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19-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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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창12:1-5 |
설교제목 | 지금은 복을 빌 때 |
지금은 복을 빌 때
창세12:1-5
2019년 2월 3일 주일 [주현 넷째/ 설 전주일]
어린 아들과 딸, 둘을 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기독교가정에서 태어나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건설회사 직원이었고, 아내는 참하게 생겼는데 결혼해서 권유를 받아 교회에 나왔어요. 그런데 거기서 초등학생 아들이 교회 어린이축구팀에 참여합니다. 청장년 집사 둘이 먼저 자기들이 축구코치 교육을 받고 그 매뉴얼을 비싼 돈을 주고 사서, 매 주일에 아이들을 교회 뒤 학교 운동장에 데리고 가서 그 체계대로 축구를 시켰습니다. 교회소년축구팀인 사무엘축구단은 그렇게 탄생했는데, 그 여름과 가을에 연회 어린이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합니다. 사무엘 축구팀에서 제일 축구 잘하는 아이가 둘 있었는데, 그 중에 어린 4학년 소년이 이 집 아들이었습니다.
이 교회축구팀에서 축구 잘하는 코치들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이 집 아들은 축구하는 학교로 전학하여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합니다. 이 아이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나이별 국가대표 상비군과 국가대표가 됩니다. 나중에는 청소년대표가 되고 독일 프로축구팀 함부르크팀을 시작으로 지금도 프로축구 2부에서 뛰고 있습니다. 지금 국가대표 나올 나이가 되었는데, 국가대표 직전에서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아이의 경우 교회학교를 다니다가 어린이축구팀에 들어온 것이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만남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축구선수로서 자라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첫 출발점입니다. 아브람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평원 갈대아 우르지역에서 목수 집안에서 자란 평범한 사람입니다. 주로 우상을 조각하여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해요.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운명을 바꿀 말씀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이 시간이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는 부름의 시간입니다. 택하신 백성의 역사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교회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축복의 흐름이 시작되는 자리인 것이죠. 아브라함이 어떤 인생을 살았으며,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말씀이 여러분에게도 임하여 여러분도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모든 믿는 성도들은 복을 받아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마음껏 복을 빕니다.
지난 주간에 선배 목사님께 오랜 만에 전화했어요. 그러자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가 전화기를 통해 전해져왔습니다. 새해 들어 첫 주간 무척 복 받으라는 인사를 많이 받았습니다, 아마 그 인사는 새해 둘째 주간까지 이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다 뜸했는데... 돌아보니 설이 가까워지는군요. 오늘은 설 앞 주일, 정식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지금은 복을 빌 때입니다. 댁내에 하늘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이 잘 되며, 생업과 직장과 사업이 형통하기를 축복합니다. 계획한 일들이 꼭 성취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주와 불운과 실패가 떠나가고 형통함과 행운과 성공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우리는 75세에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 사람들은 보통 120살은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75세는 적은 나이가 아니죠. 우리 식으로 보면 60줄은 넘어선 것입니다. 그 나이에 인생의 결정적인 변화를 맞이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의 생애는 이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요?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본래 이름은 아브람입니다. 75세 이전에는 그는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나서 그의 삶은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간 28일 밤에 김복동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1993년 UN인권위원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처음 파견 나가 피해사실을 증언했던 유명한 할머니십니다. 1992년까지는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고 그냥 평범한 할머니로 살았다고 해요. 그런데 자기의 종군피해자 생활이 부끄러워할 일만이 아니라, 당당하게 일본의 사과와 보상을 받아내 구겨진 자존심을 찾고 민족정기를 드러내야 할 일임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김복동 할머니는 평화와 민족정신의 투사가 되었습니다.
재작년에 ‘아이켄스피크’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이것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루었었지요. 거기서 위안부출신 할머니가 세계가 이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일본은 사과하고 보상해야 한다는 것을 미국 의회에까지 가서 공개적으로 말했다고 나옵니다. 감동적인 영화로서 300만 이상이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이 영화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도 김복동 할머니입니다. 김 할머니는 2012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피해자 쉼터에서 함께 살던 길원옥 할머니와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지원하는 나비기금을 만들었습니다.
