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0-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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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빌4:8-9 |
설교제목 | 기쁨과 평안을 얻으려면 |
기쁨과 평안을 얻으려면
빌4:8-9
2020년 10월 11일 [성령강림후 열아홉째주일]
빌립보서는 에베소서 골로새서와 함께 사도 바울의 옥중서신이다. 그런데도 눈물과 한숨이 있지 않고 복음의 담대한 제시와 은혜의 증언들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빌립보서의 바울은 유난히 당당하고 충만하다. 어떻게 살지 죽을지도 알 수 없는 로마의 수인이 그렇게 기쁨으로 충만하고 평안한가, 하나의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편지의 마지막 부분인 4장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충만한지 모른다!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를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기쁨이 있는 교회이고, 또 하나는 평안이 있는 성도다. 교회는 하늘나라의 모델하우스다.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보여주려는 것이 교회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조건이나 형편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교회는 보여줘야 한다. 그게 바로 조건과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이다. 어떤 형편 속에서도 기쁨이 있는가? 그게 교회다! 또 성도 개인개인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평안해야 한다. 이게 온전한 성도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413장 찬송) 행복한 교회, 행복한 성도가 되자!!
사실 빌립보서의 상황은 편지를 보내는 바울도 감옥에 갇혀 어려웠고,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회의 상황도 그리 편편치는 않았다. 특히 여선교회의 두 지도자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말았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이 구절을 보면 빌립보교회 안의 두 여자지도자의 갈등이 심각함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향한 편지를 쓸 때 그들의 재정적 후원을 여러 번 받았다. 빌립보교회는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옥중에 있는 바울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보고 기쁨의 서신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런데 빌립보교회에 시기와 질투가 있었고 자칫하면 교회에 큰 문제가 일어날 갈등이 노출되었다.
바울은 귀한 후원금을 받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내면서 비판은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픈 데를 찌르기 보다는 오히려 창의적인 방법으로 권면을 하는 것이다. 늦잠 자는 아이들에게 매일 늦잠 잔다고 꾸짖으면 말하는 사람도 피곤하고 말 듣는 아이도 질릴 것이다. 그럴 때는 어쩌다가 좀 일찍 일어난 날, “야, 오늘 아침에는 일찍 일어났네. 잘했다!” 이런 식으로 칭찬함으로 게으름을 이기게 길들이는 것이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밤낮없이 공부해라 채근하기 보다는 어쩌다 공부하는 모습을 보거든 크게 격려해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권하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점잖게 권하는데 그 이면에는 드센 빌립보 여자들이 얼마나 시샘이 많고 갈등이 심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계속 기쁨을 말하고 평강을 빌고 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 9절의 마지막 말씀은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되어 있다. 빌립보서의 마지막 장은 정열적으로 기쁨과 평강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기쁨이 부족하고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빌립보서를 펴서 특별히 마지막 장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여기에 기쁨과 평안의 길, 행복으로 나아가는 방편이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이 말씀을 꾸짖음으로 할 수도 있었다. 왜 구원받아 은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기쁨이 부족한가? 왜 평안이 없는가? 이렇게 살면 되잖아! 똑바로 해봐!! 그러나 바울은 따뜻한 권면의 말씀으로 이 부분을 채우고 있다. 끝으로 형제들아, 이렇게 살아 봐, 그러면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을 거야! 미국에서 웅장한 예술관에서 클래식 음악연주회가 열렸다. 막이 오르기 전에 사회자가 바라보니 청중석에 한 할머니가 모자를 벗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저 모자를 벗게 해야 되겠는데...’ 궁리를 하던 사회자가 지혜를 발휘했다. 그는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오늘부터 당 예술관에서는 나이 많은 분들에게는 모자 쓰시는 것을 허용합니다.” 할머니는 그 즉시로 모자를 벗었다는 것이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9절 앞부분에서 말한다. 이는 체험적이고 깨달음이 있는 실천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서신을 공부하신 분들은 알겠지만, 바울이 ‘끝으로’ 하면서 강조하는 말씀을 할 때면 꼭 실천 사항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실천적인 면을 설명하는데, ‘무엇에든지’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계속해서 나온다는 점이 특별하다. 헬라어로 ‘호사’라는 말을 계속 반복해서 쓰는데, 이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무슨 일이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라는 뜻이다. 여기서 바울이 주 안에서 명령하는 것은 절대적인 윤리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달라져도 기준은 변하지 않고 시행되어야 한다. ‘무엇에든지’!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철학이다. 세월이 바뀌었다고, 사람을 워낙 못된 사람 만났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고, 형편이 이렇기 때문이라고 이해해 달라고 할 수 없다. 기쁨과 평안을 얻으려면, 절대적으로 이런 것들을 행하라!
