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설교일 | 2025-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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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출38:1-7 |
설교제목 | 반듯하고 소중한 번제단 |
반듯하고 소중한 번제단
출38:1-7
2025년 9월 14일 [하나님나라 셋째주일]
구약의 제단은 성전의 중심이다. 성전에 올 때 왜 오나?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러 온다. 예배드리는 시간이 교회생활의 중심이다. 왜 교회 다니나? 예배드리기 위하여다. 친구들과 어울려 모임을 가지고 같이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것은 아무하고나 할 수 있다. 같이 탁구를 치러 가거나 등산을 다닐 수도 있는데, 이것은 누구하고나 할 수 있다. 예배드리는 것은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교회에서만 할 수 있다. 이와같이 구약에서 신약시대까지 성전의 중심은 제단이고 교회생활의 생명은 예배이다.
지난 주간에 우리교회에서는 연합집회가 있었다. 이제는 젊은 목사에서 감리교회가 인정하는 중견 목사가 되신 강득환 목사를 모시고 다섯 번의 설교를 들었다. 정말 무리없이 물 흐르듯이 말씀을 전하더라. 아멘을 은근히 요구하지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말씀 앞에 “아멘!” 하여 삼척시의 기독교를 하나 되게 하고, 말씀으로 깨어나게 하는 집회였다. 많은 목사님들이 최고의 집회였다 하고 성도들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한 집회였다고 한다. 어느 권사가 집회에서 들은 말씀 중에 많은 내용이 남는데, 그중에서도 ‘빨간대가리’ 얘기가 남더라고 한다. 기름을 전달하는 빨간 머리 펌프가 복의 전달자로 목사님들을 세우신 것을 기억하게 했다는 것이고, 십원짜리 이십원짜리 삼십원짜리까지 온갖 욕을 자기도 요즘 먹으면서 산다고 하더라. 여러분은 무슨 말씀이나 이야기가 남는가? 이제 집회를 마쳤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우리 앞에 무엇이 있나?
이제 연합집회를 마치고 우리들이 할 일은 자기 제단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교회마다 자기들의 제단이 있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믿는 이의 일상이고 해야 할 본분이다. 교회마다 성도마다 자기들이 드리는 예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단을 수축하라, 예배를 회복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라는 은총의 수단을 주셨다. 예배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간다. 예배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를 만나주신다. 예배가 복을 받는 시간이요, 예배는 죄가 용서함 받아 우리 인간이 개조되는 자리이다. 병든 심령이 나음을 얻고, 아픈 육체가 고침받는 일이 예배에서 일어난다. 예배가 바로 되면 우리 마음이 바로 되고, 예배가 충만하면 모든 영적 요구가 채워진다.
예배가 살아났어요!
번제단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제단이다. 제물을 잡아서 기도하며 하나님께 불살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죄를 사하시며 축복하시는 단이다. 성서에는 이 단을 정성껏 만들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잘 드리는 것이 가장 복된 길임을 보여준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죄사함 받고 복을 얻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신약의 번제단이라 할 수 있는 바른 예배를 드림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고, 그 결과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를 지으셨다. 우리를 돌보신다.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를 건져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불신앙과 타락의 더러움에 빠져 죄와 악에 물들어 있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더러움에서 깨끗해져야 하나님께로부터 안아주시고 품어주심을 받을 수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깨끗함을 얻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하는 곳이 바로 번제단이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정성스런 제물과 함께 간절한 기도를 드릴 때 하늘로부터 불로 응답 받는 신비로운 기적을 보았다. 사무엘도 미스바에서 온전한 번제로 만유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에벤에셀의 복을 받았다. 솔로몬은 기브아에서 일천 번제의 단을 쌓아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그가 구한 지혜와 구하지 않은 그 밖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받아 누리게 되었다.
