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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 바뀔 수 있나? (렘13:23) [2024년 12월 22일, 대림절넷째주일]
2025-01-19 13:14:00
박신진 목사
조회수   3
설교일 2024-12-22
설교말씀 렘13:23
설교제목 죄인이 바뀔 수 있나?

죄인이 바뀔 수 있나?

13:23

20241222[대림절넷째주일]

 

오늘은 대림절 마지막주일, 성탄 전주일이다. 성탄절을 4주 앞두고 시작되는 대림절은, 메시아를 대망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다. 이미 오신 초림 예수를 기념하고 다시 모시는 기쁨과 다시 오실 재림 예수를 기다리며 믿음을 새롭게 하고 회개하는 영적 긴장을 느끼는 계절이다. 이 때 성령께서 우리를 깨어있게 하시며,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고 내 마음과 생활에 적용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린다.

오늘 우리는 대림절 세례식을 거행하는 주일이다. 일년에 두 번, 부활절기와 성탄절기에 세례식을 시행하는데, 성탄절기에는 대림절 마지막 주, 성탄 전 주일을 정해 죄를 씻고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세례식을 행한다. 10명의 예비자들을 살펴 오늘 문답을 하고 세례식을 베풀게 된다. 세례교육을 할 때 예비자들은 세례의 의미를 교육받는다. 세례는 먼저 죄를 씻는 예식이다. 사람이 더러워지면 비누나 세제로 씻으면 되지만 우리 심령이 죄로 더러워진 것은 비누로 지울 수 없다. 예수님의 대속의 피, 보혈만이 죄를 씻어준다. 죄인이 변화하여 새 사람 되었음을 확증하는 의식이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죄 희게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 의지하는가?’(2591)

세례의 두 번째 의미는 죽는 것이다. 육체와 정욕에 속한 죄에 매여 사는 옛 자아가 죽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나는 죽고 예수로 다시 사는 것을 인정하고 서원하는 것이 세례이다. 세례의 세 번째 의미는 들어오는 것이다.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에 확실히 들어오려면 죄를 씻고 옛사람이 죽어야 한다. 교회에 속하였다는 회원자격, 멤버십을 얻는 것이 세례이다.

 

오늘 세례를 함께 하기 위해 죄인이 바뀔 수 있나? 어떻게 바뀌는가?’를 설교하려 한다. 모든 교인에게 해당되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예배드리는 이들도 거의 모든 교인들이 세례를 받으셨다. 죄인이 바뀔 수 있나? 거의 안 바뀐다! 사람이 정말 잘 변하지 않는다. 변덕이 심한 사람도 그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목사는 사람이 하도 안 변하니까 자조하면서 바울 이래로 사람이 완전히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더라고 하였다. 세례를 받으면 죄가 씻기고,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니까,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쉽게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어떤 교회에서 오늘 우리처럼 세례식이 있는데, 그날 세례받은 사람이 예배 마치고 주차장에서 자기 차를 빼다가 접촉사고가 나고 화날 일이 생겨서 화를 팍 내고는 그 다음부터 화가 나서 교회를 안 다녔다고 한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떻게 세례받은 날 참 믿음으로 새출발해야 하는데, 교회 나가기를 끝내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충청도 시골도시 이발소에 미국인이 왔다. “왔씨유~?” 주인이 인사를 했다. 미국인은 “What see you?”로 들었다. ‘무엇을 보느냐?’ 아닌가! 그래서 거울이요.’하는 뜻으로 “Mirror!”하였다. 이발사는 다시 묻지도 않고 미국인의 머리를 빡빡 밀어 버렸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쳤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그 백성 때문에 통곡했지만,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결국 예레미야는 그들이 어쩔 수 없는 백성이라고, 흑인이 피부를 희게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선한 사람으로 변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구스인이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선지자는 흑인 미녀들이 많고 피부가 새까맣기로 유명한 에티오피아 흑인이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있느냐고 의심에 가득 차서 물어본다. 에티오피아는 우리와 우방나라인데, 사람들이 유난히 새카맣고 눈과 이가 빛나면서 흑인 미녀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흑인이 비누칠하고 때를 벗긴다고 희어질 수 없다. 어떤 과학적인 실험도 성공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내면적으로 악을 행하는 데 습관이 된 사람은 그 마음과 성격이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스스로 변할 수 있고 또 변하게 될 것인가? 절대로 못한다. 죄인이 자신의 본성을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다.

의지가 죄에 물들어 있다. 사실, 욕망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지배를 받는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럴 마음을 갖고 있지 않고, 그 길에 대한 소원도 없기 때문이다. 죄 짓고 싶어 하면서 죄를 한두 가지 안 지을 수는 있지만, 계속 죄짓지 않는 사람으로 살기는 어렵다. 죄의 동기가 마음에 꽉 차있기 때문에 건드리기만 하면 죄가 나오는 것이다.

습관의 힘이 또 사람을 죄짓는 데로 몰고 간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죄악을 행하는 습관이 사슬이 되어 그 사람을 악으로 결박시켜 버린다. 죄가 습관화되면 죄의 쾌락이 마음을 미혹시키고 포로로 삼는다. 이럴 때 죄에 대한 갈망이 생긴다. 마음으로 자꾸 죄를 꿈꾸고 소원할 때, 죄에 빠지는 속도는 가속화된다. 술 취함, 호색, 탐욕 등은 갈수록 커지는 욕망이다.

