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5-09-28 |
---|---|
설교말씀 | 마태12:46-50 |
설교제목 | 예수님의 가족 |
예수님의 가족
마12:46-50
2025년 9월 28일 [성령강림후 열여섯째주일]
세계적인 여자 배우 탕웨이와 결혼한 한국 감독 김태용이 만든 <가족의 탄생>이란 영화가 있다. 누가 보면 연인 사이라 오해할 만큼 다정한, 친구 같고 애인 같은 남매 미라(문소리)와 형철(엄태웅)이 있다. 인생이 자유로운 형철은 5년 동안 소식도 없다가 어느날 불현듯 누나 미라를 찾아온다. 인생이 전체적으로 좀 흐릿한 20살 연상녀인 무신(고두심)과 함께 온 것이다. 똑 부러지는 인생을 꿈꾸던 미라는 사랑하지만 누나 속을 무던히 썩이는 동생 형철 그리고 동생이 사랑하는 여인 무신과의 아슬아슬, 어색한 동거를 시작한다.
한편, 리얼리스트 현실주의자 선경(공효진)은 연애에 몰두하는 로맨티스트 엄마 매자(김혜옥)때문에 인생이 조용할 날이 없다. 사랑이라면 만사 오케이인 엄마의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니 이리저리 치인 기억에 사랑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선경이다. 매자가 병으로 죽자 장례를 치른 선경과 어린 경석은 자연스럽게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그 놈의 사랑 때문에 인생이 편할 날 없는 경석(봉태규)과 채현(정유미)도 이 가족 안으로 들어온다. 얼굴도 예쁘고 맘도 예쁜 채현이 넘치는 사랑을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나누어주다 보니 정작 남자친구는 애정결핍증에 걸리고 만 기구한 커플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웬~수처럼 으르렁대는 이들... 각자 사랑 이야기만으로도 복잡한데 이 7명이 한 가족으로 살아간다. 여기저기서 또 얽히고 설킨 스캔들로 인생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또 들썩이기 일쑤인 복잡한 가족,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이다. 가정의 위기, 위기 가정~! 우리시대의 자화상이다! 사랑에, 스캔들에, 바람 잘 날 없는 이들에게도 과연 찬란한 행복이 탄생할 수 있을까 싶다. 감독은 도저히 한 가족이 될 수 없는 이들이 용서와 따뜻한 이해의 끈으로 하나로 서로 얽히면서 만들어 내는 가족 이야기를 보여준다.
가정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심으로 창조하신 복된 기관이고 가족은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행복을 찾고, 결국 가정으로 돌아가서 인생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족은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얽혀있다보니 항상 좋은 것만이 아니고 너무 괴롭고 부담스럽고 힘든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가족에게서 행복이 시작되지만 가족에게서 시작되는 불행도 허다하다. 가족이 정말 좋은 관계일까 아니면 가족이란 관계는 천형과도 같이 주어진 불행의 씨앗일까? 사람들에게 가족이란 행복한 관계일까 불행한 관계일까,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할 때가 적지 않다.
이번 추석 명절은 전에 없이 긴 연휴가 될 것 같다. 10월 3일 금요일 개천절 휴일로 시작하여, 6일 월요일 추석 당일과 다음날, 9일 한글날과 그 전날 대체공휴일까지 하면 꽉찬 일주일 휴가인데, 10일 금요일만 징검다리 휴일로 하면 12일 주일까지 열흘간의 공휴일이 가능해진다!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 긴 공휴일도 결국은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이는 공휴일이거나, 어디 외국이나 경치좋은 국내 휴양지에 놀러가는 공휴일이 될 것 같다. 가족이 모이고 흩어지는 추석 명절에, 이런 때 우리는 가족의 의미를 한번 스스로 물어본다.
그야말로 어찌 보면 가족 이기주의라 할 만큼 가족 중심으로 모든 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가족을 안으로 들여다보면 사정이 그리 좋다고만 할 수는 없다. 쾌락지상주의에 빠진 현대사회에서 가정은 욕망을 만족하지 못하는 자기포기의 공간이 되고 말았다. 가정에서 만족을 누리고 가족들끼리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꿈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에 못 미치는 가정이 많다. 가족을 향한 바람과 요구를 채우지 못한 가족들은 바깥으로 떠돌면서 가족들에게 불만을 표출하고, 그것이 다른 가족들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하고 원망이 되기도 한다. 겉으로는 가족중심으로 모든 게 이뤄지는 것 같은데, 안으로 들여다보면 부모 자식 사이의 사랑은 돈독하지만 정작 무엇을 위한 사랑인가, 또 부부 사이의 사랑은 아름답고 온전한가, 할 때 가족은 위선과 거짓으로 차있는 허수아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게 가족은 진정 누구인가?
