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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정신 (신5:12-15) [성령강림후 둘째, 평신도주일]
2018-06-02 22:02:54
박신진목사
조회수   261

안식일 정신

5:12-15

201863[성령강림후 둘째, 평신도주일]

 

제가 오늘의 성경 본문 4개 중에서 이 안식일 계명을 택할 때, 제 마음에는 요즘 성도들이 주일성수를 많이 못하니까 이 말씀을 택하여 전해야겠다, 그래서 주일성수를 잘 하도록 설교해야지,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계명을 꼭 지켜야 잘 된다는 율법적인 의도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라는 안식일 계명은 믿는 이의 기본 되는 계명이요, 신앙생활을 잘 하는 데 있어서 아주 필요한 율법인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율법과 계명으로 몰아가는 율법주의가 문제이지, 사실 율법은 매우 유익한 가르침이요, 계명은 우리가 지킴으로 복을 받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 계명도 우리가 지켜야 할 중요한 계명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신명기의 오늘 본문 말씀과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 그리고 창세기 2장의 처음 안식일을 정하실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읽고, 그 말씀들에 관한 글들을 읽을 때, 제가 정말 중요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저는 앞으로 안식일에 대하여 더 많이 배워야 하겠다고 생각했으며, 안식일 정신을 따라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그런 생각들을 안식일 정신이란 제목으로 좀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함께 귀기우려 듣기를 바랍니다.


  

 

주일 아침이면 보통 집안에서 교회 가기 싫어서 투정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아이고, 피곤해! 이번 주일에 좀 쉬면 안돼요?” “엄마, 나 교회 가기 싫단 말이야! 컴퓨터게임 조금만 더 하고, ?” 이런 식입니다. 아이들이나 젊은이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인들의 영적 상태가 이렇게 점점 주일을 지키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등산 가고 싶고 여행 가고 싶고 친구들 만나 놀고 싶고, 밀린 일을 하거나 쉬고 싶고 차라리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주일에 교회 가는 일은 당연한 권리요 기쁨이 아니라 지루한 의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주일 지키는 일, 안식일 성수가 더 이상 즐거운 일이 아니라, 한 주간 인생살이에 시달린 우리를 또 한 번 힘들게 하는 고되고 지루한 일이 되고 만 거죠. 주일성수 안 하면 뭔가 찜찜하여 주일을 지키기는 하는데, 별 재미와 의미를 못 느끼는 겁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신자이면서도 아주 용감하게, 거침없이 주일에 교회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만 있으면 주일을 빼먹는 것을 당연시하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일 년 동안 주일에 빠질 이유를 적어보았더니 52개가 넘더랍니다. 매 주일 빠질 이유가 있다는 것이죠.

 

또 주일과 관련하여 토요일 안식일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집요하게 따지고 듭니다. 안식일이 유대 전통대로 정확하게 토요일, 일곱째 날이어야 할까요? 아니면 부활 기념일이라고 하는 일요일, 즉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이라고 한 날로 해야 할까요? 두 쪽 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또 들어보면 두 쪽 다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결정적 사건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주일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그치고 쉬신 안식일 정신을 지키기 위해 하루를 쉬고 엿새를 다르게 사는 삶의 리듬이 중요한 것이죠. 일주일의 하루를 안식일로 구별하고 엿새 일하고 하루 쉬기라는 하나님의 창조리듬이 우리 몸에 배게 할 수 있도록 그날을 충실히 지키는 일이 중요한 것이지, 일요일 토요일이 중요한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교회의 전통을 따라 부활기념일을 주의 날(Lord’s Day)로 정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주일성수 전통을 선택합니다.

 

 


제가 이번 주일 설교를 준비하다가 오래 전에 사놓은 안식이라는 책을 다시 조금 보았습니다. 캐나다 밴쿠버의 리젠트대학에서 가르치는 마르바 던이라는 여성학자의 책입니다. 그녀는 48년생이니까 지금 70세인데, 독신이고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많은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입니다. 십대 시절에 홍역 바이러스로 췌장이 망가져서 늘 질병과 싸워야 했고,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데 한때 나머지 한쪽 눈도 실명할 뻔했다가 겨우 살려놨답니다. 45년 당뇨, 두 다리는 불편하여 혼자 걷지 못하고 극심한 저혈압에 시달리고 있으며 하루에 11번 약을 먹어야 한답니다.

