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4-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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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롬12:14-18 |
설교제목 | 평화의 길 |
평화의 길
롬12:14-18
2024년 12월 15일 [대림절 셋째주일]
지난 한두 주간은 정말 국내외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난 주간이다. 하나는 12월 3일 밤에 있었던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이었다. 군인들이 국회를 비롯한 중요지점을 한밤중에 쳐들어왔다가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로 풀린 일과, 국회의 대통령 탄핵이 국회의원들의 선거에서 부결된 일이다. 또 하나는 12월 10일 화요일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한국의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한 일이다. 비상계엄의 여파는 지금 정치 경제 언론 등 온 나라를 흔들고 앞으로 나라가 어떻게 나아갈지 불안한 상황이지만, 설교에서 언급하는 것을 피하겠다. 대통령이나 그 누구라도 총칼을 가지고 무력으로 국민을 겁박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대신 노벨상 수상일 며칠 전에 스웨덴 한림원에서 우리나라 작가가 수상기념 강연을 전세계에 발표한 일은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은 여러분도 이미 들었으리라. 공식적인 수상소감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드디어 날짜가 되어 스웨덴 시간으로 6일 저녁, 우리나라에서는 한밤중에 수백 명 앞에서 수상기념 강연을 하고 전세계에 방송되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강연은 문학계뿐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끌었다. 한승원 소설가의 따님이기도 한, 올해 54세인 한강 작가는 이미 세계의 대표적인 문학상을 여러 개 수상한 바가 있어서, 언젠가는 노벨상을 탈 수도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빛과 실>이라는 제목의 수상기념 강연에서 한강 작가는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비극적인지 너무 실망스러운 일들이 많이 있음을 소설에서 썼다고 밝히고, 그런데 이렇게 위험하고 악한 인간이 한편으로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지 놀란다고 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모두 인간의 폭력이 얼마나 강하고 위험한지를 소설 속에서 자세히 풀어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힘에 놀라고 그것을 소설에서 보여주려 했다고 한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사랑은 무얼까?’ 이 두 질문이 어릴 적부터 자기의 주제라고 생각해온 작가는 두 가지 사실에 깜짝 놀란다고 한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작가의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한다. 답답할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수상기념 강연을 들으며 사람과 사람의 가슴을 금실로 연결해주는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이 바로 작가의 글쓰기였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랑과 평화’에의 메시지가 노벨상위원회를 감동시켰구나, 생각하였다!
우리도 오늘 평화를 얘기하려 한다. 평화의 계절 대림절 셋째주일이다. 여러분 위에 아기 예수의 평화가 가득하길! 앞에서 언급한 두 사건이 모두 평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지금 우리가 걷는 혼란과 고통의 시기가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 되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매일 아침 만나면 “안녕”이라고 인사한다. 유대인들은 “샬롬”이라고 인사한다. 이는 다 평화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입술로 평화를 말하여도 우리 마음과 인간관계에는 평화가 많지 못하다. 가정의 불화와 사회의 갈등, 국제 분쟁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평화에 굶주려 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8절)”고, 평화의 복음을 전한다. 우리는 평생 사람들과 부대끼며 산다. 이런저런 관계가 우리 인생을 결정한다. 평화를 이루는 생은 이 관계가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이니, 가장 복된 생애요 풍성한 생명이다. 평화가 없는 삶이야말로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이다. 여러분 마음에 평화가 있기를! 여러분 가정이 평화로워지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여러분의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 사도 바울은 평화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1. 평화를 누리려면 사람들을 축복하며 살아야 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축복한다 함은 유리하게 말한다, 칭찬한다, 위하여 기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서로 축복하며 살기를 바란다. 칭찬해주고 인정해주며 좋게 말해주면 우리 삶이 평화로워진다. 잘해주는 사람에게도 축복하지 못하며 사는 우리들이다. 하물며 핍박하거나 나를 넘어뜨리려는 사람에 대해 어찌 축복할까! 복수하거나 욕설이라도 퍼부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성령 안에서 우리도 축복해주어야 한다. 칭찬해주자, 남을 유리하게 말하자, 정 그렇게 못할 마음이라면 그를 위해 기도해 주자.
