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0-0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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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시103:8-14 |
설교제목 | 너그러우신 하나님 |
너그러우신 하나님
시103:8-14
2020년 9월 13일 [성령강림절 열다섯째/ 교회연합주일]
브래드 피트라는 배우가 정말 멋있게 나오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 있다. 맥클레인 목사는 아들 노만과 폴, 부인과 함께 몬태나주 강가에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로 사택에 살면서 낚시를 즐긴다. 두 아들 노만과 폴도 어린시절부터 낚시를 좋아했다. 장성한 두 아들은 형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교수가 되고, 동생은 자유분방하게 자라 낚시기자가 되고 도박과 술을 즐기는데, 그만 포커를 하다 동생 폴이 길에서 폭행을 당해 사망하고 만다.
주인공 중 유일하게 남은 큰 아들은 황혼의 나이에 강물에서 낚시를 하면서 목사인 아버지를 추억한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 형제에게 낚시를 가르쳐주시며 하신 말씀을 상기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글자를 주신 이후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지만 아직 우리에게 글자가 없을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시냇가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셨지요.” 마지막 장면에 노인이 된 큰아들이 낚시를 하면서 흘러가는 강물이 클로즈업된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인생은 흘러가는데, 서로 ‘너니 나니’ 하고 싸우지만 결국은 어디선가 가서 하나가 되어 만날 것임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오늘은 교회연합주일이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려면 먼저 일치되고 연합하여 한 마음으로 공통의 과제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교리가 다르고 신학적인 차이가 있어도 결국 흐르는 강물처럼 한분 하나님이 우리를 그 나라에서 만나게 하실 것이다. 개인 이기주의와 개교회주의로 교회의 공동체성이 바닥에 떨어졌다. 자기 주장과 진영논리가 교회에도 깊이 들어와 사사건건 부딪힌다. 특히 한국교회는 천만에 이르는 교인이 있지만, 수십 개로 나뉘어진 교파분열에다 이단사이비까지 있어 하나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무기력에 빠져있어 안타깝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 분열된 세상에 연합과 일치의 비결을 보여주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래전에 상해의 어느 식당에서 식사하기 위해 올라가다가 계단에 팻말이 하나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小心階段’(소심계단)이라 쓰여 있었다. 무슨 말일까 하여 생각해보니, 계단을 조심하라는 말을 작을 ‘소’자 마음 ‘심’자, ‘소심’이라고 쓴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소심을 나쁜 의미로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때로 마음을 작게 하여 조심조심 하는 것도 위험을 막는 데 참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말로 소심이란 말은 사람이 통 크게 놀지 못하고 쩨쩨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니까,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인다. 요즘 사람들이 너무 소심해졌다. 물론 자기 입장을 주장하고 작은 이익을 대변하는 데는 소심도 필요하나, 통크게 양보하고 서로 타협하여 하나 되는 데에는 대범이 정말 필요하다.
이런 때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 하나님의 큰마음, 너그러우신 성품을 생각해보려 한다. 하나님의 큰마음이 우리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우리는 거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생각해보겠다. 유럽에서는 유명한 도시들이 큰 축제를 벌이곤 한다. 지난 1-20년 그런 축제들의 주제는 대부분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늦여름에 영국 런던 노팅힐 카니발에는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하였는데, 이 거리 축제 주제를 ‘통합과 다양성’으로 정한 것을 신문에서 읽었다. 개성을 존중하고 개인주의가 가득한 우리 사회는 다양성 속에서 어떻게 통합과 일치를 이룰 것인가가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서로 차이가 나는 성격, 서로 다른 취미와 성향, 생각과 가치관, 이런 다른 점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일치시켜 나가느냐, 이것이 우리 가정, 교회, 단체의 삶에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 가정도 사람들은 오누이같이 닮았다고도 하시지만, 아내와 나는 성격이 상당히 차이가 난다. 아이들도 비슷하면서도 제각각 다른 점이 많다. 우리 가정이 행복하려면 이런 차이를 하나로 조화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아마 모든 가정들이 이런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럴 때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마음을 배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번 주일의 본문은 너그러우신 주님을 보여준다. 주님이 얼마나 관용하시며 너그러우신지! 갈등과 분쟁이 많은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처럼 너그럽게 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치와 평화를 위한 길로 너그러움, 관용을 가르쳐주신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8절) 또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즉 자주 꾸짖지 아니하시며(9절), 죄를 작게 처벌하실 뿐 아니라(10절), 그 인자하심이 크시다, 즉 사랑이 많으시다(11절). 본문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1. 우선,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고 거저 주려는 마음으로 대하신다. 긍휼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라하밈’은 ‘레헴’ 즉 여성의 자궁이라는 말에서 왔는데, 이 말은 여자가 자기 자궁을 찢고 낳은 아이를 제 품에 끼고 사랑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이 사람을 용납하신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긍휼은 크고 깊은 공감능력을 가리킨다. 정치가나 공무원들이 국민들과 공감능력이 있어야 사람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치유하는 바른정치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다. 무릇 지도자가 되려는 이들은 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은혜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카리스’ 즉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이니, 아무 대가 없이 무한히 주신다는 말씀이다.
