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0-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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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누가24:13-35 |
설교제목 | 엠마오로 가는 제자 |
엠마오로 가는 제자
누가24:13-35
2020년 4월 26일 [부활후 셋째주일]
기독교 베스트셀러 가운데 ‘광야’ 시리즈를 써낸 이진희 목사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묵상하는 삶>이란 책을 쓴 목사이며 작가인 켄 가이어 얘기인데, 그가 목사지만 목회보다 글을 쓸려고 집을 팔고 시골로 들어갔다. 유명한 작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그런데 막상 시골로 들어가 글을 쓰려니 글이 써지지 않았다. 작가가 되려고 목사도 그만두고 집도 팔고 도시 생활을 정리하여 여섯 식구를 이끌고 시골로 내려왔는데, 이런 낭패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작가의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라고 믿고 결단을 내렸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의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보냈지만, 연락 오는 곳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식구가 딸린 한 가족의 가장인데, 집도 없고 연금도 없고 직장도 없고 의료보험도 없었다. 그는 완전히 광야 가운데로 내몰린 기분이었다.
켄 가이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인생의 광야를 벗어나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주변에는 전갈들이 우글거리고, 하늘에는 태양이 이글거리는 인생의 광야 가운데서 그의 속은 분노로 타올랐다. 광야는 파종할 곳이 없다. 씨를 뿌릴 수 없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다.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다. 모든 것이 없는 것 투성이다. 광야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다. 이런 절망적인 시절에 딱 하나 있는 것이 있다. 그게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덕분이다. 켄 가이어는 인생광야에서 하나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시작하여 그의 바램대로 기독교작가가 되고야 말았다. 우리는 광야 같은 때에 생각한다. 왜 나에게는 이렇게 없는 것 뿐인가?
20년 봄이야 말로 세계경제와 우리의 생활이 이제 광야로 들어가는 중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실질 국내총생산(GDP) 속보치 통계에 따르면 코로나19 충격으로 1분기에 –1.4% 성장을 기록했다. 금융위기를 겪던 2008년 이후 12년만에 가장 낮은 성장률이다. 지난 2월부터 국내 감염병 확산이 본격화하면서 민간소비와 서비스업 생산이 IMF 때 상황에 버금가는 타격을 받고 있다. 소비자들이 외출을 삼가면서 음식, 숙박, 오락, 문화 소비와 의류, 자동차까지 모두 줄었다. 이제 여행, 항공에 이어 수출 제조업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될 수도 있다. 이 광야의 시기를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오늘날 삶에서 절망을 경험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만난다.
이런 때에 또 한 주일을 맞이하면서 교회는 엠마오길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 관한 말씀을 읽었다. 여기 누가 24장은 엠마오 길의 극적인 변화를 잘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그들은 절망하였는지, 어떻게 그들은 절망을 극복했는지, 그 결과 어떻게 그들이 승리했는지,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자. 그리고 그 두 제자처럼 오늘 이 시간 바로 여러분에게 엠마오의 내려가던 길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의 두 제자에게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었고, 내려가는 길에서 올라가는 길로 돌아서는 변화가 일어났다. 글로바와 또 한 사람은 열두 제자들이 아니라 방계제자여서 눈에 띠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님을 많이 사랑하고 소망을 두었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니까 크게 실망한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그들이 절망했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내려가느라 부정적이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40여리 떨어진 곳으로서 내려가는 길이요 예루살렘보다는 작고 초라하며 가난하고 쓸쓸한 곳이다. 그들은 분명히 꿈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으나, 이제 터덜터덜 엠마오로 내려가는 중이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보았다. 그들은 아직 부활 소식은 듣지 못하였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 제자들을 만났으나 아직 그들은 그분을 만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내려가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그들은 엠마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사람은 올라갈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려갈 때도 있다. 내려갈 때 사람들은 부정적이다. 조금 내려가다 보면 아주 절망하여 그냥 바닥까지 미끄러져 버리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내려갈 때 잘 해야 하고, 내려갈 때 다시 올라갈 때를 기약해야 한다. 내려가는 것이 끝이 아니다. 인생의 길은 계속 이어져 있다. ‘주여, 내려갈 때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내려갈 때 낙심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요즘 청년들이 큰 도전 앞에 놓여있다. ‘이생망’이라고 ‘이번 생애는 망했다’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어디서나 공부 잘하고 인정받던 친구들, 실패라고는 경험해보지 못한 청년들이 이 지경이니, 얼마나 어려운가! 지난 몇 년 동안 삼척경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올봄에 우리 삼척은 극복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삼척은 공공사업이 풀려줘야 한다. 주위에 POSCO 발전소를 비롯하여 산업들이 움직이면서 회복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올봄이 제일 힘들다! 아마 폐업을 고려하는 소상공인들이 많으리라고 본다. 코로나가 거의 지나갔다고 하지만, 모든 것을 절제하고 거리를 띄워야 하는 생활이 계속된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 내려가는 길이 금방 끝날 것 같지 않다.