동부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학생이었던 어떤 집사님이 자기 신앙생활을 돌아보니 예배 때마다 너무 졸리고 무기력하여 자기가 왜 교회를 다니고 있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하였다. 예배 시간은 조는 시간이요 기도는 눈감고 잡념에 빠져있는 시간이며 찬송부를 때는 사람들 노래부르는 거 구경하는 시간이었다. 왜 자기가 이렇게 무기력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보았더니, 성도들과의 사소한 오해로 서로 갈등이 생긴 이후에 예배를 형식적으로 드리게 되었음을 알았다.
예배에 문제가 생기자 바로 전체 생활에 영적 위기가 왔다. 그 집사는 기도하면서 진심으로 예배 시간에 집중했다. 제단을 수축한 것이다. 그러자 말씀이 들려지는 은혜가 먼저 임하더라고 한다. 말씀이 조금씩 들려지기 시작하니까 그 말씀을 집중해서 말씀을 붙잡고 기도드리기를 반복하였다. 그러자 차츰차츰 예배에서 이전에 느꼈던 놀라운 감격과 기쁨이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 집사의 얼굴이 정말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던 것을 기억한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번제단은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와 그 예배가 드려지는 성전 전체를 가리킨다. 또한 말씀이 흘러나오는 강단을 의미한다. 올바르게 번제단을 완성할 때 응답과 승리와 축복을 이룰 수 있다. 누구를 핑계할 수 없다. <예배가 회복되었어요, 예배가 살아있어요! 하나님 말씀이 들리고,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요! 내 삶에서 힘을 얻고 새로워지는 시간은 예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어요!> 본문은 올바르게 번제단을 만드는 것이 어떤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와 예배를 회복하라! 예배를 살리라! 예배 때마다 온전히 번제단을 이루어 응답과 승리의 신앙생활을 하라!
반듯한 번제단, 반듯한 예배
올바르게 번제단을 만들려면, 반듯한 제단을 이루어야 한다. ‘그가 또 조각목으로 번제단을 만들었으니 길이는 다섯 규빗이요 너비도 다섯 규빗이라. 네모가 반듯하고 높이는 세 규빗이며.’(1절) 당시 번제단은 네모 반듯하였다. 번제단은 가로 세로 다섯 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라고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모세는 만들었다.
반듯한 제단이란 오와 열이 똑같고 네모 반듯한 것을 의미한다. 모양의 네모반듯함은 영적인 의미에서 치우침이나 기울어짐이 없이 옳고 바르게 제사드리라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세는 반듯하게 드려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하나님께 옳고 바르게 예배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승리를 허락하신다. 우리의 예배가 찌그러지고 흠이 있는 예배가 되지 않고, 반듯하고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하겠다.
반듯하게 만들어진 제단과 같이 반듯한 예배란? 마음이 담기고 열정이 담긴 예배이다. 믿음이 담긴 예배로서 생활과 연결되는 예배여야 한다. 집중하여 시간과 정성을 드리는 예배이다. 그런데 인간이 약하고 자기중심적이며 하나님 앞에 모자란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반듯한 예배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내 감정과 생각, 주장, 편견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예배드릴 때 보면 자기 감정과 그날의 형편이 얼굴에 다 나타난다. 반듯하게 예배드리기 힘들다!
반듯한 제단에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죄가 사함받고 복이 임한다. 반듯하다는 것은 시간을 반듯하게 잘라낸 것을 의미한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다. 예배시간을 지키는 것이다. 현대의 기업과 근로자들의 생활은 노동시간보다 휴가시간을 주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휴가를 보장받지 않고는 일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하나님 예배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우리 삶의 시간과 계획을 뚝 잘라내야 한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는 나는 전진할 수 없어요-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한 시간! 예배시간을 최우선의 시간으로 두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들을 순서대로 줄 세우는 것- 이것이 반듯한 제단으로서의 예배다!