2.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 사람의 감정에는 喜怒哀樂(희로애락)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점점 즉각 기뻐하고 즉각 화를 내는 경향으로 가고 있다. 쉽게 기쁨을 느끼고 쉽게 분노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갈등이 노출되고 분쟁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더디 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으신다. 본성 자체가 화내는 본성이 아니시다. 그런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본받아야 한다.
베드로가 한번은 예수님에게 물었다. “예수님, 사람들이 내게 고통을 주고 어려움을 줄 때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주어라!” 하셨다. 이 말은 오래오래 끝까지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노하기를 더디 하자!
3. 하나님은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신다. 경책은 꾸짖는 것이다. 잘못한 것이 있어도 스스로 깨닫게 하신다. 자꾸 꾸짖고 지적하면 더욱 약해지고 힘들어지는 면이 있다. 따라서 경책하기보다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방법과는 사뭇 다르시다. 노를 더디 내실 뿐 아니라, 한번 진노하신 후에 금방 품지 않고 털어버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쉽게 노를 낼 뿐 아니라, 그 노를 오래 가지고 있으니, 갈등과 분쟁을 극복하지 못한다.
노하는 것은 마음에서 분이 일어나는 것이고, 경책하는 것은 그 노를 표현하여 화내는 것이다. 화내는 것도 습관이다. 자꾸 화내어 작은 일에도 화내는 습관을 가지면, 그 습관이 화내고 남에게 상처 주는 인격이 되어 인간관계에 큰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노하더라도 지혜롭게 표현하여 화를 내지 말라. 자주 화내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해 진노하시며 화내시기도 하셨으나, 아주 드물게 특별한 경우에만 화를 내셨고, 그 화를 금방 풀어주셨다.
4. 죄를 작게 처벌하신다. 사람은 죄를 크게 처벌하고 싶은 본성이 있다. 죄보다 많은 고통을 주고 힘들게 하려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으나, 하나님은 죄를 작게 처벌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 하루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끌려왔다. 사람들은 간음의 죄를 죽음으로 갚게 하는 율법의 규칙을 따라 그 여인을 죽이려고 돌을 들고 왔다. 그러면서 예수님도 동시에 시험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땅 위에 무엇인가 글을 한참 쓰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 그러자 모두 돌을 땅에 떨어뜨리고 조용히 떠나갔다.
왜 하나님이 죄를 작게 처벌하시는가? 그것은 인간이 날 때부터 죄인임을 아시고 그 본성이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날 때 비로소 죄를 이기고 살 수 있다. 따라서 아무리 처벌하고 비난해도 인간의 죄가 극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말씀을 비출 때 믿음으로 죄를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해도 죄지은 사람은 끝까지 사랑하신다. 처벌하기보다 건져내기를 기뻐하신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남을 정죄하고 징벌하기보다 바로잡고 고쳐주자.
5.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크시다. 인자는 헤세드라는 히브리어에서 온 말인데, 사랑과 같은 뜻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기본적으로 사랑이 풍부하면 갈등과 문제가 사라진다. 그러나 사랑이 없이 메마르면 문제가 더 커지고 힘들어진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기에 갈등과 분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끄신다. 어려운 문제로 분쟁하는 단체는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나님은 사랑의 주님이시다. 점점 분쟁이 사라질 것이다. 갈등하는 가정은 하나님을 모셔들이라. 그러면 사랑이 그 가정에 회복될 것이다. 인자함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면, 폭이 넓게 마음을 쓰게 되고, 원수관계라도 점점 좋은 이웃관계로 변화될 수 있다!
