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4-1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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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눅2:41-52 |
설교제목 | 잃어버린 예수를 찾아서 |
잃어버린 예수를 찾아서
눅2:41-52
2024년 12월 29일 [성탄후 첫째/ 송년주일]
인사, 축복
지난 한 해 여러분과 함께 잘 지내고 연말을 맞이하니 감사하다. 기도해주시고, 협력해주시고, 곁에 있어주셔서 감사드린다. 여러분이 있어서 교회가 있고, 우리 교회가 있어서 우리 각자가 있다. 시국은 시끄럽고 복잡하지만, 믿음과 사랑을 가진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나라는 떨치고 일어날 것이다. “한해동안 감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잃어버린 것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뭔가 허전하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잃어버린 것이 있어서다. 예전에 비하여 인정과 여유, 배려가 많이 잃어지지 않았나 싶다. 길가에서, 시장에서, 아파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예전같지 않게 여유가 없어졌다. 조금 손해보고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부족하다. 원래는 착한 사람들, 따뜻한 사람들이었는데, 조금 물러서고 양보하다보면 자꾸 손해보고 어려움을 당하니, 점점 딱딱하고 차가워지는 것이 아닐까? 한걸음 물러서고, 조금만 배려하고, 관심의 손을 한 번만 더 내밀면 얼마나 좋아질까!
젊음을 한해만큼 잃어버렸다. 왜 이렇게 세월이 빨리 가는지, 자기 나이에 놀란다고 한다.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좀더 발전할 기회, 좀더 높아질 기회, 좀더 가까워질 기회를 놓쳤다. 아깝다. 그러나 다음에 더 나은 기회가 틀림없이 올 것이다. 좋은 사람을 놓치기도 했다. 친구, 이웃, 마음 두는 벗, 선배, 후배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나? 예수 더 잘 믿을 기회가 1년만큼 지나갔다. 전도할 기회를 놓쳤고, 기도할 기회들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공부할 기회, 사업 잘할 기회도 지나가버린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회는 또 온다. 우리 인생의 클라이막스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인생 석양의 비낀 볕을 바라보고 있을지라도, 찬란한 마지막 황혼이 기다리고 있다.
잃어버린 예수
요즘 세상에서는 사람이 행복을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돈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사람을 부를 수 있는 힘, 일을 벌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돈이 얼마나 좋은지, 돈을 넉넉히 가지고 있으면 어디서나 윗자리로 안내를 받고,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물질이 많아도 인격과 믿음과 함께 있어야 사람이나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 다른 것은 다 없고 돈만 많으면 오히려 무시를 당하고 비웃음을 받는다. 돈이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다. 물질유무는 행복의 한 조건일 뿐이다!
요즘 사람들은 외모지상주의라고 한다. 젊은 사람, 여성들만 외모를 추구하는 게 아니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외모를 가꾸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여행지에서 낮에 여행을 다니고 일행이 숙소로 들어가면 다 피부에 좋다는 팩을 하느라 누워있는 것을 보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직장에 들어갈 때도 외모가, 물건을 팔 때도 외모가, 자녀들을 기를 때에도 외모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무엇을 선택할 때나 사람을 소개받을 때는 외모를 엄청 따진다.
또 학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어떤 청년이 영어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는데, 거기 나오는 어린이는 서울에서 유명하거나 잘 산다고 알려진 사람들의 자녀들로서 외국인학교를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을 하는 유치원이었다. 얼마나 영어를 열심히 하고 잘하는지 어떤 어린이들은 선생님보다 발음이나 어휘력이 더 좋은 애들도 있었다. 그런 애들은 어릴 적부터 경쟁에 뛰어들어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여 학벌을 따내는 아이들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벌써 계급이 형성되어 외고 과학고 자사고 특별반에 들어가 장래의 성공을 예약한 아이들이 되는 것이다. 삼척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특수 계층의 학벌이 어릴 때부터 이뤄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시대가 공의와 평화, 사랑을 점점 잃어간다. 기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예수의 정신, 예수의 길을 잃어버렸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물질, 외모, 학벌이 중요하다 하지만, 사실은 궁극의 관심, 근본적인 문제, 예수가 있어야 한다. 예수가 보여주신 믿음 소망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다. 세상에 예수를 전해주어야 할 교회와 성도들마저 어떤 때는 예수를 잃어버린 것이 문제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믿음과 은혜, 공의와 사랑, 꿈과 희망을 찾아야 한다. 이 시대가 예수의 길을 완전히 잃어버려져 가는 것이 문제다.