가족이 아프거나 아이를 돌보아야 할 때 주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주님이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이 말씀은 안식일에 밀이삭을 제자들이 자를 때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배고픈 사람 먹이는 일이 안식일 계명을 어떻게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 젊은 부부가 서로 교대로 아기를 보다가 아기를 맡은 한쪽이 11시 예배에 가족들과 꾸미고 나오지 못해서, 다른 예배시간에 나오거나 영상예배 드리는 것을 나무라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마음만은 반듯하게, 찬양과 기도와 말씀 듣는 자세만은 확실하게 예배드리는 것이 바른 제단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람을 구원하고 살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되, 반듯하게 드려라는 것이다. 형편에 따라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어긋나지 않게만 예배드리되, 예배답게, 제단답게 반듯하게 바르게 하나님 중심으로, 정성껏 예배하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예배는 반듯한가? 여러분은 영적인 깊이를 가지고(신령으로!) 진실되게(진정으로) 예배드리는가? “주여! 직장에서 주일근무를 서기 위해 성전예배를 드리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을 다하여 영으로 말씀을 받으며 예배하게 하소서!”
요즘 여행을 많이 다닌다. 그러다 보면 주일성수가 어렵다. 이럴 때 성도들이 예전에는 죄책감을 많이 느끼며 하나님께 죄송해했다. 그러나 요즘은 아예 죄책감이나 송구스러움조차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반듯한 제단을 세우기 원한다면 해외여행 때에도 주일을 지키도록 일정을 조정하고 부득이할 때에도 주일성수를 반듯하게 준비해야 한다. 여행 핑계하지 말고, 여행 중에 시간과 모임과 예물을 준비하고 땅끝에서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영과 진실로 예배하라! 하나님이 반듯한 예배로 받아주실 것이다.
반듯한 번제단이 되려면, 헌금도 반듯하게 드려야 한다. 주일헌금도 빠짐없이 드리자. 예배에 대한 감사가 배어있다. 십일조는 약속하신 축복이 깃들어 있는 예물이다. 반듯하게 잘라 바치자. 하나님께 반듯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내 기분이나 상황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인간관계 때문에, 과거의 어떤 일과 현재의 어떤 문제 때문에 우리 예배가 찌그러지거나 꼬여있을 때가 있다. 그러니 내 생각, 내 편견을 버리는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반듯한 예배, 반듯한 번제단을 만들어 가야 한다.
존귀한 제단, 소중한 예배
올바르게 번제단을 만들려면,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 네 모퉁이 위에 그 뿔을 만들되 그 뿔을 제단과 연결하게 하고 제단을 놋으로 쌌으며.’(2절) 출30:3을 보면 분향할 제단을 만들 때 ‘제단 상면과 전후좌우 면과 뿔을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테를 두를지며.’ 라고 하였다. 이처럼 제단의 모든 장식은 아주 가치 있는 것으로 소중하게 만들라고 하였다. 왜? 제단은 소중하니까!
제단 뿔은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상징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번제단과 분향단은 뿔을 놋이나 정금으로 싸고 제사를 드릴 때에는 그 뿔에 제물의 피를 발라 하나님께 드렸다. 놋이나 금으로 장식한 것과 제물의 피를 바르는 의식은 속죄와 가장 소중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의 예배를 가치 있게 만들어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이 담겨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과 공간은 금과 같이 귀한 것이다. 무릇 모든 예배자는 언제나 예배를 가치 있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예배를 금과 같이 귀한 시간, 보배처럼 소중한 자리로 만들 때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속죄의 은총과 복이 나타날 것이다. 예수의 피를 보혈이라고 하는 것은 ‘보배같은 피’라는 것으로서 예수의 피가 보배처럼 소중한 성자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배를 이렇게 값지게 만들어야 한다. 성도들이여! 우리 예배를 금처럼 귀하게 여겨 주님의 보혈이 흘러 죄를 사하시는 진정한 구원과 축복이 완성되는 자리로 만들자!