이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면, 어느 시점에 양심이 마비된다. 마음이 차가와진다. 그럴 때 이런 죄의 역사를 잘 간파하지 못하는 무지한 이성, 어리석은 이성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길에서 사람은 죄악을 보지 못하고 그 위험을 깨닫지 못한다. 사람의 머리에 잔꾀만 늘지 진정한 지혜를 알지 못한다. 양심은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사람은 스스로 그것을 깨울 수 없다.

갈수록 마음이 강퍅해지고, 악한 일에 강해진다. 이것이 제거되기 전까지 날마다 마음을 더욱 둔하게 하고, 이것이 불신앙으로 가득 차게 한다. 흑인에게 잿물이나 비누를 사용해도 검은 색을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외적인 문화나 취미, 교양을 사용해도 삶의 죄악들을 씻어내지 못한다.

이 모든 이유들로 인해 악을 행하는 데 습관이 된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과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흑인이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죄인들은 절대로 스스로 거듭날 수 없다. 흑인이 피부를 희게 할 수 없듯이 죄인이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싸우고 죄를 이기는 문제를 가볍게 여겨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세례받았다고 하루아침에 사람이 달라지리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죄인이 의인 되는 것, 정말 어렵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안 된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흑인을 희게 만들 수 있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성도로 변화시킬 수 있다. 예레미야는 답답하여 안 된다 하였지만 사실 성서는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기독교는 성악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인간 본성은 악하다! 사람은 홀로 두면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죄와 타락이 인간을 먹어버린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원의 가능성을 굳게 붙든다. 흑인이 희게 되는 기적이 생기듯이 죄인이 거룩해질 수 있다! 이렇게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하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인간의 전적 타락 속에서 하나님은 죄사함과 거듭남이 가능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재창조를 하신다. 악에서 선을 만들어내신다. 인간은 악하지만, 인간은 죄악을 스스로 절대 이겨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성도로 만드신다!

-성령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시어 새사람 되게 하신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마음을 바꾸고 인격을 새롭게 하는 데에는 필히 성령의 일하심이 필요하다. 성령의 도움 없이 새 사람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이 이적, 사람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기로 결심하셨고, 이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셨다.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1:21) 죽으심의 희생, 강력한 사랑이 없이는 새롭게 되는 기적이 없다.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을 깊이 공감하고 내적으로 일치될 때 변화가 시작된다.

-이처럼 시커먼 무수한 죄인들이 완전히 변화되었다. 우리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고 도처에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재창조가 일어난다.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이 죽은 것,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은 세례의 순간같이 단번에 극적으로 나타나는 변화이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교제와 믿음의 역사를 통해 기어코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실재로 변화된다. 이런 일이 예수님 한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에서 무수히 일어났다. 사례가 많으면 되는 것이다.

-복음이 그 일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다. 그것은 피부를 변하게 하는 것 이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머리, 가슴, 오성, 양심, 동기, 욕구, 소망, 두려움 등을 철저히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전체 행동이 변화되고, 따라서 악을 행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선을 행하는 전문가로 변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신다. 기도는 지금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죄인이 변화되어 새로워질 수 있나? 불가능하다,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가능하다. 오늘 세례받은 이들, 이미 세례받고 성도의 반열에 있는 이들이여! 여러분은 변화되었는가, 새 사람이 되었나? 그렇다면 계속 하나님 안에 있기를 힘쓰라! 모든 노력을 기울여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노력하라!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걸은 젊어서 그리스도를 영접했지만 여러 해 동안 기독교인으로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 지나다 보면 죄로 인한 많은 짜증거리들과 더불어 온갖 과거의 어려움 속에 다시 돌아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2,30대 시절 내내 한편으로는 그녀의 노래를 사랑하는 많은 런던 사람들의 환호, 다른 한편으로 성령 사이에서 갈등하며 지냈다.

36세 되었을 때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란 소책자를 읽었는데, 그 책은 그리스도를 모든 면의 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프랜시스는 새로이 하나님께 헌신했다. 완전한 축복을 받으려면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얼마 후에 열 사람과 함께 며칠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중 몇 사람은 세례받지 않은 사람이고, 나머지도 기독교인이었지만 완전히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해버걸은 주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저에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해버걸이 그곳을 떠나기 전에 모두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죄인을 위한 소망은 바로 복음 안에,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다. 세례의 물 속에서 이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권능을 발견해야 한다. 회개의 눈물과 사람들 앞에서 하는 서약도 복음의 말씀으로 온전해질 때 진정한 변화의 열매로 나타날 것이다. 사람은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다. 한번의 서약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거룩하고 웅장한 예식으로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죄인을 새롭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정한 변화와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 몸을 입고 세상에 태어나셨듯이, 오늘 세례받은 이들, 이전에 이미 세례받은 여러분도 죄인이 변화되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라!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계속 변화를 이루라!~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믿음의 일꾼이 되라! 그러면 죄인이 바뀌어 의인이 되고, 거룩한 사람으로 온전히 변화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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