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5-0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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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엡2:14-18 |
설교제목 | 형제들과 화목 |
형제들과 화목
엡2:14-18
2025년 1월 26일 [주현절 셋째/ 설 전 주일]
양력으로 새해가 된 지 4주째! 이번에는 음력으로 새해가 되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여러 나라들은 새해를 두 번 맞이한다, ‘이중과세(二重過歲)’다. 김현기목사 처남의 댁 될 이가 태국 사람인데, 태국도 설을 지내느냐 하니 안 지낸다고 한다. 그런데 태국에도 중국 출신 사람들은 음력설인 ‘춘절’을 지킨다. 한해 업무를 마감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신정과, 전통명절로서 떡국과 만두를 먹고 나물과 전을 먹으면서 쉼의 시간을 가지고 어울려 명절을 지나면서 가정을 돌아보는 음력설 구정이 있다. 오늘은 ‘설날을 앞둔 주일’이다. ‘謹賀新年’, “삼가 새해를 축하합니다!”
설에는 만두 빚고 전 부쳐먹다 보면 밀가루 음식을 먹는 경우가 많다. 이런 말이 전해져 온다. 국수와 국시는 같은가, 다른가? 어떤 사람이 국수와 국시는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맹글기 때문이다. 밀가루는 봉지에 담고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는다. 봉지는 가게에서 팔고 봉다리는 점방에서 판다. 가게에는 아주머니가 있고 점방에는 아지매가 있다. 아주머니는 아이를 낳고 아지매는 얼라를 낳는다.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되고 머스마 얼라는 아부지가 된다. 아버지는 국수가게 사장이 되고 아부지는 국시가게 사장이 된다. 그래서 국수와 국시는 출발부터가 아주 다르다 한다.
이번 주일 지나면 설 명절이다. 일찍 서둘러 고향에 가는 사람들은 벌써 어제 집을 찾아간 사람도 있다. 오가는 길이 설렘으로 가득 차있다. 출신이 어디냐, 집안이 어떠냐- 명절에는 이런 것들을 새삼 돌아보고, 가족들을 생각하게 된다. 혹시 ‘밀가루, 밀가리’ 논쟁처럼 쓸데없는 일로 갈등을 빚지 마시기를 바란다. 이런 때일수록 가정마다 식구들이 도란도란 둘러앉아 추모예배 드리며 평화와 행복을 가꾸어가기 바란다.
화목하지 못한 삶
오늘 본문은 에베소 2장 14-18절이다. 14절 말씀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라고 하셨다. 2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의식이 강했다. 자기들만 선택받은 백성이고, 할례받은 민족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며,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개처럼 대우하였다. 완전히 선민과 이방인은 화합할 수 없는 ‘서로 다른 둘’이었다.
마15:26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이방 여인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나온다. 가나안 수로보니게 여인을 개로 취급했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의 본심이 아니었다. 이방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보려던 것이다. 그 여자가 병고치려고 비굴하게 고개를 숙인 것인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치유를 간구하는 것인가 시험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방인들은 개처럼 취급되던 것이 그 당시의 상식이었다.
삼상 17장에 보면 소년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는 장면이 있다. 그때 다윗이 골리앗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아!”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할례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소년 다윗이 무시한 것이다. 에베소교회도 지금 터키 땅에 있는 교회로서, 이스라엘 본국이 아니다. 에베소교회도 이방인이다. 이방인이고 할례도 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방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방인이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언약의 표를 받지 못한 무할례자로서 개 같이 취급할 이방인인 것이다. ‘우리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구원의 영역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는 말은, 이미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런 우리들이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말하자면 십자가를 내주시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복을 받았고,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다.
러시아의 대문학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반역죄에 연루되어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죽음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집행관이 사형집행을 위해 총의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황제가 보낸 특사가 달려왔다. 그는 불과 몇 초 사이로 살아났다. 황제의 특사로 사형 집행이 정지되긴 했지만 감옥신세를 면하진 못했다. 그는 감옥 속에서 어느 여인이 준 신약성경을 읽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그의 일생은 달라졌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달라졌다. 하나는 죽을뻔했는데 살아났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을 믿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가 쓴 작품들은 지금도 세계인들의 사랑받는 소설들이다.