 

제가 마르바 던의 병 얘기를 구구하게 하는 것은, 그런데도 마르바 던은 병중에도 건강하게 사는 비결을 성경에서 배웠으며, ‘안식위로라는 책을 비롯하여 여러 책을 써서 세계적으로 엄청난 독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정열적으로 위대하게 살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녀는 신학교에 머물러 있는 신학자가 아니라 30년 이상 성도들과 불신자들과 함께 하나님 뜻을 묻고 가르친 현장신학자요 교사와 음악가라는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마르바는 이 안식이란 책에서 자기를 그렇게 병중에서도 에너지가 넘치도록 했던 것은 젊어서부터 안식일 정신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일주일의 사흘은 안식일의 기쁨을 되새기며 살고, 후반 사흘은 안식일을 기다리며 고대하는 생활을 하고, 안식일에는 그날이 주는 기쁨과 위로에 감격하며 산다고 합니다. 여러분, 도대체 성서가 말하는 안식일 정신이 무엇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안식일은 멈추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창세기 22절 앞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엿새 동안 하시고 일곱째 날 일을 멈추신 것이 안식일입니다. 원래 안식일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샤바트입니다. 그 말의 원뜻은 그치다, 멈추다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멈추셨다, 그치셨다는 것이지요. 레위기 233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요즈음은 일주일의 닷새를 일하고 주말에는 대부분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일을 하거나, 바깥에 놀러가서도 일하듯이 놉니다. 멈추지 못하는 겁니다. 낚시를 하면서 물고기 잡는 것과 풍경을 즐기지 않고, 왜 안 잡히냐고 안절부절 하다가, 못 잡거나 기대보다 작은 물고기 몇 마리 잡았을 때, 화를 내고 실망을 하는 것을 보여주는 주말 TV 프로그램을 봅니다. 이걸 보면 낚시도 일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성과에 급급하고, 뭔가를 성취하는 데 몰두하여 주말도 일을 멈추는 날이 되지 못합니다. 직장에 나가서 월급을 받기 위해 일하는 것 못지않게, 집에서 해야 하는 일도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엿새 일하고 하루 쉬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해요, 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돌린다고 마냥 돌아가는 부속품이 아니어요! 마르바 던은 많은 병을 가진 환자라고 아까 말씀드렸지요? 그녀는 토요일 저녁 식사 때부터 안식일 정신을 가지고 하루를 쉬기 위해 일을 멈춘답니다. 꼭 두 개의 촛불을 켠다네요. ‘지키다기억하다를 상징하는 촛불을 켜고 바쁜 일들을 다 멈추는 거예요. 강의 재료나 연구하던 책들을 아주 보이지 않는 책장 속이나 구석으로 정리에 두고, 토요일 저녁에는 평소와는 다른 음식을 먹으면서 아무리 바빠도 절대 일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답니다. 그렇게 토요일 저녁부터 주일 저녁까지 하루를 완전히 멈추고 나면 그렇게 즐겁고 신선해지고 힘이 나며 창조적이 되어 주일밤에 깊은 잠을 잘 수 있고 월요일이 되면 갑절로 힘있게 일할 수 있다고 합니다.