1)첫째, 참되며. 어떤 경우에라도 그리스도인은 참되어야 한다. ‘참되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대로 변할 수 없다. ‘이런 일에는 진실하지 않다도 된다, 저런 일만은 거짓으로 할 수 있다.’ 이런 게 안 통한다는 것이다. 해도 괜찮은 거짓말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것, 언제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것, 뭐가 남아도 남는다는 것이다. 노인이 빨리 죽고 싶다는 것, 젊은 사람 시위용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거짓말을 거짓말이다.
때로 나쁜 의도가 아닌 ‘하얀 거짓말’이 있다고 한다. 아이들한테 독감 예방주사 맞춰야 하는데, 보건소에 들어가면서부터 뒤집어진다. 이때 ‘하나도 안 아파!’ 거짓말을 한다. 아이들한데 주사 맞춰야 하니까. 그러나 한두 번 속은 아이는 나중에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를 믿지 않고 가지 않을 것이다. 어제의 하얀 거짓말이 오늘에 불신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 감리교 초창기에 브리스톨이라는 도시에 감리교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얼마나 진실한지 시장에서 감리교도 ‘메쏘디스트’라고 하면 물어보지도 않고 외상으로도 물건을 주었다고 한다. ‘감리교인들은 절대 거짓말 안 한다.’고 사람들이 믿어주었기 때문이다.
2)둘째로, 경건하며.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라도 경건해야 한다. 경건은 ‘셈나’인데, 도덕성과 인격이 훌륭하여 존엄하고 존경스러운 태도를 말한다. 항상 하나님 앞에 사는 모습으로 말하고 생활하는 사람을 가리켜 경건하다고 한다. 사람을 대하든지, 말을 하든지, 생각을 하든지, 하나님이 보고 하나님이 감찰하신다는 경건한 마음과 하나님의 심판을 항상 느끼며 사는 것이다.
군대에서 팔도에서 모든 청년이 모여 생활한다. 나도 군대에 갔더니 강원도에서부터 서울 경기 지역은 물론이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모든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정말 잡놈에서 부자에 많이 배운 사람까지 뒤섞여서 사는 게 하루하루가 다양하고 변화무쌍하였다. 그런데 우리 부대 약국, 지대라고 불렀는데-에 약대를 졸업하고 나이들어 좀 뒤늦게 군대에 온 후임 병사가 하나 있었는데, 누가 봐도 고상하고 존엄한 말과 행동을 하여 크리스찬임을 알아볼 수 있었고, 간부들까지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병이 하나 있었다. 군대 졸병으로 근무하면서도 경건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3)셋째로, 옳으며. 그리스도인은 무엇에든지, 누구 앞에서든지 옳아야 한다. 옳은 길을 따라가야 한다. 불의의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는 스스로의 올무에 걸린다. 옳게, 반듯하게 살아가는 것이 결국은 잘 사는 길이다. 사람들을 재주부리느라 굽은 길로, 불의한 길로, 비뚤어진 길로 간다. 그러면서 상황이 워낙 어려우니 이 길을 잠깐만 갔다가 나중에 돌아오면 되지 한다. 옳지 못한 길, 불의한 길로 가면서 자기 변명을 늘어놓는다. 6.25때 그러던 사람들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한다.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세계 만민의 참된 길, 이 길 따라서 살기를 온 세계에 전하세, 만백성이 나갈 길.’ 516장 찬송을 우리가 자주 부르는 대로이다. 그리스도인은 옳은 길을 따라가야 하며, 그 길로 갈 때 기쁨과 평안이 있다. 그 길에 하나님 나라 세우는 방향이 있다.