축복보다는 보복과 저주가 가득하고 덕담이나 유리한 칭찬보다는 헐뜯는 말이나 욕설이 범람하고 있다. 세상에 총 맞아 죽은 사람보다 저주와 욕설의 말에 상처받아 앓다 죽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남에게 축복을 말하기보다 쉽게 욕설과 흉보기로 대한다. 자기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할 때 악담과 저주를 퍼부으며 산다. 남 흉보는 것이 재미요 즐거움이요 취미생활이 되다시피 한 사람들이 많다. 어쩌면 그렇게 지어내기도 잘 지어내는가! 그러다보니 서로 가시가 되고 찔레가 되어 상처를 준다. 이런 이유로 세상이 너무 무섭다고 자신감을 잃고 우울증에 빠지거나 자폐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국내정세에서 국회가 지난 두 주간처럼 온 국민의 관심 속에 있었던 때는 없었다. 우리는 국회를 보며, 왜 저렇게 싸우나, 좀 협력하고 손잡고 함께 국정을 운영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입장이 다른 것도 알겠고, 하나의 결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서로 엇갈리거나 의견을 맞서는 갈등이 있다는 것도 얼마든지 이해한다. 그러나 여와 야가 총칼을 들고 나올 정도로 감정대립을 하고 싸우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도무지 괜찮게 보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의 근본 문제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알라. 자신에게서부터 평화가 이뤄져야 한다. 모든 평화는 내게서 시작된다. 내가 저주와 욕설과 남 흉보기의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다른 사람과의 평화는 요원하다. 남을 축복하자. 부모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자식들을 축복하면서 기르라! 서로 자기 아내와 남편을 축복하라. 교인들을 서로 축복하라. 친구와 직장 동료들을 진심으로 축복하라. 원수까지도 축복하자. 여당은 야당을 축복하고, 야당은 여당을 축복해주도록 기도하자! 제발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 공생하도록 노력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때 우리 삶에 평화가 임할 것이다.
2. 평화를 누리려면 또한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한 집에 한 솥밥을 먹고 살아도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함께 사는 게 아니다. 그러나 먼 외국이나 군대에 나가 몇 년을 헤어져 있어도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나눈다면 함께 산다고 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 잔치에 오셔서 함께 즐거워하시고 우리 슬픔 가운데 오셔서 함께 슬퍼하시기 위해 높은 하늘보좌를 버리고 베들레헴 외양간의 말구유에 오셨다. 그리고 죄인과 세리들과 소외당해 외로운 자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셨다.
인생에는 즐거운 일이 많다. 이때 기쁨은 나누어야 진정한 기쁨이 된다. 즐거움을 나눌 사람이 거기에 없다면 인생은 썰렁한 광야가 되고 만다. 어떤 청년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서 결혼하였다. 결혼식에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냐고 축하하였다. 그러나 이 청년은 자꾸만 눈물을 흘렸다. 왜냐하면 아들의 그 기쁨을 함께 할 어머니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집을 떠나 외지에서 지냈다. 그때 제일 싫은 것이 명절이다. 즐거움을 함께 나눌 가족들과 같이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같이 있어도 남이 즐거워할 때 내가 함께 즐거워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사촌이 논을 사면 이상하게 배가 아프고 속이 상하다. 그래서 일찍이 초대교회의 위대한 설교가였던 크리소스톰은 말하기를, “즐거워하는 자를 시기하지 않고 함께 즐거워하기는 고귀한 영혼만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보다 더 어린 동생이 부모에게 사랑받고 즐거워하는 것을 시기한다. 그래서 할퀴기도 하고 울어대기도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동생의 기쁨이 내 기쁨이요 동생이 즐거워할 때 함께 즐거워하게 된다.
슬플 때 우리는 함께 함으로 평화를 이루어갈 수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일가는 서로 원수지간이었지만, 두 젊은이의 애틋한 죽음을 함께 슬퍼하는 동안 이 오랜 원수관계는 눈녹듯 사라지고 평화가 이뤄지게 된다. 아무리 유감이 많은 사람이라도 장례 때에는 가보아야 한다. 슬픔을 나누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며, 슬픔을 나눌 때 평화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눈물을 같이 흘려야 친구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
3. 평화를 누리려면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한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절).”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 예수 안에서는 앙갚음이란 없다. 선행을 행하며 살기에도 우리의 힘은 부족하고, 평화를 누리며 살기에도 우리의 시간을 짧다. 그러니 원망과 시비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선한 일 하기에 더욱 노력하자. 전세대와 다음 세대가 선한 일을 도모하라, 서로 존중하고 인정해주자!