 

주일에 마르바는 교회에 나가 평소 하지 않는 일, 일이 아닌 것, 오르간을 치거나 찬송을 부르거나 바빠서 하지 못했던,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답니다. 그가 박사과정을 할 때 얘기를 읽었는데, 도서목록을 준비하고 보니 박사과정 할 때까지 매일 하루 한권씩 읽어야 할 만큼의 분량이더래요. 그 책들을 다 읽고 정리하여 박사논문 자료를 준비하는 일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고 시간에 쫓기는 일이었겠어요. 그런데도 주일에는 아무리 바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답니다. 하루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주간의 반은 주일에 쉰 것의 그 여유로움과 자유를 누리면서 감당했고, 나머지 반은 이제 주일에 쉰다는 위로를 미리 받으며 작업했다고 해요. 스트레스가 많고 일이 바쁠수록 하루 멈추는 것이 주는 해방감을 더 크게 느꼈다고 합니다. 안식일의 정신은 바로 그런 것이지요!

 

간호사나 소방대원, 3교대 일하는 산업전사나 목사나 교회사역자들은 주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안식일을 지키는 데 있어서 율법주의적 태도를 버려야 할 것 같아요. ‘하기 싫지만 주일성수도 해야 한다는 것 말이어요. 주일은 그치고 멈추는 날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주일도 일해야 한다면 나만의 안식일을 지혜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창조와 안식의 리듬을 살려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태초부터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죠. 만약 주일에 쉴 수 없다면 잘 조절하고 주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죠.

 

저도 목사로서 거의 설교를 일처럼 합니다. 안식일 정신설교도 지난 주간이 유난히 바빠서 사실은 토요일 밤까지 쫓기듯 설교문을 써야 했어요. 정말 안식일 정신이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박 목사야, 일하듯 설교와 예배인도를 하지 말고 복음의 자유 안에서 일을 멈추고 쉬듯이 사역하라!’ 그런 하나님의 목소리를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일하듯이, 성과를 내려고 전전긍긍하며 교회 사역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역에 내가 부름 받아 쓰임받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쁨입니까! 이것은 스트레스 받고 분주한 내 일을 멈추고 쉬는 것입니다. 같은 사역을 하더라도 일하듯 하지 말고 일을 멈추고 복음의 자유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둘째로, 안식일은 쉬는 날입니다. ‘일곱째 날 안식하시니라.’(2:2)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2:3) 노동은 그치는 것은 쉼입니다. 이 쉼은 하나님, 사람, 동물, 심지어 땅에도 적용됩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우리는 쉬어야 합니다. 일을 그치고 멈추는 것은 쉬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으로 쉬어야 해요. 아기들이 웁니다. 우리 외손자 태오도 울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애엄마 우리 딸이 아기 우는 걸 영상으로 찍어 보냈어요. 왜냐하면 울어도 귀엽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해주고 돌보아주는데 왜 울까 하고 보았더니, 엄마가 안아주지 않아서입니다. 우리 외손자는 한 주간에 이틀을 데이케어어린이집에 갑니다. 그때도 웁니다. ? 엄마의 품을 하루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시설이 잘 되어 있고 너무 잘 돌보니까, 금방 울음을 그치고 잘 놉니다. 그러면서도 엄마 곁에서 뱅뱅 돌면서 엄마품이 그리워 하루에도 몇 번씩 웁니다. 아기만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아기예요. 하나님이 그리워 마음으로 외로워하고 웁니다. 하나님 품이 아니고는 진정한 만족이 없어요. 그래서 주일에는 모든 것을 멈추고 하나님 품에서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하고, 하나님 품에서 주님과의 단절을 이겨내고 주님 안에 하나 되는 시간과 체험을 많이 가져야 사람다워집니다.

 

교회음악을 들으면서 아빠이신 하나님의 무릎에 앉아 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느껴보세요.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손길을 체험하셔야 합니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주일에 주님 품안에서 쉼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꼭 안아주심을 사모하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품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사랑해주십니다! 안식일에 쉼의 영성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사막 같은 인생의 이 길로 지루한 여정을 끝까지 기쁘게 갈 수 있을까요! 주일에 쉬십시오, 아버지 집에서 참으로 안식하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엿새 일하고 하루 쉬도록 지으셨습니다. 하루는 멈추고 쉬면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미식축구팀 가운데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포티나이너스라는 이름을 가진 명문 팀이 있지요. 1849년에 미 서부에 황금노다지를 캐내려고 골드러시를 이룰 때, 샌프란시스코를 개척했던 49년도의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때 서부로 서부로 마차를 타고 달려간 ‘49년도의 사람들에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한 부류의 사람들은 주일에도 쉬지 않고 마차를 달려간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주일은 쉬면서 엿새만을 달려간 사람들이었다고 해요.

