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을 때, 정말 믿음의 문제, 영혼의 문제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복음을 들고 그들을 만나면 마치 절벽을 만나는 것 같다. 아마 여러분도 매일 그런 사람들, 성경에서 ‘멸망하는 자들’이라고 한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들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하는 것조차 아깝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자랑하라! 왜냐하면, 그들의 닫혔던 귀가 열리고 흐려진 눈이 떠지면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을 만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는 그리스도인
멸망하는 사람들은 그렇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만큼 존귀하고 자랑스러운 것이 없다. 십자가는 구원하는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십자가의 복음이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을 극복하여 하나님께 이르게 하는 길이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한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조차 십자가를 존귀히 여기지 않을 때가 많다. 일부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대로 방탕하며 멸망하는 자들을 동경하고 부러워하여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기까지 한다.
교회는 십자가를 자랑해야 한다. 교회가 물질적으로, 숫자적으로 많아지는 것만이 교회의 자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이다. 참된 교회성장은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하여 부흥이 일어날 때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다. 자기네가 큰 교회라고 자랑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를 가지고 있음을 자랑해야 한다.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크게 성장되기를 바라지만, 무슨 방법으로든지 성장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희생하면서 교회가 성장하고 교인이 늘어난다면 우리는 그걸 자랑할 수는 없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이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아픔과 십자가의 희생,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받아들이지 않고는 교회가 바로 설 수 없다. 십자가 위로 난 사랑과 은혜의 길을 걷지 않고는 절대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 뿐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산이다. 십자가를 붙들면 모든 것이 따라오지만, 다른 것을 붙들면 두 번째 세 번째 중요한 것 얻느라 가장 중요한 십자가를 잃을 수도 있다.
우리는 십자가를 버리고 다른 길을 걷거나, 십자가 없는 기독교를 동경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는 성도의 영적인 젖줄이며 영성의 바탕이다. 중세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잃어버리고 국교의 명예와 권력의 요람에 잠들어 있을 때 결국 생명력을 잃었다. 서양의 근대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잃어버리고 도덕과 교양을 강론하는 동안 교회는 역사의 촛대가 옮겨져 버리고 말았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위기에 놓인 교회와 성도들을 바르게 살릴 수 있다.
일부 오래 믿은 교인들이나 극단적 은사주의자들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 기적이나 신유나 방언과 같은 다른 어떤 것을 십자가 대신 내세우려 한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사는 것이나, 특별하게 사는 것이 곧 신자의 축복이요 자랑이라고 생각한다. 기적이나 은사가 나타나서 신유나 입신이나 방언들이 기독교 신앙의 표적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의 축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받고 천사의 방언이나 하늘의 기적이 나타날지라도, 십자가 없는 복음은 절대 교회의 자랑이 아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리스도인
십자가는 정의이다. 죄에 대하여는 공의로운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라도 죄를 그냥 없는 듯이 지나가지 않으신다. 모든 인류의 탐욕과 타락, 거짓과 방탕으로 가득한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정의롭게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즉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아 죄값을 치르게 하심으로 죄를 의롭게 처리하신 것이다.
미국에서는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기념일로 정하여 공휴일로 지킨다. 흑인인권을 위하여 싸웠던 정의로운 행동을 기념한다. 1960년까지 미국 남부에서는 공공연히 인종을 차별하여 흑인은 노예로 대우하였다. 학교, 식당, 상점, 세탁소 등 공공장소에서 백인용과 흑인용이 엄격히 구분되었다. ‘개와 검둥이는 출입금지’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는 가게들도 흔히 볼 수 있었다. 백화점에서 일을 마친 로사 팍스라는 흑인 여성이 백인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은 죄로 감옥에 갇히자, 흑인들이 정의로운 투쟁을 위해 싸웠다. 이 운동의 중심에 서있던 이가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흑인인권운동가들은 엄청난 폭력적 위험 앞에서도 십자가를 내세우며 비폭력의 행동으로 나아갔다. 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괴한의 총에 맞아 죽었으나, 인종차별은 사라졌다. 이게 바로 십자가 정신이 아닌가! 2008년에는 미국에서 흑인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 하였다. 십자가는 정의다!
