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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부활생명이 임하다 (요한21:1-14) [2020년 4월 12일, 부활절]
2020-04-16 14:07:42
박신진 목사
조회수   477
설교일 2020-04-12
설교말씀 요한21:1-14
설교제목 매일 부활생명이 임하다

매일 부활생명이 임하다

21:1-14

2020412[부활절]

 

우리 어릴 적의 교회는 성탄절에 비해 부활절 행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성탄절에는 성탄트리, 성탄캐롤, 성탄새벽송과 크리스마스 이브에 하는 성탄발표회와 칸타타연주, 중고등부 성탄선물교환 등, 한 달은 교회생활을 들뜨게 했다. 그러나 내 기억에 부활절은 그냥 흰 한복을 입고 교회 나오는 사람이 몇 있었고, 물자가 부족했기에 당시에는 계란도 거의 주지 않았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하면서 부활절이 교회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교회의 출발점에 부활절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부활 생명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매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요, 주일예배는 말하자면 부활을 기념하는 축하의식이나 마찬가지다.

올해 우리는 코로나19가 온 세계를 위협하는 때에 부활절을 맞이한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성회수요일 의식도 하지 못했고, 사순절 기간 내내 주일예배를 드릴 것이냐, 영상예배로 대신할 것이냐, 소독은 어떻게 하고 방역은 또 어떻게 할까?’ 이런 문제를 의논하느라 장로님들과 기도하며 고민해야 했다. 정작 수난주간에도 매년 행하던 수난주간 수요애찬식이나 금요침묵 혹은 금식도 생략하고, 차량운행도 없이 수난주간 닷새 동안 특별새벽기도만 드렸다. 오늘 부활절에도 오후에 부활절 연합예배도 드리지 않고 낮예배만 드리게 되었다. 이 모든 상황은 코로나19의 감염 예방을 위한 사회적 격리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아무쪼록 세계에 크게 퍼지고 있는 전염병이 물러가고 매일의 생활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건강과 평안이 어느 때보다 간절히 필요한 이 시기에 네 번째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이야기를 읽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특별하다. 부활절날 있었던 기적 같은 빈 무덤 이야기나 천사들이 나타난 신비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매일의 생활 속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부활절에 이 말씀에 주목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지금은 일상 속으로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필요한 때다. 그래서 이 말씀으로 이번 부활절 설교의 제목을 매일 부활생명이 임하다.’로 정했다.

 

부활이 생활 속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시고 제자들 가운데 일곱 명과 함께 잡수신다. 이 제자들은 최근에 예루살렘을 떠났다. 떠나기 전 주일에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그들은 고향 땅 갈릴리에 내려와 있다. 서울로 갔다가 코로나 사태로 해고당하여 다 정리하고 삼척으로 내려온 젊은이 같은 처지였다. 마태에 의하면, 그들은 그 전에 온 세상으로 나아가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여기 요한복음의 제자들은 그 많은 할 일을 제쳐두고 시골에 내려와 물고기를 잡고 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여기에 와 계시다! 그 전에 제자들이 알고 있던 부활은 내세에서 있을 일이었다. 자신이 죽고 장사지낸 뒤에 일어나는 일이며, 그 부활은 천국에서 안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만난 여인들과 베드로와 제자들은 죽고 나서 천국에서 만난 것이 아니다. 지금 예수님 제자들의 매일의 생활 속으로 찾아오신다. 제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갈릴리 호수에 나가 물고기를 잡는 바로 그 아침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늘 익숙한 모습으로 말씀하시고 같이 식사를 하신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일들은 부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자들에게 다시 세워준 일이 되었다.

여기에 사실은 큰 변화와 차이가 있다. 물론 그 당시에 제자들이나 우리들은 죽음 이후에 내세에 대해 믿는다. 못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경이 약속하고 있고, 대자연의 생명현상이 내세의 영생불사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가 증명할 수 없는 약속의 말씀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믿는 이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은 못 하실 일이 없으시며 성서가 분명히 약속하고 있으므로, 성도들이 죽음 이후에 내세의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보통 부활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제자들의 현실 속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고기를 잡으며 식사를 한 일이 일어난다. 내세부활 신앙이 현세부활 신앙으로 변화된 것이다. 고향에 돌아와 그들은 접어두었던 어부생활을 다시 시작하려고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해가 떠오를 때쯤 예수님이 해변에 계신다. 50칸쯤 떨어진 거리는 200규빗 정도를 말하는데, 축구장 길이 정도라고 보면 된다. 새벽빛에 운동장 끝에 있는 거리라면 잘 알아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분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다. 그들이 그물을 던지자 물고기가 가득 잡혔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대 소동이 벌어진다. 베드로는 배에 있다가 옷을 두른 후에 예수님께로 헤엄을 쳐서 왔다.