하나님과 화목함
아펜젤러는 한국에 복음을 전한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다. 1885년 4월 5일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제물포항에 첫발을 함께 내딛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이 우리에게 심겨져서 자랐다. 그리고 그 복음은 지금 이 나라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등불이 되었다. 조선일보 기자가 10년 전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 출신지역에 가서 취재하여 기사를 실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아펜젤러가 1885년 처음 한국에 올 때 몸무게가 80kg이었다.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런데 15년이 지난 후 안식년에 미국에 갔을 때 병원에서 몸무게를 재니, 60kg이었다. 한국 와서 15년 선교하는 사이에 20kg가 빠졌다.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이, 15년 사이에 폭 늙어 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1902년 충남 서천군 어청도 앞바다에서 배 사고를 당해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도, 사실 그는 수영을 할 수 있어서 살아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자기 성경번역을 도와주는 한국인 조수와 여학생을 살리기 위해 갔다가 물속에 잠겨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순교했다. 시신은 찾지도 못했다. 그래서 아펜젤러 선교사 무덤에는 시신이 없다. 비석만 있다. 이런 선교사들이 자기 목숨을 값으로 내어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 알게 되었으며, 믿게 되었고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우리는 본성이 죄로 물들어 있어서 하나님 속을 썩였던 사람들이었다. 온갖 죄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 하나님께 불편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나?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나? 이런 선교사들 때문에, 내게 말씀을 전해주신 목사님들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전해주신 복음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15절)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가 미신을 섬기고 욕심에 빠져 온갖 더러운 욕설과 거짓말을 일삼으면서 살았다. 예수 믿기 전에는 정초에 토정비결을 보고, 화투로 밤을 샜으며, 술취해서 싸우기가 다반사였다. 걱정거리가 생기고 병이 들면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했다. 과거에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하나님 없는 무신론자였다. 천국에서 제외된 백성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런 우리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다.
서로 화목함
그러면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으니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천국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듭난 자가 되었으니,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16절) 유대인과 이방인, 이 둘을 한 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여기 ‘화목’이란 단어가 나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유대인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이방인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목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으면 서로 화목해야 한다. 이번 설 명절에 서로 화목하기 바란다. 그것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서로 화목하라!”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16절상)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신 예수님이 우리 사이에, 이웃 사이에, 가족 사이에 화목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원수 되게 만들었을 뿐아니라 형제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죄 지은 아담은 하나님 대면하기가 껄끄러워 나무 뒤에 숨는다. 그리고 이어서 나타난 행동은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인한 것이다. 죄는 분리시킨다. 하나님과 분리, 형제와의 분리다. 그것이 죄다. 여기 예수님이 오셨다.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이 둘이 서로 화목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따르는 우리들은 이 명절에 형제와 이웃 간에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
당시 에베소교회에는 노예들이 많았다. 그런데 주인들이 노예들과 같이 예배를 드렸다. 신분 차별이 서서히 없어졌다.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 믿어 신분 차별이 없어지고 형제가 된 것, 이것이 기적이요 십자가의 능력이다! 미국의 16대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을 치러서라도 노예해방을 이루었고, 그것 때문에 인종주의자들의 미움을 받아 암살당했다. 인종차별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 예수 믿는 우리는 이 차별을 없애고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 형제 간에 작은 이해관계나 견해차이로 거리가 멀어지고 어색함이 있다면, 화목을 이루기를 바란다. 먼저 기도하고 나아가 노력하면 하나님과 화목한 우리를 서로 화목하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형제 사이의 화목
모든 종교의 최후목적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결국 사랑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사랑을 중시하는 종교는 기독교이다. 기독교가 태어난 유대교에서는 법이 가장 중요하다.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 뜻을 이룬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율법을 넘어서서 사랑이다. 순종이 이슬람의 핵심이라면 사랑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불교나 도교에서는 마음의 절대적 평화나 자연과의 조화를 구하지만, 기독교는 참된 사랑을 찾는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사랑으로 통합하셨고,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곧 사랑이라고 가르쳤다. 이 사랑을 이루게 될 때 우리 삶에는 평화가 이뤄진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7-18절)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고 더나아가 형제와의 화목도 이루게 하신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가족 안에, 형제 간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들이 있는가? ‘항상 양보하고 희생하기만 해도 화목이 잘 안되는군요’ 하면서 어려워하는 이들이 있는가? 아파트에서 충간소음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화평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사랑과 화목케하는 힘이 필요하다.