초기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임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열심이 특별하였다.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농사짓던 쟁기를 뒤에 두고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예수를 따랐다. 젤롯의 급진좌파도 있었고, 장사하던 사람,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똘똘 뭉쳤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심한 오해와 비판을 받으셨다. 예수의 제자들은 로마 식민지에서 해방되기 위한 반대운동을 계획하지도 않았고, 유대종교를 완성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유대 경건공동체를 이룰 것 같지도 않았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반대자들과의 용기있는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또 많은 기적과 능력을 행했는데, 이것도 워낙 영향력이 큰 일이라 큰 오해를 받았다.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에는 그날로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무리가 예수님을 쫓아다닐 정도였다.
예수님이 제일 바쁘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실 즈음에 가족들이 찾아왔다. 귀신에 들렸거나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말리러 왔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족들의 관심을 물리치셨다. 가족을 소홀히 대하라는 것은 아니다. 가족을 하나님보다 앞세울 수 없으며 혈육사랑을 진리보다 우선할 수 없음을 가르쳐주셨다.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47-49절 말씀이다.
인간적인 생각을 넘어서는 신앙적인 생각
마리아, 예수님의 인성과 함께 신성을 인정했던 어머니이다. 성령으로 잉태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신앙적인 생각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에 기울어지고 있다.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 예수님의 모친마저 예수님을 오해하고 흔들렸다. 베드로의 충성도 인간적이었다. 십자가 지려는 예수님께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지 않았던가! 인간적으로는 충성이요 헌신이지만,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것이다. 예수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하였다.
1. 하나님 나라의 가족은 설사 인간관계에서 출발해도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세상은 모든 것이 인간관계 위에서 시작된다. 혈연, 지연, 학연, 동문 관계 같은 것을 통해 사회가 형성된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부모 자식, 형제, 친척, 동기, 동향, 동창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모든 이권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현대 회장 세습, 삼성 회장 세습 등등, 포기한다 하지만 그런 역할이 아주 강하다. 3공화국에서 6공화국까지의 경상도 실세, 그 후에 전라도 실세 체제, 지방까지 진영논리, 무슨 조폭 무리들도 아니고, 아직 ‘네 편, 내 편’의 소속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럴 수 없다. 개인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를 넘어서야 하나님 나라가 된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가족을 보았다. 어찌 보면 냉정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가족에 대해서 그렇게 차가울 수가 있으실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혈육의 가족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규정된 뒤의 가족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가족들을 전제하고서, 그 후에 육신의 혈육관계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것을 오해한 그 형제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어떻게 우리 형님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었다. 요7:5절을 보면, 놀랍게도 예수님 동생들의 불신앙을 전해준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 가족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 혈연관계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를 믿지 못했다. 지연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생각, 인정을 넘어서야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물론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예수님 동생들은 믿음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나중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교회생활, 사람 좋아서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친척이나 가족 때문에 믿는 것도 한계가 있다. 믿음 없는 모태신앙, 형식주의로 말만 앞세우는 신앙자 된다. 믿음 없이 오래 믿은 신앙, 문제가 된다. 주인노릇 하면서 말만 앞세우지, 헌신하지 못하고 교회와 후배 신자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못한다. 옛날 구호물자 받아 쓰고 미국이 고마워서 예수 믿겠다고 한 사람들, 거기에서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교회의 암적 요소가 되었다.
2. 예수님의 가족은 영적인 관계에 기초하여 있다. 50절,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예수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다. 우리 부모님이 열심히 믿으니까 천국 가겠지, 잘못된 생각이다. 세상에서 부부가 되었으니 천국에도 같이 가겠지, 오해다. 인간관계를 넘어서서 영적 관계를 세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다. 그 가치와 그 소망을 따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누가 믿으니 나도 믿는다, 나는 모태적 신앙이다, 이런 생각들은 예수님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은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이다. 예수를 받아들인 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씨앗이 심긴 것처럼 예수 복음, 예수 가르침, 예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 잘 아는 사람이나, 형식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이 예수 가족인 것이 아니다. 교회 등록한 사람이 예수 가족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 뜻대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이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예수 가족이다. 종교 행위에 걸맞는 생활, 사회 행위, 인격이 따라야 진정한 예수님의 가족이다.
3. 예수의 가족은 천국 동창생이요 순교의 동지이기 때문에 혈연이나 지연과 비교할 수 없다. 세상 가족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가족이다. 세상 동료나 동지는 알았을 때부터 갈라지기 전까지다. 죽고 못 사는 애인도 다른 애인 생기니까 너무 어색한 관계가 된다. 그러나 예수의 가족은 죽음 이후까지 함께 간다. 예수 가족은 천국 동창생이다. 세상 그 어떤 관계보다 심오하고 영원하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된 것을 기뻐하자! 한 믿음을 가진 형제 자매, 한 진리의 길로 행하는 신앙 가족은 영원하다! 그 어떤 것도 깨뜨릴 수 없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뢰와 도움을 줄 수 있다. 돈을 빌려주거나 애를 봐주면 좋은 친구나 이웃이 된다. 그러나 영적인 도움, 서로 기도해주는 이웃은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다. 예수 믿고 이웃이 되니, 정말 어려울 때 순수하게 돕는 것은 그 사람뿐이더라. 이해관계나 친소관계를 떠나서 믿음으로 사귀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 가족은 누구냐? 49절,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원문에는 ‘볼지어다’로 되어있다. 강조하는 말씀이다. 천국 가족은 혈연에 의하여 이뤄지지 않았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사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가르침에 입각한 사람들이 천국 가족이다. 이것은 거듭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놀라운 말씀’이다.