예수님은 해변에서 그들을 위해 물고기와 빵으로 식사를 준비해놓으셨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그때서야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또 다른 제자 둘, 이렇게 일곱 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신 줄을 알아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눠주신다. 부활절 아침 식사인 것이다. 이미 바닷가에 있던 다른 제자들은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금방 알아보지 못했을까? 여기에는 문학적인 설명이 가미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 신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관계를 복음서는 잘 묘사해주고 있다. 에밀리 디킨슨의 이 말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진리의 눈부심은 서서히 나타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람은 눈이 멀고 말 것이다.”

이 부활절의 아침식사는 일꾼들의 잿누리 새참인 셈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밤새 고기잡던 어부들의 일상생활로 불쑥 들어와 떡과 물고기 새참을 같이 나눠 먹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이다. 물론 우리는 성가가 울려퍼지는 부활절 예배를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부활란의 상징이나 흰옷을 입고 드리는 절기행사에서 부활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진정한 부활신앙은 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실제적인 생명의 역사라는 사실을 오늘 성경말씀은 말하려 한다. 함께 나누는 일터에서의 잿누리(새참), 울고 웃는 매일의 생활, 아이들과 부대끼는 하루하루의 일과 속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있는가? 부활생명이 주일 뿐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모든 생활 속에서 체험되기를 축복한다.

 

매일 임하는 부활생명

부활생명이 우리 생활 속에 임하면 이상하게 평안을 느끼게 된다. 부활은 우리 생활 속에서 평강이 된다. 왜냐하면 죽음을 이긴 하나님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의 죽음은 죄값을 짊어지고 죄와 싸우는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죄악을 이기고 죽음을 이긴 승리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숨을 내쉬고 평안을 빌어주셨다. 왜 평안이 없는가? 두려워서, 외로움 때문에, 미움 때문에, 욕망 등에 묶여 살아가느라 평안이 없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평안이 있다. 그 평안은 어떤 것으로도 빼앗을 수 없다.

평안은 그냥 걱정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부어졌을 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때 나타나는 것이다. 배움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들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내 안에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숨을 쉬시고 평안을 빌어주실 때, 부활하신 주님이 숨으로 우리 속에 평안을 넣어주신다는 것이다. 호흡을 하듯이 그렇게 부활생명이 우리 가운데 믿어지고, 우리가 그 생명을 붙들고 살아갈 때 평안이 임하게 된다. 죄악을 이기고 죽음을 물리친 자의 승리가 가져다주는 평안함이다.

고 채규철 선생은 장기려 박사와 함께 적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한 인물이다. 그는 31세에 자동차가 뒤집어지는 교통사고로 온몸에 3도 이상의 화상을 입고 30여 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목숨은 건졌으나 귀와 한 눈을 잃고 손은 갈고리처럼, 얼굴은 흉하게 변했다. 지극히 보살피던 아내는 지병인 폐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버렸다.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하나님의 평안으로 이겨내었다. 1975년에 사랑의 장기기증본부를 설립한 사람이 채선생이다. 또 입시경쟁에 내몰린 청소년들이 흙을 만지고 별을 세면서 자라도록 하자는 취지로 대안학교 두밀리자연학교를 세웠다. 그분은 하나님 품에 안기셨고 두밀리학교도 몇 해 전에 폐교되었지만, 그들 가운데 살아있던 부활생명은 지금도 살아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생활 속에 찾아오면 기쁨이 있다. 부활신앙을 가진 교회는 기쁨을 전수하는 기쁨의 전당이다. 고난 속에서도, 아픔 속에서도, 죽음 속에서도 그 기쁨은 사라지지 않는다. 처음 기독교가 조선땅에 전파되었을 때 사람들이 가장 이상하게 여긴 것은 장례 때도 곡을 하지 않고 노래를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노래를 부르지? 이것이 낯선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의구심이었다. 그렇다. 부활생명이 우리 생활 속에 들어오면 기쁨이 충만하다.

기독교는 인류의 근본문제인 죽음에 대해 해답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의의 최후승리와 영생을 믿는다. 그것이 부활이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놓여있고, 죽음은 모든 인생을 삼켜버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는 하늘의 생명이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음에 삼키워졌을 때에 그 무덤 앞에서 이렇게 외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죽음의 절망 가운데 생명을 믿느냐고 마르다와 마리아를 깨우치신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아무리 어려워도 기쁨이 있다. 성도의 삶은 바탕이 기쁜 삶이다. 오뚜기가 밀어도 다시 서는 것처럼, 조금 아프고 어렵고 외롭고 슬플 때가 있어도 부활생명은 우리를 금방 기쁨으로 돌려놓는다. 세상은 죽임의 힘이 강하지만, 부활을 믿고 부활생명으로 역사하는 교회와 성도는 살림의 힘, 부활생명이 강하여 항상 기뻐한다. 환한 웃음이 있는 교회, 아무리 어려워도 기뻐하는 사람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다. 우울증, 공황장애, 망상증 등의 마음 병을 앓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부활생명이 주시는 기쁨으로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차츰 마음의 병도 치유될 것이다.