현대인들은 조급하고 과격하다. 급한 성미를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의 느긋하심, 너그러우심을 배우자. 리처드 포스터는 말했다. “조급함은 마귀적인 것이 아니라 마귀 그 자체다.” 사람들은 서서히 자라나는 것보다 급성장을 좋아한다. 그러나 거룩한 영성, 행복한 평화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은 요셉을 정금같이 귀하게 쓰시려 13년 동안 종살이와 옥살이를 하게 하셨다. 모세를 훈련시키시려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하셨다. 여호수아를 쓰시기 위해 모세의 시종으로 40년을 기다리게 했다.
어떤 버섯은 6시간이면 자란다. 호박은 6개월이면 다 자란다. 그러나 참나무는 6년이 걸린다. 건실한 참나무로 자태를 드러내려면 아마 60년은 걸릴 것이다. 갈등과 분쟁으로 힘들어하는 가정, 사회, 단체를 평화와 화합으로 가득한 행복한 모임이 되게 하려면,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배워 오랫동안 노력해야 한다. 매일매일 기도와 말씀을 보며,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뤄지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고 그리스도를 채워가라!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의 글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다. 몇 사람의 사역자들이 둘러앉아서 선교하는 데 있어서 여러가지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의논하고 있었다. 그 당시 여섯 살쯤 되었던 아멜라라는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가 갑자기 사람들 말을 가로막았다. “할아버지, 성경 어디에 ‘문제’란 말이 나와요?” “내가 아는 바로는 그런 단어가 없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인데, 왜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렇게 걱정하고 있어요? 그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면서요!”
리차드는 이 아이의 말을 듣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문제라는 것이 우리 삶에 없는 것처럼 문제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더 간단하다. 고통으로 가득찬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 자신의 삶을 통해, 골치 아픈 일로 머리를 썩이는 것이 죄임을 배웠다고 한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시니, 두통은 머리 되시는 예수님만 앓으면 된다. 우리는 발이나 팔로서 열심히 순종하면 된다. 문제에 집중하지 말고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믿음을 가지라! 복잡하게 따지기 보다는 흐르는 강물처럼 결국은 바다로 돌아간다는 한가지 사실을 기억하라!
루터는 밤이 되면 이렇게 기도하곤 했다. “하나님, 이게 제 세상입니까, 당신 세상입니까? 제 교회입니까, 당신 교회입니까? 당신 세상이고, 당신 교회라면 제발 당신이 돌보십시오. 저는 피곤해서 자야겠습니다. 하나님, 안녕히 계십시오. 내일 아침에 다시 뵙겠습니다.”
조급하지 말라! 심각하게 문제를 의식하고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보다 너무 빨리, 너무 앞서 가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본받아 조금 천천히, 너그럽게 나아가라. 그러면 진정한 평화와 일치가 이뤄질 것이다. 교회연합주일인데, 우리나라에 수십 개 혹은 백 여 개의 기독교 교파가 있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어떻게 이렇게 갈라지고 찢어진 교계가 하나로 연합할 수 있겠는가? 카톨릭 교회처럼 한 깃발, 한 체제에 강제로 모이게 할 수도 없다, 그런다고 참으로 연합되는 것도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르지만 용납하면서 일치를 이뤄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너그러우심, 관용을 배우자!
스티브 잡스는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는데 IT산업에서 최고 천재였다.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췌장암에 걸렸다. 6개월을 넘기기 어려운 중병이다. 결국 몇 달 만에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를 했다. “나는 너무 일에만 올인했다. IT산업에만 모든 것을 바쳤다. 내 가족과 내 영혼에게 남겨 놓은 것은 하나도 없다.” 돈 많이 벌었지만 가족과 영혼을 위해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으니 무슨 소용인가!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러면 여유 없고 바쁘던 우리 마음이 넓어지고 너그러워질 것이다.
정치를 봐도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잡아먹지 못해 난리다. 기독교 안에서도 여유와 너그러움이 사라지고 서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너그러우시듯 우리도 너그럽게 살아가자!! 1)긍휼히 여겨라! 2)노하기를 더디 하라! 3)비판과 정죄를 즐겨 하지 말라! 4)죄를 작게 처벌하라! 5)사랑으로 대하라. 조급함을 버리고, 하나님께 맡기고 나가면, 가정도 평안해지고 여러분이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모든 사회단체, 생활의 장들이 화합과 평안을 이룰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에베소4:4-6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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