요셉과 마리아가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을 갔다가 돌아오게 되었다. 소년 예수가 조금 컸으니까 당연히 일행을 따라오겠지 하고 마음 놓고 돌아오다가 홀연히 예수 없는 것을 알고 찾아보았다! 아뿔싸! 정말 예수가 없었다! 예수 잃어버린 것을 깨닫는 게 복이다. 예수 없이 믿고, 예수 없이 살면서도 아무 문제를 모르고 있는 것이 정말 재앙이다. 우리가 ‘아, 예수를 잃어버렸다!’ 하는 것을 느낄 때, 그것을 절감하고 민망해 하고 안타까워할 때 구원으로 가는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예수 없이 하루
처음에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부친 요셉은 예수가 없는 것도 모르고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고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처럼 예수 없이, 예수 없는 줄 모르고 사는 하루, 예 수 없이 사는 한 달, 예수 잃어버린 채 사는 한 해는 갈수록 손해요 살수록 후퇴인 인생이다.
가끔 교회에 나온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많이 늦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신앙생활 하는 데 늦었다 할 때가 어디 있겠냐만, 젊은 때부터 신앙생활 한 것과 나이 들어 비로소 예수 믿는 것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젊을 때 예수를 믿어 말씀 위에 바르게 세워진 믿음을 가지면, 인생관과 가치관이 반듯하게 자리를 잡아서 잘못 되지 않는 인생이 되고, 조금 잘못 되더라도 금방 다시 돌아와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나 너무 늦게 믿으면, 그때에도 하나님은 동일한 구원을 주시지만, 삶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기 때문에 고치고 바로잡기에 쉽지 않은 것들도 많다.
마리아와 요셉은 다행히 하룻 만에 깨달았다, 너무 늦지 않았다. 비교적 여행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일행 중에 예수가 없는 줄을 알아채었다. 빨리 알아차릴수록 좋다. 신앙생활을 너무 오래 하고,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와 직임을 맡은 상태에서 자기 신앙과 인생에 예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믿음과 지혜의 눈을 떠서 벌여놓은 자기 믿음과 인생을 냉철하게 돌아보라! 내가 이렇게 오래 믿었고 다른 사람에게 정말 높고 큰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정작 내 인생의 날들과 일 가운데 예수가 없다면? 어찌할까!
예수 없이 신앙생활하기도 한다. 교회생활의 주인공이 되어, ‘인싸’가 되어 설치는데, 그 가운데 예수가 없다?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다. 사실 교회생활의 모든 문제는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는 데 있다. 예배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 보지 않고 사랑으로 헌신하지 않는다. 왜? 예수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기회가 다 사라지기 전에, 우리 인생의 날들이 다하기 전에, 이제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찾아나서라!!
예수 찾아 하루
오늘 성경은 사흘을 보여주고 있다. 1)예루살렘을 떠나와서 아들 예수가 없음을 알았던 하루. 2)예루살렘으로 돌아간 하루. 3)예루살렘에서 아들을 찾아 돌아다니다 만난 하루. 무려 사흘 동안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이 어땠을까! 이 마음을 헤아린다면 자녀들을 잃고 찾기를 안타까이 기다리시는 성부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실까를 생각해보라!
시 1편을 보면,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으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고 노래한다. 죄의 길 위에 서 있으면, 그가 누구이든 죄인이 된다. 자기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났을 때, 지켜야 할 원리를 모른 척하고 있을 때 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예수를 잃은 지를 모르고 점점 예수와 멀어지는 하루를 살고 있는 이들은 불행하다. 나 스스로를 이런 물음 앞에 잠깐 놓아두어보라. ‘지난 한해는 예수 없이 제 멋대로 사는 잘못된 한 해는 아니었겠지?’
병사들이 전쟁 중에 있는 왕이었던 다윗은 왕궁 옥상을 배회하다가 목욕 중인 밧세바의 벗은 몸을 보았고 유혹에 빠져 범죄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다윗의 거닐던 왕궁 옥상은 서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였고, 죄의 길이었다. 우리도 예수 없이 점점 멀어져가는 길로 떨어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신앙의 빛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은총에 무감각해지며 욕망을 따라, 자아의 허영에 따라 살아가는 ‘예수 없는 삶’을 이 시간 회개해야 한다. 그냥 이 길로 가서는 안 된다. 돌이켜 예수 찾는 길목으로 돌아나와야 한다.
