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 설교일 | 2025-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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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말씀 | 마가9:24-29 |
| 설교제목 | 지금 필요한 부흥 |
지금 필요한 부흥
막9:24-29
2025년 11월 23일 [성령강림 마지막/ 왕국주일]
부흥이 필요한 시대이다. 긴급하게 필요하다. 교회가 코로나 펜데믹 이후로 출석이 저조하고 젊은이들의 참석률이 눈에 띠게 줄어들어, 이제 젊은이들은 복음에 있어서 ‘미전도종족’이 되고 있다는 한탄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교회에 붐을 일으키기 위하여 참석률을 늘리고 숫자의 증가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 않는다. 숫자를 늘리기 위해, 교회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전도하고 부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흥이 필요한 것은 우리들의 내적 요구와 관련이 있다. 우리의 속사람이 치유가 필요하다, 우리의 내면의 삶에 하나님의 빛이 비취어야 한다. 이런 일을 위해 우리는 부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영혼의 구원이 필요한데, 교회는 어느 시대보다 어려움에 맞닥뜨려 있다. 그 영적 위기와 실제적인 어려움을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세속화의 높은 물결을 감당하기에 힘들다. 마치 바람 많이 불면 배가 바다에 뜨기 힘든 것처럼, 현대라는 삶의 상황은 세속화의 바람이 불어 얼마나 파도가 높은지 모른다. 물질문명, 쾌락풍조에 젊은이들이 미혹되고 있다. 인간존중과, 개인 삶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 그리고 성의 개방을 비롯한 쾌락의 극대화를 이루려는 세상 풍조를 우리는 세속화라고 부르는데, 이 세속화의 물결이 얼마나 거세고 높은지 어린 아이들도 세속화의 휩쓸리고, 청소년들도 세속화의 물결에 빠져 영혼이 죽어버리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장년들도 물질문명, 쾌락풍조에 물들어 방탕한 세상을 이루고 있다! 그 세속화의 쾌락풍조를 타지 못하는 이들은 이 세대에서 소외되어 있고 바보취급을 받는다.
둘째, 교회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어느 때보다 강한 사실이다. ‘개독교’라는 비난이 있고, 일부 지도자들의 막말과 윤리적인 실수 때문에, 언론도 결코 교회를 돕지 않는다. 이맘 때쯤이면 예전에는 성탄노래가 방송에서 들리고, 크리스마스에 상인들도 특수를 꿈꾸고 들떠있는 때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인가 성탄절에 캐롤을 방송하지 않기로 하였다. 서양과 미국 중심의 문화 때문에 차별이 있어서 성탄노래만 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말 좋은 노래, 재미있는 성탄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 시대가 교회와 복음을 냉대하기 시작했다.
셋째, 변화된 시대에 새로운 영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전통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에, 구 전통만을 고수해서는 안 되고, 새로운 영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지금 디지털시대, 반짝이는 영상들이 휘황찬란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는 영혼 구원을 위한 새로운 컨텐츠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아날로그시대 중에서도 제일 구식 아날로그를 보여준다. 이런 옛 시절의 신비주의, 열광주의, 골통 보수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 영적인 궁핍함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봐야 한다. 교회와 성도들은 이 번쩍이며 움직여나가는 인공지능 AI시대에 10초 안에 세상 모든 궁금증들에 대답하며 새로운 문장과 영상과 음원들을 제공하는 세상에 사람들이 살면서도, 저 멀리 계시는듯하나 우리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소식을 듣고 싶어하는 궁핍함이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의 순진한 눈매는 아직도 말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 소식을 듣고 싶어하고, 인생을 고민하는 청소년 청년들도 복음이 우리 속사람을 어떻게 새롭게 할 수 있는지 듣고 싶어한다!