세상은 악을 악으로 갚기에 광분하고 있다. 군대에서는 적에게 당한 피해는 세 배로 갚아야 하도록 되어 있다. 총을 한발 맞았으면 3발 쏘아야 비긴다. 수류탄을 맞으면 박격포를 쏘아야 한다. 이 군대정신이 사회에 가득 차 있음을 우리는 본다. 불신사회는 악을 주목하고, 악의 수단을 정당화한다. 옛날 무협영화를 보면, 아버지가 죽으면서 아들에게 ‘아무개의 원수를 갚아다오!’ 하고 죽는다. 대를 물려 원수갚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때릴 만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극이 생겨난다. 또한, 보복을 즐거워하고, 피비린내 나는 악행을 게임으로 만들어 어릴 때부터 즐긴다. 그러나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 악을 행하기에 힘쓰는 인간은 이미 그 자체로 저주 아래 놓여있어 평화가 없다.
일찍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19:18)는 레위기의 계명을 들으며 살았다. 악행과 원망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더라도 우리만은 선을 행하기에 힘써야 한다. 교인들끼리 악한 마음이 생겨나면 은혜 받을 길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안팎이 다 선해야 한다. 선한 마음으로 선한 말을 하며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짊어진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의 짐만 얹어준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는다.(설교자노트 07-9·10, p.42)
일어설 때도 먼저 무릎 꿇고 일어서고 앉을 때도 먼저 무릎 꿇고 앉는 낙타처럼, 그렇게 무릎 꿇는 성도가 되라. 무엇보다 원수된 것, 어색한 것, 괴로운 것, 갈등과 싸움과 분쟁과 소외감과 섭섭함을 일으키는 모든 문제 앞에서 평화를 이루어 달라고 겸손히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 오늘도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는가? 매일 확인하자! 괴롭고 힘든 일, 잘 안풀리는 갈등과 미움이 있는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기도함으로 선한 일을 계획하고 도모하라! 악이 치받쳐 올 때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 성령님이 악을 화해와 이해로 평안을 이루어 주신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는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1-16)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사람끼리 서로 화목하게 한다. 우리는 얼마든지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
교회가 오랫동안 기도하며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성 프란시스의 기도’를 소개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운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 오, 주여!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살게 하소서./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용서받기보다는 용서하며/ 나 모든 것을 줄 때 얻으며/ 내가 죽을 때 살아 영생 얻도록. 아멘.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가 350년을 통치한 나라이다. 우리는 일제에 35년 통치를 당했는데, 인도네시아는 10배나 오랜 기간 식민통치를 받았다. 네덜란드는 개신교회의 나라이다. 그 시절에 독일 루터교회 선교사 노멘센 목사가 자바섬에 가서 선교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사람이 많이 사는 땅이다. 그런데 네덜란드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칼빈의 후예이고, 노멘센 선교사는 루터의 후예이니 선교를 하지 말라 해서 내쫓아버렸다. 노멘센 선교사는 다시 독일로 돌아갈 수도, 그들과 싸울 수도 없어 수마트라 섬으로 가서 선교했다.
거기는 야만인 식인종들이 살았다. 잡혀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식인종들에게 선교를 해서 그 부족장까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왕을 따라 온 부족이 다 크리스천이 되었다. 바탁족인데 천만 명 가까이 되어서 인도네시아에서 크리스천이 그렇게 많이 나온다고 한다. 바탁 족에서 감독까지 나와 인도네시아 기독교의 지도자가 되었다.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지 않고 평화의 길을 걸을 때 오히려 복음이 흥왕하게 되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성탄절 밤 울려 퍼진 천사들의 노래를 기억하자! 이 세상은 평화에 목말라 하고 있다. 아이들도 평화가 없으면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잃는다. 평화가 없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눈빛이 벌써 허무와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서로 축복하자!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자. 선한 일에 더욱 힘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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