또 그들은 주님의 부활보다는 빈 무덤에 대해서만 알았다. 주님이 부활하신 현실 앞에서 처음 제자들의 반응은 ‘주님 부활하셨다!’가 아니라, ‘누가 우리 주님의 시체마저 가져갔나이까?’였다. 부활의 현실 앞에서도 부활을 보지 못하고 무덤에 매여있는 것이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부활생명 앞에서도 절망을 이기지 못한다. 그나마 시체까지 잃어버린 최악의 상태인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눈이 가려진다. 빈 무덤만 보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라!
엠마오 길의 이 두 제자가 절망에 빠진 것은 주님이 부활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비어있는 무덤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의 현실에서 선교의 현장에서 믿음의 눈이 닫히면 항상 부정적으로 보고 일을 그르치는 때가 많다. ‘지금 교회가 어렵습니다. 안 됩니다, 선교가 될 수 없어요,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적극적으로 여러분의 현실을 바라보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지금도 교회의 현실에서 선교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다. 가정의 현실, 교회의 현실, 민족의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생명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면 절망하고 만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고 소문만 들었다. 22-23절,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지 못할 때 자꾸 낙심하게 되고 절망에 빠진다. 그들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소문으로만 들었다. “목사님이 그러니까, 장로님이 그러니까, 권사님들에 의하면, 아무개 집사님이 그러더래.” 남의 얘기로 소문만 듣는 신앙은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주지 못한다. 주의 말씀을 들으라! 부활하신 주님이 역사하는 현장에 참여하라! 주님을 만나지 못하여 남의 얘기로만 듣는 사람은 절망하여 엠마오 길로 내려가고 만다.
한 미국인 목사가 한국에 와서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한국 교인들의 표정이 몹시 어둡다고 느꼈다. 마치 싸움을 하러 나온 사람들 같았다. 한국사람들이 너무 근엄하니까... 깜짝 놀란 목사가 한국인 목사에게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왜 저렇게 표정이 어둡습니까?” 하고 물었다. 한국인 목사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미국인 목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아직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지 못했단 말입니까?”
내려갈 때 절망한다, 빈 무덤만 보는 부정적인 태도 때문에 낙심한다, 직접 체험하지 못하고 말만 무성할 때 의심하고 실망한다. 그들은 낙심하고 절망하여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 절망한 사람들이 많다! 어찌하면 절망을 극복하고 부활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은 절망을 극복했는가?
그들이 절망을 극복한 첫 번째 방법은 예수님과 동행한 것이다(15절). 중요한 것은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때에도 그냥 동행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부활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했을 때에도 예수님과 함께 계속 길을 갔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알아보지 못했어도 예수님과 함께 했기 때문에 그들이 결국 절망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확실히 깨닫지 못한 채 교회를 다니고 있다. 자기는 아직 주님을 모른다. 확신이 없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꼭 붙어있으라는 것이다. 아기들이 엄마를 다 파악하기 전에, 키가 얼마고 어떻게 생겼고, 엄마를 의지하고 사랑한다. 그러다가 엄마를 알아간다. 이처럼 주님과 함께 하면 언젠가 눈이 떠진다. 잘 모르더라도 주님을 떠나지 말라. 엠마오 길에서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알아보지 못했던 한 나절과 같이, 여러분의 믿음이 그 중간 시간에 머물러 있어서 여러분이 영적으로 낙심하고 더욱 힘들어 한다면 물러서지 말고 더욱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라. 이제 주님을 알아보고 절망을 극복할 때가 가까웠다! 부활하신 주님이 이미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신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약속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이었다. 차츰 알아진다. 지금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만질 수 없었지만,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이 왜 신천지 이단으로 가버렸나? 잘 몰라서... 그러나 이런 때야말로 더 교회와 함께 할 때다. 교회생활에서 주님과 동행하면서, 조금 더 걸어가라!