웨일즈 부흥운동을 비롯한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이 있었고, 한국에는 1910년대에 시작되어 6-70년대에 극성을 이루었던 부흥의 역사가 있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이례적인 방법으로 목사들을 통하여 부흥의 열기를 일으키셨다. 최근에는 웨일즈 부흥운동을 닮은 부흥운동, 말씀선포운동과 기도운동의 강력한 흐름이 미국의 대학가에서도 일어났다. 미국의 켄터키주 시골마을의 에즈베리대학은 웨슬리 계열의 보수적인 신학교로서, 한국의 성결교인들과 감리교인 지도자들이 유학을 가는 대학인데, 여기서 지난 2023년이후로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나서 1천 석에 못 미치는 예배실에 학생 교수 일반인까지 차고넘쳐 1500명이 넘는 대단한 인파가 아침에도 모이고 밤에도 모여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대단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교회 안으로도 말씀과 복음에 대한 열정이 시들어가고 있는 중에도, 죽어가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갈급한 움직임들이 있다! 부흥이 긴급하게 필요하다!!
약국에 한 사내가 들어와서 말했다. “딸꾹질 멎게 하는 약 좀 주세요.” 약사는 “예! 잠시만요.” 하면서 약을 찾는 척하더니 갑자기 사내의 뺨을 한 대 갈겼다. 그리곤 히죽거리며 말했다. “어때요? 멎었죠? 딸꾹질은 놀라게 하면 멎거든요.” 그러자 사나이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약사를 한참 바라보더니, “나 말고 우리 마누라가 딸꾹질한단 말이야.”(알파유머집, P.181) 엉뚱한 사람에게 맞지 않는 처방을 내리지 말고 제대로 적중하는 말씀적용을 하라!!
불평이 있는 세상, 원망하는 사람들
언젠가 감리사로 있을 때, 지방 안의 어느 교회 교인들이 나를 한번 만나자고 하였다. 그랬더니 자기 교회와 목사님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건 이래서 문제고 저건 저래서 문제라는 거였다. 결론은 자기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는 목사님 때문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감리사가 지방 교회를 치리하는 지도자인 건 사실이지만, 그런 민감한 문제에 개입하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듣다보니 가장 문제는 그걸 얘기하는 사람들 자신인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인생은 죄를 이기지 못해 원망하며 불평하며 산다. 이것은 태초에 아담이 뱀의 불평에 동조하고 함께 하였다가 하나님을 배반하게 된 데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삶에도 원망과 불평은 나타나게 마련이다. 성도의 삶에 부흥이 그치고 침체와 갈등만 일어날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매사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다. 모세 때 므리바는 광야에서 백성들이 불평하던 곳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반석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다. 므리바는 불평, 다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훗날 그곳은 ‘광야의 샘’이 되었다.
불평은 다툼을 일으키고 우리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 간다. 히브리 백성들도 광야에 물이 없어 불평하다가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라고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똑똑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불평하는 마음 때문에 교회를 떠나거나 세상을 원망하면서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본문은 어떻게 불평의 장소가 샘물 나는 곳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불평이 왜 일어나고, 어떻게 극복되었는가? 여러분에게 불평과 다툼이 있다면, 므리바의 기적이 나타나 기쁨의 샘이 솟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을 이어 읽어내려가면, 막9장 29절,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9장 처음은 변화산 사건이 있다. “따로 높은 산에!” 변화산 경험과 귀신들린 아들의 치유는 연결되어 있다. ‘따로’의 경험과, ‘높은 산’의 체험이 아들을 낫게 하는 능력을 가져왔다. 이 소년 안에서 현대교회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 안에서 오늘날 교회를 본다. 여러분, 은혜를 사모하라! 부흥을 회복하라! 높은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바라보라! 현대의 영적 요구에 대처하는 데 제자들은 무능하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들도 변화산에 올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보는 데 소홀하였다. 제자들 심령의 부흥은 하나님을 거룩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매일 새벽기도를 통해, 개인 QT 묵상시간을 통해, 찬양의 경배와 묵상을 통해 “따로 높은 산에 오르라!” 그런 것이 쌓이면 부흥의 회복이 이뤄질 것이다.