4)넷째로, 정결하며. 정결은 헬라어로 ‘하그나’인데, 순결하고 깨끗한 것이다. 이교도 세계에서는 신들에게 바친 자들의 정결한 생활을 가리켰고,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명령, 기도, 마음 등이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것을 가리켰다. 생활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그 동기와 행동 자체의 정결을 뜻한다. 거룩이라는 말과 어원이 같은데, 거룩은 구별된 것이고, 정결은 그 자체가 순결한 것이다.
예수님이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할 때도 이 단어가 쓰였다. 어떤 세계에 살아도 정결해야 한다. 탐욕으로 더러워지고, 특별히 시기와 질투로 제일 더러워지기 쉽다.
시기와 질투를 완전히 빼버릴 수 있어야 마음의 정결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음욕을 품고 대하거나, 어떤 숨겨진 저의를 가지고 대하면 정결하지 않은 것이다. 정결하면 건강하고 밝다. 무엇에든지, 누구에든지 정결하라!
5)다섯째로, 사랑받을 만하며. 여기서 ‘무엇에든지 사랑하며’라고 하지 않고 ‘사랑받을 만하며’라고 했다. 특이한 표현으로서 신약성경 여기에서만 나오는 말이다. 사랑받을 만하다 해서, 영어로는 이 말을 ‘lovable’이나 ‘lovely’라 하든지, 또는 ‘attractive’라고 번역한다. 사랑스러운, 사랑할 만한, 또는 매력적인, 그런 뜻이다. 여러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받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직장에서도 사랑받고, 가정에서도 사랑받고, 교회에서도 사랑받는 사람이 되라- 사랑의 대상이 되라는 것이다.
‘누구는 사랑받고 싶지 않은가? 그렇게 안 되는 걸 그들 맘을 내가 어쩌란 것인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잠 31장을 보면 훌륭하고 지혜로운 아내가 있을 때 남편이 칭찬하고 자녀들이 감사한다고 한다. 사랑받는 엄마, 남편에게 존경받는 아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사랑받지 못하는 데에는 나에게 가장 큰 원인이 있다. 반드시 사랑받게 되어 있다. 짝사랑은 없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드리는 순교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선생님은 사랑을 베풀기만 하지 말고 제자들에게 사랑받는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 유치원 때부터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선생님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도록 방법과 태도를 가르쳐주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짝사랑하고 내가 우네~’ 하지 마시고 사랑받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자식으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랑받을 만한 부모가 되라! 사랑받는 존재가 되라는 것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고, 사랑의 순환관계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 간에 감동이 있는 사랑, 응답이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
6)마지막 여섯째로, 칭찬받을 만하며. ‘유페마’라 하는데 영어로 ‘well-spoken’ 즉 좋은 말 하는 것이다. 뒤에서 깎아내리고 흉보는 뒷담화를 하는 게 아니라, 뒤에서 좋게 말해주는 것, 좋은 평판을 퍼뜨려주는 것이다. 수고하고도 칭찬받지 못하면 정말 슬플 것이다. 칭찬받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칭찬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남을 헐뜯고 흉보고 뒷담화하면서 나는 칭찬받고 기림받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기쁘고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남을 좋게 평가해주고 칭찬함으로, 나도 칭찬받을 만하게 사는 것이다.