그들이 절망을 극복할 수 있었던 두 번째 방법은 말씀을 들었다는 데 있다(27절).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다. 여기서 두 제자는 말씀을 직접 주님으로부터 들었으나 그들이 바로 알게 되지는 않았다. 말씀을 들었으나 말씀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도 거기에서 계속 나아가야 한다. 계속 주님과 머물러 있으면서 교회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말씀을 계속 들을 때, 예수에 관한 복음 듣는 일을 열심을 다해 반복할 때 절망을 극복할 때가 온다.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붙들면, 어느 때가 되어 말씀이 여러분을 붙들게 된다! 그러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 절망이 나를 붙들게 하지 말고, 대신 말씀이 나를 붙들게 하라! 수요일 저녁, 금요일 저녁, 하나님께 나와서 말씀을 자꾸 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공부하라! 그때 홀연히 부활하신 주님이 깨달아지고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절망을 극복할 수 있었던 세 번째 방법은 떡을 떼어 함께 먹었다는 데에 있다(30절). 이것을 보통 성만찬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매월 성찬을 하고, 받는 이들도 사모하며 감사함으로 받는다. 그러나 여기서 떡을 나누는 것은, 조금 깊은 영적 의미가 있다. 그들은 떡을 나누면서 예수와 더불어 서로 하나가 되었다. 즉 영적 교제를 가리킨다.
예수와 글로바와 또 한 친구가 말씀을 들은 후에 서로 떡을 나누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 되고, 우리가 또 그 믿음의 경험과 예배와 성례를 통하여 하나될 때 비로소 참된 교회가 된다. 여러분 교회 공동체, 신앙공동체를 만들라! 같이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는 교제를 이루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신비한 믿음으로 들어가게 하는 통로이다.
이번 코로나19가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를 통하여 전염을 예방하는 방법을 썼고 그것이 비교적 성공했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면 ‘물리적 거리두기’이지 이것이 ‘심리적 거리두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전염병이 창궐할지라도 교우들은 심리적으로는 가까이 가야 한다. 속회로 가까이 하고, 선교회로 가까이 가라! communio sanctorum(거룩한 교제)! 이 성도의 교제를 놓쳐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이 교회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체험할 때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된다.
글로바와 또 한 친구는 절망에 빠져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예수님과 동행하였을 때, 말씀을 들었을 때, 떡을 떼어 함께 나누는 교제를 하였을 때, 절망을 극복했다.
그 결과 그들이 어떻게 승리했는가?
31절에 보니까, 주님과 함께 음식을 먹고 한 떡을 뗄 때, 그들은 눈이 밝아졌다. 여러분, 눈이 밝아지는 복을 꼭 받아야 한다! 세상에서 제일 큰 복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눈이 밝아지는 복이다. 눈이 밝아지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니, 구원의 은혜를 얻는다. 눈이 밝아지면 내 아내, 내 남편이 얼마나 귀한 줄을 알게 되니,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눈이 밝아지면 사명이 보이고, 할 일이 보이니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아직도 눈을 떴으나 봐야 할 것을 못 보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엠마오 길의 두 제자처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절망을 극복하여 눈이 밝히 떠지기를 축복한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졌다(32절). 글로바와 또 한 친구는 주님이 말씀을 들려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였다(32절). 원어로는 ‘불타지 아니하더냐?’ 이다. 뜨겁게 믿어야 한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마음에 불이 들어가서 가슴이 불타올라야 한다! 방도 불이 들어가지 않으면 얼마나 써늘하고 벌레들이 꾀는지! 마음도 불이 꺼져 냉랭하면 사탄이 역사한다. 불이 들어가야 집도 살아있는 집이 되고, 불이 들어가야 음식도 만들어지고 물건도 제작되며 자동차도 달려간다.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두 제자들처럼 여러분 마음에 불이 붙기를 바란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그들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길로 돌이켜서 갔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전한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이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냥 먹고 살기 위해 가는 길이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 길은 주님과 함께 거룩한 꿈을 이루기 위해 가는 길이요, 사명을 이루는 길이요,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가는 길이다. 요즘 엠마오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다. 진정한 삶의 의미와 기쁨을 느끼지 못한 채 먹고 살기도 어렵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직장을 다니며, 일주일동안 쉴 틈도 없이 쫓아다니는지 알아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엠마오길을 예루살렘길로 바꾸어 주시기를 축복한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그 꽃>) 내려갈 때 예수님과 함께 하면 부활꽃이 보인다.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할 때 광야 같은 생활이라도 이곳에 천국의 길이 열리며, 은혜의 강이 흐르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눈이 떠지시라, 마음이 뜨거우지시라, 돌이켜 올라가라!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올라가는 길로! 은혜없는 생활에서 은혜로운 생활로! 무의미에서 사명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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