여러분, 따로 높은 곳에서 기도하는 것이 영적 부흥을 위해 필요하다. 지난 금요일까지 <다니엘기도회>가 있었다. 우리교회는 연말의 여러 일정, 특별히 전도축제를 위해서 한 주간의 일정만 동참하였다. 사모하는 이들 중에는 나머지 두 주간을 지하기도실에 나와 기도하였다. 여러 극한 체험들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권능을 체험하고 믿음으로 더욱 굳게 서서 주어진 인생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떠한가? 우리 시대에 사람들이 세속적이고 욕심만 차리며, 자기 중심적인 것 같아도, 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받아서 부흥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바램이 있는 것이다.
“이런 종류”: 29절 말씀에 ‘이런 종류’라는 말씀이 있다. 그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주님의 말씀이다!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냈다. ‘이런 유’는 세상 주관자들과 악의 영들이다. 지난 주간 금요일 새벽기도 시간에 요한계시록을 읽는데, 마귀의 존재가 분명하게 계시록에 나타나더라! 마귀는 타락한 천사요, 믿는 이들을 넘어지게 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세다! 원래 악을 전문적으로 저지르는 존재라 새까맣게 흉하게 그려서 무시하기 쉽지만 사실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어려운 존재다. 마귀에게 속한 ‘이런 종류’가 나가려면 예수가 우리 안에서 일하셔야 한다. 영적 부흥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이런 종류’를 물리칠 수 있다. 너무 성급하게 문제만 해결하려 하지 말고, 영적 본질을 보아야 한다. 교회가 질병, 재난, 돈 문제 등, 표면적인 것만 보고 해결하려고 덤빈다.
깊이 통찰해야 한다. 이 시대는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참된 진리, 하나님 그 분과의 만남과 돌봄이 필요하다. 우리는 절대 마귀에게 속한 ‘이런 종류’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우리 속사람이 참된 변화, 참된 부흥을 일으킬 때 ‘이런 종류’는 오뉴월 눈송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나갈 수 없다.”: 부흥은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 죄된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깨끗이 씻어 정결케 되는 것이 부흥이다. 성급한 실천주의, 당장 효과를 보려는 신비 기적주의가 참된 영성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종류가 왜 우리에게는 나가지 않습니까? 왜 우리 삶이 이토록 무너지고 돌이킬 수 없이 되도록 그냥 방치해 두십니까?’ 그럴 때가 있다. 도무지 욥처럼 무슨 잘못도 없이 당하는 ‘의인의 고난’ 앞에서 우리는 무너질 때가 있다. ‘나갈 수 없느니라!’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조급하지 말고, 깊이 통찰하고 기도해야 한다. 사람 속에 있는 악의 문제이다. 아무리 영상이나 인터넷을 활용해도 깊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 예수만 전하면 되는 게 아니라, 예수가 의미있게, 효과있게 이 시대에 전해져야 한다. 말씀만 전하고 예배만 드리면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내 흔들리는 삶의 깊은 바탕을 밝혀 주님 앞에 나를 드려야 말씀과 만나지는 참된 치유가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 먼저 깊이 자신의 죄됨과 흔들리는 상태를 통찰해야 한다. 하나님 보좌 앞으로 깊은 죄의 문제를 가지고 정면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때 나 실존과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으로 참된 부흥이 내 심령으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불평은 하나님의 복을 사라지게 만들고 저주를 퍼뜨리는 독약과 같다. 불평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라! 두 분의 간증을 소개한다. 불교를 믿는 가정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어느 여성도는 어릴 적에 절에 꾸준히 다니다가 결혼하여 유교적인 생활을 하면서 교회와 거리가 멀게 살았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을 잃는 비극을 겪은 뒤에 악귀에게 시달려 많은 고통을 받았다.