예수를 믿으면 친구의 개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에 그렇게 친하던 친구가 가까워지지 않는다. 참 복음을 알게 되면 피를 나눈 형제도 옛날처럼 되지 않는다. 참 우정은 영적인 데서 시작한다. 영적으로 맺어진 우정, 그것은 설명할 수 없이 깊고 오묘한 것이다. 진정한 부부는 영적으로 맺어진 부부다. 처음에는 섹시하여, 육체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연애하다가 부부가 된다. 그러나 오랜 세월 신뢰하며 살다보면 마음이 형제처럼 통하고 늘 대화가 그치지 않는 마음의 부부가 된다. 그러나 진정한 부부는 영적으로 맺어진 부부이다. 한 사람은 예수를 바로 믿고 한 사람은 잘 믿지 않는 부부는 영적으로 일치감이 없으므로 갈등이 많다.
영적인 관계가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영적인 가족끼리 상처받으면 그 상처가 아주 크다. 그래서 예수 믿는 가족끼리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믿는 사람끼리 상처받으면 그 상처가 아주 깊기 때문이다. 우리는 혈연으로, 지연으로, 학연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가족이다. 누가 나의 어머니며 내 형제들인가? 오늘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진리가 여기 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다 우리 형제요 자매요 진정한 우리 가족이다!
우리 가정은 어디 있는가?
명절을 앞에 두고 우리의 마음이 적어도 한번 이상은 가족을 돌아보시기 바란다. 가족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말없이 조용히 계시는 분들도 있다. 여러분에게 다시 묻는다. ‘여러분 가정은 지금 어디 있는가?’ 행복하고 화목한데 복음이 없는 가족이 있다. 어찌 보면 믿음 없이 아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가족이기 때문에 구원에서 제일 멀리 있는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평안하고 행복하다고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알고 있는가, 그러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 돌아보기 바란다.
복음도 없고 화목도 없는 가족도 있다. 아까 처음 말한 영화 <가족의 탄생>에 나오는 가족 같이 한마디로 풍비박산 난 가족이다. 그러나 용납과 사랑으로 그 가족들 안에 있는 따스함과 사랑을 이뤄내는 가족으로 탄생한다는 것 아닌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딴 식구 탓하지 말고 나부터 역할을 하자. 여기에서 경험적으로 중요한 것은 가족의 재탄생을 위해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준비 없이, 기도 없이 가족 문제 해결한다고 냅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어쩌고 하면서 전도해 대면 정말 가족이 돌이킬 수 없게 절단날 수도 있으니, 자연스럽게 시간이 무르익기를 기다려, 때가 되면 조금 용기 있게 가족 사랑으로 회복하기 바란다.
복음이 있으나 화목이 없는 가족도 있다. 이런 가족도 정말 난감한 가족이다. 가족들 가운데 장로 권사도 있고,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 목회자도 나온 가정인데 화목하지 못하다. 여러분! 그럴 수 있다. ‘우리는 망한 가정이야, 예수 복음이 있는데도 이렇게 화목하지 못하다니!’ 하면서 너무 실망하지 말라! 화목케 하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나부터 시작하여 화목을 이루라!
복음이 있어 행복하고 화목한 가족이 있다. 교회 왔다가 살짝 가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말씀 듣고 예배하는 복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내 형제요 자매요 아비를 교회 안에서 만나게 하시는데 그런 복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 가서 위로받을까? 누구를 붙잡고 내 마음을 토해놓을 수 있을까? 예수의 형제요 자매, 천국 가족을 회목하기 바란다. 복음이 있고 복음대로 살고 있으면 진정한 행복과 화목이 있다.
가족을 구원하라! 종처럼 섬기고 인내하여 가족의 영혼을 얻으라! 우리에게 주님이 맡겨주신 지상명령은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복음 전하는 일이다. 이기적이지 말고 서로 배려하는 이타적인 관계를 지키면서, 서로 상처받지 않도록 말이나 행동에 덕을 세우자.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뭉치자. 정직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죄인으로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 좋은 척, 은혜 받은 척, 뭘 좀 아는 척- 교만하지 말자. 예수 중심으로 뭉치면 갈등이나 왕따가 생기지 않고,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끼리 감싸며 잘 적응하고 함께 성장하며 치유할 수 있다. 너무 비판만 하지 말고, 좋은 점들을 인정하고 찾아주면서 <가족의 탄생>! 예수의 가족을 잘 이루어 가자.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