지난해 9월엔 암 투병 중에도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요구하며 외교부 앞에 직접 나오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죽기까지 일제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정의를 세우며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풀어 참된 평화를 이루려는, 평화의 투사였습니다. 김 할머니가 돌아가심에 따라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3명이 되었습니다. 김 할머니의 생애에서는 92년 이전과 이후가 확실히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그의 소명의 생애는 92년부터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 살 때도 하나님을 만났을 거라고 보입니다. 그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믿음의 사람으로 걷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종교생활을 한 것이지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고, 그것도 바쁘거나 친척 결혼, 휴가나 기후가 안 좋을 때는 건너뛰기도 하고, 그냥 대충 종교생활을 한 셈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가치와 가르침을 붙들고 살지 않는, 오랜 시절이 있었던 거죠. 종교만 바뀌었지 생활은 우상 만들어 팔던 이전과 똑같았습니다. 하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고 그 말씀이 자기를 붙들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은 신앙적으로는 애매한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만 다니지 하나님에 대해서는 너무 막연해서 내 생활이 변화되거나 달라지지 않을 때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며 대적하면서도 교회는 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럴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위기 때에 지켜주십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어도 나중에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앙의 삶이 시작될 때가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는 때입니다. 종교생활을 오래하고 예배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성실한 기독교인이라도, 나의 신앙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가, 하나님이 나를 말씀으로 사로잡아 이끌어 가시는 때가 옵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죠.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전까지 하나님은 계시되 조금 떨어져서 계셔야 좋았습니다. 너무 깊이 심각하게 개입하면 곤란한 겁니다. 그냥 좀 넉넉하게 안정되게 살면 좋고,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이 큰 차이가 있는 줄 알았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냥 같이 섞여 사는 겁니다. 주일이면 성경 찾아서 교회에 옵니다. 예배 마쳤으니까 가는 겁니다. 월요일이 되면 직장 나가고, 결혼도 어른이 되었으니 하는 거예요. 왜 결혼하느냐, 그런 거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쁘고 끌리면 좋은 것이지요.
그렇게 살던 우리에게 어느날 하나님이 찾아와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진짜 인생을 사는 이유를 알게 될 때,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 감격 속에 깨달을 때가 오는 겁니다. 영혼의 새아침이 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많은 사람이 성실하게 성공적으로 산다는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하나님이 어느 날 찾아오셔서 낚아채 가십니다. 말씀이 있고, 부르심이 있고,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는 삶으로 살게 하시는 거죠.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는 복이 되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크게 세 가지 복입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와 같은 복이 임합니다. 그냥 막연히 하나님 믿는다 하는 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따라 떠나는 생활로 바뀔 때, 하나님은 세 가지 복을 주십니다.
첫째 복입니다, 그것은 떠나는 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방을 떠나 하란이라는 곳에 와서 살았는데, 하나님이 그 땅을 떠나라 하시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떠나는 게 다 복은 아닙니다. 정든 고향을 어쩔 수 없이 떠나거나 사업이 망해 살던 집을 팔고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것은 큰 슬픔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여기서 떠난 것은 복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 땅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부름 받은 복입니다.
무엇을 떠났나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육체의 집을 떠났습니다. 조상들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옮겨 살았는데, 거기서 한 일이 우상을 만들어 파는 목공예였다고 합니다. 평생 우상 팔아먹고 살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요 축복의 조상이 되었으니, 그때 떠나기를 얼마나 잘했습니까?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자기 살고 있는 삶의 근거지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삼척이나 강릉, 서울과 같이 자기 살던 곳을 떠나라는 겁니다. 그동안 사귄 모든 이들, 그와 친하게 지낸 모든 친구들과 가족들, 도와줄 사람들입니다. 그 땅, 삶의 근거지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75세에 말이죠.
신앙은 지금까지 누리며 살아온 이 세상의 방식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의 미래를 향해 떠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에게 세상이 준 모든 특혜, 자격, 모든 인간관계를 떠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생의 기초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이 이끄는 도전적인 삶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출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명령을 내리십니까? 나름대로 잘 살던 우리를 낚아채서 아주 바보처럼 만드시려는 겁니까? 왜 굳이 형제 가족 친구, 살던 집과 하던 일을 떠나라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총체적인 죄성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썩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뭘 고쳐보고 다르게 해본다고 크게 나아질 것은 없습니다. 어느 시점, 우리는 정들었던 우리 생활,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모든 전이해와 선입견을 벗어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상, 이 가운데 어떤 한 가지 만이라도 의지하는 이상, 결코 하나님과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절대고독, 전폭포기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학벌, 자기 머리, 자기 재주를 믿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떠남은 ‘이 세상에서 붙들고 있는 것을 완전히 버리고 떠나지 않는 이상 말씀을 의지하는 참된 믿음의 길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설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옛날 얘기도 하는데, 여러분의 가정에서 세상과 육체를 의지하는 하란을 떠나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욕심과 고집과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따르십시오! 우리 할아버지가 이북에서 양구로 떠나셨고, 우리 아버지가 중국에서 평안도를 거쳐 경기도 부천 쪽으로 떠나 오셨는데, 저는 그분들의 떠남이 우리 인생과 복음에는 큰 진보가 되었음을 믿습니다. 얼마나 잘 떠나셨습니까! 저희 집 같은 경우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떠나지 않으셨으면, 우리 집안은 연길에서 교민으로 살고 있거나, 평안도 정주에서 하나님도 모른채 쫄쫄이 굶으며 살지 않으면, 양구 시골에서 완전 우상 숭배하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떠남이 복입니다. 여러분도 죄악의 집, 육체와 정욕만을 추구하던 옛사람의 생활에서 떠나는 복을 받으십시오!