이상의 여섯 가지가 바로 그리스도인이 행할 윤리다. 무엇에든지, 어디서든지, 참되고, 이롭고, 경건하고, 정결하고,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하게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모습이다.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행하라!’고 하였다. 덕과 기림이 윤리도덕적으로 높고 칭찬받는 수준을 가리킨다. 이런 높은 수준의 기준을 행하며 살 때 행복이 온다, 기쁨과 평안이 온다는 것이다.
9절로 가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기쁨, 평안, 행복은 배운 것을 행할 때 온다는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알아지는 것이다. 받는다는 것은 가슴으로 받아 마음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듣고 본 바는 의지를 가지고 귀를 기울여 듣고, 체험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이제는 행하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웠고, 마음으로 받았으며, 하나님이 여러 가지로 듣고 보게 하였다. 이제는 행하라!
한국교회는 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정말 많이 배웠다. 베델성서로부터 시작해서, 트리니디, 크로스웨이, 일대일 양육교재, 제자훈련, 전도폭발, 엠마오성경공부, 어 성경이 읽혀지네, 예수님의 사람 제자훈련까지... 그러고도 하는 말이 “목사님, 또 뭐 없을까요? 배워야겠는데요.” 여러분, 이제 그만 배워라, 이제는 행해야 한다. 2000년대까지 세계적으로 한국교회만큼 많이 배운 교회도 없다. 그러고도 부족하다, 더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많이 배운 한국교회였지만, 실제로 배운 것은 없는 것 같고 공허하다. 왜일까?
실제로 얻는 것은 행하는 것만큼 뿐이다. 행한 만큼 배운다. 사랑하라고 배웠으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됨을 배웠으면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면 된다. 자꾸 더 깊고 높은 제자도를 배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겸손하라, 용서하라, 인내하라 등등. 이미 배운 것이 넘치게 많은데 실천하고 행하려고 하지 않고 자꾸 영적 허영심을 만족시키려 했다. 그러다 만족치않아 어떻게 했는가? 유병언, 박옥수 구원파를 좇아다니고, 신천지에 가서 이만희한테 배우려고 했으며, 하나님의 교회 장길자 하나님까지 찾는다. 밤낮 배우려고만 하면 생각만 많고 말만 많아 행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 행해야 한다. 마음에 평안이 있으려면, 진정한 기쁨을 알려면, 단순하고 겸손하게 행하기를 힘쓰라! ‘빌립보서 하나로도 충분합니다. 4장으로도 넉넉합니다. 8-9절 안에 다 있군요!’ 이런 깨달음이 있기를!! 이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누군가 무디에게 물었단다. “성경 잘 읽다가 깨달아지지 않고 의심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무디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을 읽다가 의심이 생기고 깨달아지지 않으면 뛰어나가 전도하라. 성경책을 놔두고 나가서 전도하고, 지나가는 손수레라도 밀어주라. 무슨 일이든지 찾아서 봉사하고 전도하라.” 대학원에서 성서해석학을 전공했지만,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해석의 관점, 해석의 틀이다. 그런데 그것은 실천하는 생활에서부터 온다. 교회의 생활이 해석의 틀이다.
듣고 본 바를 행해야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행한 만큼 평안을 얻는다. 행하지 못한 부분은 번민으로 남는다. 차라리 배우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하였다. 성 안토니우스는 부자 청년이 영생을 주님께 물었을 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말씀을 읽고, 그것을 실천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많은 유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자기는 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중에 훌륭한 수도사가 되어 평생토록 귀한 일을 많이 했다. 듣고 본 바를 행하면 기쁨이 충만하다! 평안이 있다. 행복해진다.
앞의 4장 7절을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했는데, 여기 9절을 보니까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하였다. 우리 있는 곳에 하나님이 동행하시겠다는 말씀이요,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생활 속에서 동역동사하겠다는 약속이다. 한 단계 높은 말씀이다. 기쁨과 평안을 누리려면 여섯 가지를 무조건 행하라.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작은 것 한가지라도 행하라! 그리하면 행복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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