예배를 소중하게 만들려면? 먼저, 시간을 귀하게 여기고 지켜야 한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사는 사람으로서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제단을 쌓는 예배를 소중하게 만들려면 시간을 소중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 되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고, 준비된 시간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보다 이른 시간에 예배자리로 나와야 한다. 예배보다 늦은 시간에 예배 자리를 떠야 한다.
오후예배 때 찬양시간이니까 늦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은 정말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찬양의 예배를 받으신다. 성도들 중에는 예배를 마치기 전에 나가는 이들도 있다. 예배를 다같이 마치고 나가면 주차장에서 막힐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어느 교회 목사님은 미리 나가는 성도들을 막기 위해 눈을 뜨고 축도 한다는 웃지못할 얘기도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보다 자기 편리함을 더 중하게 여긴다면 어찌 가치 있는 예배가 되겠는가?
예배를 소중하게 만들려면? 단정한 의복과 바른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잔치자리에 초대 받은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을 받고 쫓겨난다는 복음서의 비유는, 바로 바른 마음가짐을 위하여 복장과 자세가 중요함을 보여준다. 왜 주일이면 그렇게 시간에 쫓기는가? 설거지하다 젖은 치마 돌려 입고 나오거나, 쓰레기 버리러 갈 때 신는 슬리퍼를 끌고 예배 자리에 나오는 것은 예배를 천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배 시간의 우리 자세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교회는 성가대원들까지 강단을 바라보며 집중하는 태도가 좋다. 그런데 개중에 조금 눈에 거슬리는 경우가 있는데, 설교시간에 찬송가를 뒤적이거나 성경을 계속 보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열고 집중할 때 그 정성과 영성을 보시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소낙비와 같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치 있고 소중하게 여겨 영과 진리로 드리면, 하나님도 우리 예배를 가치 있게 받으시어 축복하실 것이다. 예배 때마다 성령이 임재하고,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몸과 마음이 고침을 받으며, 문제가 해결되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기를 바란다!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예배를 통하여 찬송이나 기도나 말씀을 들을 때, 혹은 예물을 드릴 때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설교자는 말씀을 증거할 때 말씀대로 살기를 다짐하면서 준비하여 선포한다! 성도들은 찬송 부를 때 가사 속에서 자기 믿음이 고백되어야 한다. 기도할 때 기도내용 가운데 자신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말씀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하고, 예물을 드릴 때 그 예물이 합당한지 돌아보아야 한다. 제단에 모든 기구, 곧 통과 부삽과 대야와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과 놋그물까지 갖춰 놓는 것처럼, 우리 믿음의 여러 요소들을 정성껏 갖추어야 바른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내가 첫 목회할 때 시골교회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두 자매가 있었다. 두 집이 다 어머니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교회에서 맡은 일도 비슷하다보니 항상 비교가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이 교회에 와서 하는 역할이 서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 자매는 예배 마치고 교인들 식사준비하고 교회 안팎을 돌보는 일이 바빠 이리저리 드나들며 예배자리에 많이 빠지는 것이었다. 또 한 자매는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일에 좀더 열심히 하다보니 예배자리에 틀림없이 자리를 지키고 나서 교회 봉사 일에는 다음 차지가 되었다.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 예배를 소홀히 하고 일만 열심히 하던 자매는 몇 년 뒤에 낙심하여 교회를 떠나고 엄청나게 어려운 시험을 당하였다. 그에 비해 예배 잘 드리던 자매는 훗날 장로 부인이 되고 번성한 가문을 이루었다.
바른 예배에 주시는 은혜가 있다. 우리 모두 바르고 소중한 제단을 만드는 사람들이 되자! 반듯하고 가치있는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회복하고 예배를 살리고 예배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성별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완성하시어 기적과 축복, 능력과 화평이 흘러넘치는 삶을 허락하실 것이다. 매주마다 온전한 번제단을 쌓음으로 엘리야의 제단에 응답하신 불의 응답을 받고, 미스바에 응답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에벤에셀의 복을 받는 교우들이 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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