 

처음에는 주일에도 쉬지 않고 달린 사람들, 칠일의 칠일을 달린 사람들이 물론 앞섰겠죠. 칠일의 엿새는 달리고 하루는 무조건 쉬면서 하나님을 예배한 사람들은 하루 달릴 거리만큼 뒤쳐져서 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멀찌감치 앞서가던 주일 질주파들이 점점 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말이 병이 들었고, 멈추지 않고 달려가던 이들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싸우거나 문제가 생겨 멈출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에 비하여 주일 성수파들은 하루 쉬고 싱싱하고 건강해져서 더 열심히 달리다보니 서부에 이르렀을 때에는 주일 성수파들, 칠일 중 육일만 달린 이들이 먼저 도착하여 금을 차지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이 물론 포티나이너스’(49‘s)가 되어 샌프란시스코 건설의 주인공들이 된 것이지요!

 

 


셋째로, 안식일은 예배하는 날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5:12)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하라.’(20:8) 마르바 던이 주일 전날 토요일 저녁 식탁에 지키라촛불과 기억하라촛불을 켜놓았듯이, 성서는 우리에게 멈추고 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경축하며 예배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명령과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경배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날입니다. 안식일 정신을 가지고 주일을 지날 때 우리는 바르게 예배해야만 합니다.

 

보통 예배를 사람들은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엄숙하고 형식적인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사실은 기뻐하며 경축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축제가 필요합니다. 축제는 사실 일상을 깨고 약간의 혼돈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질서에서 혼돈으로 갔다가 다시 새질서로 돌아오는 게 축제입니다. 농경사회가 목축사회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모내기 때 못밥 먹고, 풍년제때 잔치하며, 새끼 낳는 절기, 털 깎는 절기에 나름의 축제를 벌였지요. 그러나 산업사회, 정보사회는 축제가 들어갈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일을 작은 부활절로 지킵니다. 이날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경축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떨림을 회복하고 주님과 일치를 추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도 부활할 것을 꿈꾸고 바라봅니다. 육체를 가지고 현재에 살고 있지만 영원을 바라봅니다. 인생의 날이 저물면 영원한 항구에 이를 것을 기대합니다. 거룩한 음악이 있고,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타는 촛불이 있으며, 성령강림절의 배너가 붉은빛 가운데 성령의 임재 불꽃과 하얀 비둘기가 날아오릅니다. 함께 음식을 나누고 주 안에서 형제된 사랑을 고백합니다. 성찬의 포도주 가운데 우리 위해 흘려주신 사랑의 피를 기억하고, 그 떡으로 영적 배고품을 면하고 풍성한 식탁을 경험합니다. 참된 예배인 것이지요!

 

제가 원주에 있을 때, 체육대회를 엄청나게 거창하게 한 적이 있어요. 따로 연락하지 않았는데도 우산파출소에서 교회에서 무슨 일 났냐?’ 면서 단축마라톤에 경찰차를 보냈으니까요. 그럴 때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서 평소 주일에 거의 갑절이 되는 사람들이 예배드린 날도 있었어요. 경축입니다. 미국 이민교회들은 야외예배 때 그 도시의 교민들이 다 모여서 전도하는 날로 크게 북적입니다. 바비큐를 하고, 터치볼, 축구를 하며 구원받은 성도의 기쁨을 자연스럽게 고백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잠잠히 이 주일에 주님만을 바라보며 예배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안식일 정신을 가지고 주일을 지킵시다. 이 날은 멈추는 날이요, 쉬는 날이며, 하나님을 경축하고 예배하는 날입니다. 안식일 정신이 살아있게 하여 한 주간 한 주간 우리 인생이 활력을 얻으며 새 힘을 누리도록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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