절에 열심히 다니던 어느 날, 남편이 종교를 기독교로 바꾸면 좋겠다고 하면서 교회를 정하라고 하였다. 여러 가지로 고민하다가 교회를 나가기로 결심하고 한 해 동안 절에 가서 개종하겠다고 하면서, 아무 탈 없게 해달라고 부처에게 빌었다. 이듬해 첫 주부터 교회를 다니는데, “아멘, 할렐루야!”를 해야 할 때에 자기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이 나오고 교회 앞자리에서 항상 졸고 있었다. 목사님 설교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럴 때, 늘 하게 되는 것이 불평과 원망이었다. 무거운 발을 끌다시피 하여 주일날 교회로 나오려니 너무도 힘이 들었다. 다시 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교회를 다니자니 불평만 생겨났다. 그때 이런 생각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이제 절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으니, 아무리 어렵더라도 열심히 다녀야겠다.’ 1년이란 세월을 최선을 다하여 교회를 다니니까 발에 돌맹이 같던 무거운 것도 떨어지고 목사님 설교 말씀이 마음에 부딪히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예배가 은혜가 되니까 교회 다니기가 쉽고 즐거워지기 시작하였다. 부흥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가족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이 모든 면에 어려움을 주었는데, 그때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찔림이 있어서, 예수님께 회개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해지면서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 가겠다고 부처에게 벌주지 말라고 빈 것이 그렇게 부끄럽게 여겨져서 회개하였다. 이런 변화가 일어난 후에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냈다고 한다. 특히 절에 다니는 사람에게 자기 경험을 얘기하며 전도하면 그렇게 전도가 잘 되었다.
또 한 분은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주일학교, 중고등부 청년부에서 교회 생활을 계속하던 이인데, 안 믿는 남편을 만나 예수 믿기로 약속을 받고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하자 핑계만 있으면 주일을 범했고, 자기도 아이 둘을 낳고 직장생활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결혼생활 속에 아무 기쁨이 없이 불평스런 생활을 했다. 남편은 7남매의 맏이로서, 부모님을 모시고 시동생, 시누이들과 함께 지냈다. 항상 불평으로 가득 찬 생활을 하면서 남편과 시댁 식구들을 원망하였다.
하루는 예수 믿는 직장 동료가 그리스도인이란 걸 알고 자기한테 “구원받았어요?” 물어보았다. 무어라고 대답하려 했으나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과거엔 성가대원으로, 교사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했는데, 자기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고민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많이 하시는 권사님과 처음 교회를 다니게 된 시어머니와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권사님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며 회개하라고 하셨다.
입을 벌려 믿음 없이 산 것, 원망하고 불평한 것을 회개하는 기도를 하기 시작하자 눈물이 쏟아지면서 방언이 터져 나왔다. 눈물 콧물이 뒤범벅되어 기도를 마치자 기쁨이 마음속에서 샘솟듯 솟아나왔다. 그 후에 성경을 읽으면 그렇게 재미가 나고 다 알아지고 깨달아지는 은혜가 있었다. 아무런 환경과 상황은 변하지 않았으나 자기 자신이 변화되었으므로 항상 기쁨이 넘쳤다.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기도, 혹은 (어떤 사본에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중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영적인 깊은 통찰, 하나님과의 진정한 소통이 필요하다. 부르짖어 기도하고 나를 깨뜨리고 다가감이 필요하다.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를 내려놓고 멈추어 하나님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것이다. 정신을 차려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기까지는 그런 유의 난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다음 주에 우리는 전도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려 한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만 데려와서는 안 된다. 사람들을 데려와 이 흔들리는 시대에 든든한 반석이신 하나님께 피하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은 죽음에서 건져주며, 멸망당할 죄와 질병에서 고침받도록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시급하게 부흥이 필요하다.
이 아이의 아비와 같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렇게라도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실 때 이 불쌍한 소년이 고침받았다. 참된 부흥만이 교회를 고치고 사회를 변화시켜 구원할 수 있다. 귀신은 예수에게서 쫓겨났다! 부흥은 긴급하다!! 여러분의 속사람이 부흥되어야 한다! 여러분의 내면에 있는 어둠이 물러가고 빛으로 채워지는 부흥이 일어나야 한다! “주여, 우리에게 부흥을 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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