둘째 복, 그것은 누리는 복입니다. 여기서는 아직 완전히 받은 것이 아니고 약속만 받았습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으로 풍성히 채워주시는 복을 약속받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받은 누리는 복은 세 가지입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 복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복은 따라오는 복이었습니다. 죄수에게 그날 아침 고깃국 나오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지만, 진짜 좋은 것은 감옥에서 나가는 것이지요. 갓난아기가 오늘 우유를 많이 마시는 것도 복이지만, 엄마가 내 곁에 있는 것이 제일 큰 복입니다.
①큰 민족을 이루는 복입니다. 큰 게 다 좋지는 않습니다. 키도 크면 다 좋은 줄 알지만, 농구선수들은 키 큰 게 큰 핸디캡입니다(!). 그러나 가정이 크고 땅이 커지고 기업이 커지고 사업이 큰 것은 다 좋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가문이 큰 민족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큰’ 민족은 물론 인구가 많은 것을 말하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좋은’ ‘위대한’ 민족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업이 커지기를 바랍니다! 가게가 커지기를 축복합니다. 매상이 커지기를 축복합니다! 자녀들이 건강하여 키가 커지기를 바랍니다. 속회가 커지고 반이 커지기를 바랍니다.
②물질적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복입니다. ‘네게 복을 주어’의 복, 브라카는 물질적인 풍요로 일단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존귀한 성품에서 나오는 거룩의 복을 받은 이들은 경제적인 복으로 이어집니다. 경제생활은 우리 삶의 중요한 토대 중에 하나입니다. 성실한 삶과 지혜로운 인생경영에서 이뤄지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채워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에 거하십시오! 그분이 모든 필요를 복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이뤄주신 물질적 경제적 풍요가 믿음의 가정들에게 이뤄지는 한 해 되기를 축원합니다.
③이름이 위대해지는 복입니다.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이름이 위대해집니다. 유명해집니다, 존귀하게 됩니다. 사실 사람이 나이 들면 경제적 풍요보다 유명해지고 존귀하게 되어 가는 곳마다 존경받는 것이 훨씬 값있습니다. 돈만 많고 무시당하는 것처럼 한심한 것도 없어요. 이름이 위대해져서 존경받고 기림 받는 것은 믿음으로 바로 산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어느 날 자고 났더니 유명해져 있더라!’ 18세기 영국 시인 바이런이 처음 쓴 말이지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존경받는 사람,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셋째 복, 나누는 복입니다. 모든 복 중에 최고의 복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하리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이 있음으로 주변이 다 복의 지경이 되고 복의 나라가 되는 복입니다. 나누는 복이지요. 가정에 며느리 하나가 잘 가면 가정이 복입니다. 누가 있어 그 가정에 복이 되었습니까? 누가 있어 그 교회에 복이 되었습니까? 덴마크의 그룬트비 같은 사람, 인도의 간디 같은 사람, 미국의 루스벨트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있어 주위가 다 복을 받는 그런 복, 복이 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설날을 앞에 두고 복을 빌 때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임하였던 복이 여러분 가정에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복 중에 최고의 복은 나누는 복입니다. 여러분이 있음으로 가정이 복이 되고, 직장이 복이 되며, 지역과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과 세계가 복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금과 같은 하늘 복이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 마음에 오지를 여행하는 백인들이 마을 귀퉁이를 지나는데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보니 공기돌에서 반짝임이 예사롭지 않아 자세히 보았답니다. 그런데 깜짝 놀라고 말았답니다. 바로 다이아몬드 원석이었던 거죠. 그들이 가지고 놀던 공깃돌은 바로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깜짝 놀란 백임들은 자기들이 타고 온 배에 돌아가서 사탕봉지를 들고 와 아이들에게 사탕 한 알과 아이아몬드 한 알 씩을 바꾸고 배로 돌아오는데, 그 마을에 엄청나게 맛있는 사탕을 공기돌 하나하고 바꿔주는 사람이 있다고 소문이 나서 모두 달려가 그 다이아몬드 원석을 사탕이랑 다 바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 가치를 모르면 엄청나게 고귀한 다이아몬드를 하찮은 사탕과 바꾸고서도 좋아하는 어리석을 범하는 겁니다.
우리는 새해에 복을 빕니다. 지금은 복을 비는 때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복, 하늘의 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떠나는 복이 얼마나 귀합니까! 누리는 복, 민족이 커지고 물질이 풍요로와지며 존귀히 여김을 받는 복도 꼭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복, 복이 되는 복, 남에게 나누어주는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믿음으로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복을 모두 받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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