10년 전에 <사도>라는 영화가 TV에서 상영되었다.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서 8일만에 죽이는 내용이 있었다. 뒤주에 갇힌 세자가 갈증이 나니까 빗물을 먹고, 나중에는 오줌을 부채에 받아 마셨다. 유교 사회에서 부자유친인데 어떻게 임금 아비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가? 권력과 이익 앞에서는 인간관계가 다 무너진다. 영조는 손자인 정조가 어려서부터 명석하니 아들을 죽여도 후대를 이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들을 죽인다. 그것을 알게 된 정조가 훗날 임금이 되어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고 탄식한다. 화평이 이렇게 어렵다!
부부 간에도 화평을 잃으면 고통이다. 이혼률이 높아 가정에 많은 고통이 있기 때문에 결혼률이 낮아졌다는 주장도 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참으로 화목하게 되면 서로 화목하기 때문에 가정이 행복해진다. 결혼에서도 신앙이 중요한데, 요즘 부모들은 돈만 갖추어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당사자들도 그것을 잘 모른다. 여러분의 가정은 이번 명절을 지나면서 먼저 하나님과 회목하고, 나아가 가족들 사이에 화목을 이루시기를 축복한다.
생활의 구원과 복
미국의 부자들은 거의 기독교인들 아니면 유대교인들이다. 우리나라의 부자들 가운데도 기독교인이 많다. 이건 큰 축복이요 자랑거리이다. 유대인들은 박해가 심하니까 어디 가든지 회당을 짓거나 그것이 안 되면 가정에서 신앙을 철저히 지켰다. 어머니로부터 믿음과 생활을 배운 그런 유대인들 가운데 훌륭한 인물들이 수없이 많이 나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의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이 가문에 철저히 가정예배를 잘 드려서 하나님과 화목하였다. 로스차일드가 살 당시 세계 최고 부자가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라 잃은 것을 가슴 아파하며 옛날에 자기들이 살던 팔레스타인에 땅을 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 나라가 그 땅에 세워진다. 많은 나라가 있다가도 없어졌는데, 이스라엘은 2,500년 만에 나라가 다시 생겼다. 우리가 잘 아는 세계적인 부자 록펠러는 유대인이면서 크리스천이다. 그 부모님으로부터 신앙을 잘 전수받아서 사니까 그의 십일조신앙이 역사에 남았다. 로스차일드 가문보다 더 부자였다고 한다. 그 부가 수도 없이 계속 이어져갔다. 신앙과 부가 함께 전수된 가문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부자들도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6-70년대 우리나라 10대 재벌에 드는 크리스천 두 가정이 있었다. 엄청난 부를 소유한 가정들이다. 어머니가 권사님으로 기도 많이 하시던 분이셨다. 그런데 그 신앙이 전수가 안 되고, 완전히 나락으로 추락한 가정이 되었다. 또 한 가정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 장로였다. 그 가정이 믿음을 잘 지켜서 자녀들도 신앙을 이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은 믿음의 명문가문을 유지하지 못하고 부도 무너져버렸다. 아쉬움이 많다. 여러분의 가정은 구원의 신앙과 생활의 신앙을 함께 전수해가기를 축복한다.
행함으로 역사하는 믿음
우리의 믿음이 생활로도 연결되는 게 참으로 중요하다. 요한 웨슬리가 회심할 때는 모라비안들에게 은혜를 받아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하게 붙들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강조했던 믿음이다! 그런데 모라비안들의 믿음공동체 헤른후트를 방문해보니 모든 것이 다 경건하고 좋은데, 오직 믿음과 은혜만 강조하다보니 행함과 사랑의 실천이 약했다. 율법폐기, 행함 무시의 믿음인 것이다. 웨슬리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행함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을 강조하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애국은 지금 다른 민족과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 팔레스타인에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어렵지만 하나님과 화목한 우리의 믿음이 생활의 실천으로 나타나서 이웃들과의 화목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우리나라 크리스천들의 약점도 믿음으로 은혜를 받아 하나님과 화목한 믿음은 크게 발전하고 강조되는 데 비해, 생활 속에서 평화를 이루는 일에 부족함이 많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먼저 화목하라! 더 나아가서 생활 속에서 형제와 이웃들과 화목하라! 하나님과 화목하고 형제와 화목하라!! 화목케 하는 영인 성령 안에서 화목하라! 그리하여 새해에는 가까운 데와 먼 데 있는 형제들과 온전히 화목한 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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