우리가 죄의 길에 선 줄을 알고 돌아서기만 해도 그 시간부터 우리의 길은 ‘예수 찾는 길’이 된다. 지금 우리의 마음 자세, 지금 우리의 깨달음과 방향이 중요하다. 깨닫고 돌아서면 ‘예수 찾는 길’이요, 그대로 가면 ‘예수 잃는 길’이다. 지금부터라도 진리를 찾으면 바른 길이고, 아직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예수 없이 점점 멀리 나아가면 저주스러운 불행의 길이다.
성전에 계신 예수님
다행스럽게도 소년 예수는 성전에 있었다. 45절,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46-47절) 예수는 길 잃은 소년이 아니라 성전에서 가르치는 젊은 스승이 되어 있었다.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모르나, 지혜로 가득했고 이 말을 들은 사람은 그 지혜에 감탄하였다.
찾아와서 사흘 만에 잃은 아들을 찾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요셉과 마리아를 향해, 오히려 타이르듯 하시며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어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다. 이 말씀에 대하여 요셉과 마리아가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하였다.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것이니, 예수님이 이미 참 인간이시며 참 신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말한 것이다. 아직 놀라운 기적도, 구원하는 말씀도, 부활의 권능도 보이시기 전, 소년 예수의 말이니, 요셉과 마리아가 이해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이어지는 모든 장면들은 거룩함을 나타내며, 예수의 신성이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다. 이미 예수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일을 아시고,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며 그 인성의 고매함과 신성의 위대함을 보이셨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백성이다. 그러므로 소년 예수가 성전을 가까이 하신 것과,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 부른 것을 유의하여 보아야 한다. 우리도 성전을 가까이 하며, 성전을 아버지의 집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시다.
한 해가 다 지나갔다. 새해에는 아버지의 집 성전을 가까이 하라! 성전에 머물라! 성전에서 살아가라! 성전에서 위로 받고, 성전에서 즐거워하고, 성전에서 기도하며 찬송하면서 여러분의 영혼을 살찌우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 말씀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말씀이었다. 소년 예수의 이 외침이 여러분에게 울려퍼지기를 바란다! ‘새벽에 성전에 있겠습니다. 주일에 성전을 지키겠습니다. 주간 중 조용한 시간에 성전을 찾겠습니다.’
예수, 자라시다!
52절은 예수의 성장을 말하는 아주 귀한 구절이다.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소년 예수는 부모에게 순종함으로 모든 성도의 모범이 되셨다. 부모에게 순종함은 오늘날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순종하다 보면 하늘 뜻을 이룬다. 둘째는 영적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믿음을 양육하고 신앙적 원리를 전수해주는 주의 종들과 믿음의 선진들에게 순종할 때 우리 믿음도 자라게 된다.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세월만 흘려보내는 이들은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다. 셋째는 교회에 순종하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과 치리에 순종해야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자랄 수 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51절 말씀이다. 불순종하고 저항하는 것이 실력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순종하는 것이 복이다. 순종할 때 자란다. 순종할 때 우리 인생이 순응하여 평안하고 잘 되는 복을 누리게 된다. 그 결과 지혜오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장한 것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많이 받음으로서 이뤄진 일이다.
지혜가 자란 것은 내적인 성장, 키가 자란 것은 외적인 성장이다. 우리 믿음도 지혜가 자라고 키가 자라듯 내적 외적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직분도 자라고 헌신도 자라고 대인관계도 자라시기를 축복한다. 마음도 기쁘고 생각도 펼쳐나가며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더욱 강해지고 든든해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어제 점심을 주변 청국장집에서 부교역자 신학생들과 함께 먹었다. 문득 가까이 앉아서 보니 우리 신학생들이 정말 많이 컸다! 박진엽, 김재희! 키도 컸지만 말하는 것, 일하는 것을 보니 정말 많이 자랐다. 한자 성어로 ‘괄목상대’라는 말이 있다. 눈을 비비고, 서로 쳐다본다는 뜻이다! 너무 사람이 크고 멋있게 변화되어서, 새삼스레 눈을 비비고 쳐다보게 되더라, 하는 말이다. 괄목상대! 내년에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한 해 동안 여러분이 예수와 함께 자라는 것을 보시고, 괄목상대하시기를 바란다!
어느덧 한해가 다 지나갔다! 24년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교회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제 새해는 ‘예수 안에서 행복이 더해가는 교회’를 이루고자 한다. 아무쪼록 행복하기를! 그 행복을 다른 데서 찾지 말고 예수에게서 찾으라!! 예수가 답이다! 예수가 힘이다! 예수가 생명이다! 절대 예수 잃어버리지 말고, 여러분에게 임한 예수 생명이 강하고 크게 자라기를 축복한다! 잃어버린 예수를 찾아 말씀과 묵상으로 날마다 자라가기를 축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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