또, 십자가는 사랑이다. 온 인류를 사랑하시어 스스로의 목숨을 사랑의 대가로 지불하신 것이 십자가이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당했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151장 1절) 무익하고 죄 많은 나를 피흘리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이 십자가다. 이 보혈이 흘러 온 인류의 삶을 적시니,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용서와 사랑의 강이 흐르고 있다.
헤르만 헤세의 <아우구스투스>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세상에 태어나자 이웃에 살던 빈스방거라는 노인이 어머니를 찾아왔다. “아들을 위해 한 가지만 원하는 걸 선택하세요. 오늘 저녁 그 소원을 아들의 왼쪽 귀에 대고 말하면 이뤄질 것이요.” 어머니는 그 밤에 아들의 귀에 대고 “아들아, 내가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란다.” 노인의 예언처럼 아우구스투스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방탕했고 교만했다. 결국 말년에 사람들한테 버림을 받고 아주 비참해졌다.
이때 빈스방거가 늙고 거지가 된 아우구스투스에게 나타났다. “당신의 행색이 비참하군요. 내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소.” “제게 도움이 되지 못한 옛날의 마법을 가져가시고, 그대신 제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는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랑만 받았던 과거를 청산하고, 말년에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 십자가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표적을 찾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고,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정의요, 사랑이다. 주님께 부르심을 입은 참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끝까지 붙든다. 그들은 십자가를 자랑하며 십자가의 복음에 의지한다. 십자가 때문에 감격해 울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뻐한다. 십자가가 참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자랑이요 기쁨이다. 보라! 그 초라하고 낡고 오래된 십자가가 정의요 사랑이니,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이기며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이다! 그리스도인이 내세울 것은 십자가의 복음뿐이다. 주님을 따라 정의를 지키고 사랑을 행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자랑하겠는가!
물론 신자의 삶에는 여러 가지 은혜와 풍성한 축복이 있다. 영감이 넘치는 기도와 살아있는 찬양, 교제와 나눔들이 있다. 주의 이름으로 하는 봉사와 헌신의 기쁨이 있고 선교와 교육과 문화생활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은 십자가의 복음이요 죄사함의 용서와 사랑이다. 우리는 이 자리로 돌아가, 십자가만을 자랑할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만나고 난 후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
보수주의자들은 교리를 보수하고 진보적 인사들은 실천을 강조한다. 오순절성령운동가들은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고 영성가들은 기도와 영적 충만함을 사모한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 참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십자가만을 붙들고 그러한 일들을 행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정의와 사랑의 복음 안에서 세상을 보며 교회를 새롭게 바라본다.
십자가를 자랑하자!
전도에 대해서 말하는데, 전도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할 뿐이다. 그 사랑과 그 희생과 그 은혜와 그 능력을 선포할 뿐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문벌이나 스펙을 굳이 갖추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오히려 미련한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그렇게 하심으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다!(27-28)
93년도엔가 미국에서 겨울학기 공부를 마치고 두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올 때 공항이 가까워오자 나는 그리운 마음에 비행기 창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전에 못 느낀 특별한 풍경이 있었다. 그것은 공항 근처가 빨간색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싶어 계속 자세히 보았다. 비행기가 점점 고도를 내리면서 땅에 가까이 가자 그 모든 빨간 등이 교회의 십자가인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빨간 빛이 파장이 길어 가장 멀리까지 잘 보인다. 공항 근처에 있는 수백의 교회에 다 붙어있는 빨간 십자가 등이 하늘에서는 가장 잘 보여서 한국의 김포공항이 다 빨갛게 보였던 것이다. 나중에 미국 목사들도 공항에서 그걸 느꼈다며 왜 교회마다 빨간십자가를 다느냐고 물어보았었다.
이렇게 십자가를 내세우고 크게 달고 빨갛게 불까지 켜놓는 한국교회인데, 정말 십자가를 사랑하며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을까? 우리는 십자가의 정의를 지키는가?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가? 우리 시대는 자기를 자랑하는 시대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복음보다는 자기복음에 빠져있는 듯하다. 교회는 빨리 자기자랑에서 십자가자랑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능력이요 참 지혜다!’ 하루도 이 진리에서 멀어져서는 안 된다. 세속의 가치관보다 복음의 가치관이 뛰어남을 믿고 의심치 말라.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을 자랑하며 삶으로 담대히 증거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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