 

부활생명이 함께 하면 사랑을 이루게 된다. 부활하신 주님은 바닷가에 오셔서 제자들과 떡과 물고기를 구워드셨다. 식탁교제는 사랑의 나눔이다. 외롭고 괴롭고 불안한 제자들은 주님과의 함께 식사를 나누어 먹음으로 힘을 얻고 위로를 받았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이 되었다. 부활생명은 바로 태초에 인간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호흡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이 모인 곳에 오셔서 숨을 내쉬신 것도 부활생명을 제자들에게 부어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웨슬리 신학자 테오도르 런연은 신앙인의 영적 호흡을 사랑의 순환 과정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호흡을 주고 받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숨이 우리에게 올 때 다른 사람을 거쳐 온다, 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에도 다른 사람을 거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게 다른 사람을 통해 사랑을 불어넣어 주셔서 내게 사랑이 들어오고, <>는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다시 하나님께 그 사랑을 내보낸다. 우리는 각자 사랑이 순환되는 영적인 폐이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영적 호흡에 <>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럴 때 영적 친밀감이 더욱 깊어진다.

코로나19는 지난 주간에 전 세계에 160만 명의 확진자를 양산하였고, 사망자만 10만 명에 가까운 인원이 생겼다. 공공 기관이나 의료기관들도 우선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때 교회들이 왜 우리 예배드리는 것만 가지고 통제를 이렇게 심하느냐?’ 반발만 할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런 때 정말 무력감을 느낀다. 부활생명이 우리에게 살아있다면 지역과 이웃을 위한 사랑 실천의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

 

부활생명, 교회의 공공성을 추구함

최근 일부 대형교회들이 코로나19에 걸린 경증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시설을 제공하겠다고 나섰고, 심각한 지역과 중증환자들을 위해서 기금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 보건당국이 추진하는 사회적 거리두기차원에서 예배를 자발적으로 중단하는 교회들이 많아졌고, 그 중에는 부활절에도 영상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다. 정말 초유의 일이다. 이런 때 우리는 생활 속에 함께 하는 부활생명을 가지고 능력 있는 생활을 하는 주의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개인적인 회개와 교회적인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 개인적 회개는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 부활의 생명력이 없이 부정적이고 세속적이며 불신앙적인 생활을 해왔던 삶을 회개하는 것이다. 당신은 정말 부활을 믿는가, 부활생명이 살아있나, 자문해보라! 교회적으로는 이번에 코로나19의 진원지가 되었던 사이비이단 신천지와 교회가 무엇이 다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나 하는 반성이 필요하다. 어떤 교회는 예배 중단과 특정지역 지원, 미자립교회들을 향한 지원에 나서기도 하고 신천지와는 다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번 사태를 돌아보니 과거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에 빠져 우리 안의 우상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점이 있다. 교회들이 사회적 구제와 도움을 위해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귀하나, 일회적 전시효과만을 노린 것은 아닌지, 우리 안에 정말 물권과 세속주의적 욕망을 제대로 제어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글로벌 지구촌 시대에 세계의 공동선을 향하여 기독교가 공적인 역할을 해달라는 요구가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그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회적 평가가 나오고 있다.

우리 예배에 왜 관공서가 간여하느냐?’는 식으로 반발하는 것은 사교집단이 할 일이다. 세계를 지으시고 역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공공의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집단이기 때문에 보건당국이나 지역관공서의 사회보호 관심에 방향을 같이 해서 나가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을 향한 하늘 복의 전달자, 복의 근원이 되라는 아브라함의 복을 시행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개혁과 갱신이 없는 사이비집단과도 같은 기독교는 공공성을 잃어버리고 사적인 기관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이번 코로나19 예배중단 사태는 엄청난 도전을 기독교에게 던지고 있다.

거룩한 부활절에 여러분에게 부활생명이 가득하기를 축복한다. 무엇보다 매일의 평범한 생활 속에 부활생명이 가득하여 평안과 기쁨과 사랑이 가득하기를! 여러분을 볼 때, 세상 사람들이 어디서 저런 평안이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늘 기뻐할까, 어쩌면 사랑이 저렇게 충만할 수 있지, 하면서 여러분을 알아보기 원하고, 거기에서 예수님을 찾게 되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부활하신 예수님, 매일 우리 생활 속에 임하신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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