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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소 (시46:4-7) [2025년 10월 26일, 성령강림스무째/ 종교개혁주일]
2025-10-25 14:29:22
박신진 목사
조회수   4
설교일 2025-10-26
설교말씀 시46:4-7
설교제목 하나님의 성소

하나님의 성소

46:4-7

20251026[성령강림 스무째/ 종교개혁주일]

 

평안하신가, 건강하신가? 무더운 여름, 비 안 오는 메마른 여름을 지난 지 한 달이 지나자 추운 가을,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가을이 금방 닥쳐왔다. 여러분, 환절기에 건강 조심 하시라! 어른들은 코로나 진단 받으시고, 조금 시원찮으면 마스크 쓰고 다녀야 한다. 이런 때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한다. 이런 머리 아픈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개혁을 말하기에 우리는 너무 피곤하고 인생의 짐이 너무 무겁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를 생각하면 개혁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곳에서 오늘까지 우리 믿음이 자랐고 우리가 사랑하는 믿음의 산성, 하나님 영광의 성채인 교회가 흔들리고 있다. 어찌하면 좋을까?

중세 로마의 가톨릭교회도 그랬다. 안으로 타락하고 밖으로 무기력하였다. 심지어 교황 레오 10세는 성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속죄용 면죄부 장사까지 하고 말았다. 교회가 얼마나 막장이었나 하면, 천당 가는 표를 판 것이다. 카톨릭 교회가 성전을 짓는다고 자기 조상들 천국 가는 표를 돈 받고 팔았다. 도미니크수도회의 수도사인 테첼이 면죄부를 팔기 위해 독일을 순회하고 있을 때,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교회답게 돌이켜 세우려고 개혁의 종소리를 높이 울렸다.

요즘은 서울에 사는 귀부인들이 만나면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요즘도 교회 다니냐?” 참 교회로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요사이 주식시장은 지수가 폭등하고 있는데, 교회는 주가 폭락 하듯이 교회에 대한 호감과 인식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전도가 되지 않고 대도시 서울의 오래된 교회는 대부분 교인수가 줄어드는데, 사회에서 교회의 이미지가 추락해서 여론이 많이 나빠진 때문이다. 한번 악화된 여론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이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교회가 교회답게, 성도가 성도답게 되지 못한 데 큰 원인이 있다. 교회가 나아도 뭐가 좀 나아야 할 것 아닌가! 내게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교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젊은 마르틴 루터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그는 당시 교회가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바른 신앙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였다. 그러다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95개 조항, 100가지에 달하는, 교회생활에 대한 실제적이고 도전적인 엄청난 공개질의를 성문에 붙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논란이 일어난 끝에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결국 루터가 하려고 했던 일은 교회다운 교회의 회복이다. 무엇이 참 교회이며, 무엇이 참 신앙인가?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던 끝에 교회는 개혁되었고, 신앙은 새로워졌다. 교회다운 교회가 무엇인가? 오늘 이 문제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려 한다. 이것이 바로 루터 종교개혁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시편46편은 시온시편이라고 분류되고, 딱히 교회에 대하여 노래한 시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와 돌보심을 노래하는 이 시편 중간 부분은 하나님의 성소를 노래하는 부분이고, 이 부분을 잘 묵상하노라면 오늘날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성소를 찬양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고 다스리시는 교회는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므로,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여기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성소, 교회다운 교회에는 은혜의 강물이 흐른다. 4절을 보자.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성소에 시내가 나뉘어 흘러든다. 시내는 강의 지류를 말하지 않는가? 시내 한 줄기만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줄기의 시냇물이 풍성하게 성전으로 흘러든다고 시편은 노래하고 있다. 그렇다! 교회다운 교회는 기본적으로 은혜의 시냇물이 흘러가야 한다. 기쁨의 시내가 흘러야 한다. 사랑의 시냇물이 풍성히 넘쳐흘러야 한다.

교회가 너무 메마르면 안 된다. 교회가 광야같이 메마르면 어디서 터지든 문제가 터진다. 사람은 다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있는 한 문제는 있다. 그러나 교회에 시내가 흘러넘치면 그 문제가 다 씻겨 버린다. 광야 같은 세상은 메마르고 물이 없고 곤고하며 길을 잘 찾을 수 없다. 그러기에 생명 있는 것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어쩌면 그렇게 마음을 메마르게 쓰는지! 메마른 마음에서 상처 주는 말이나, 각박한 표현들이 나온다. 심방할 때, 전도할 때, 교회 봉사할 때, 정말 작은 것들을 가지고 이기적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은혜가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시내가 흐르는 곳이다. 은혜가 강물이 흘러넘친다. 이곳은 원래 풍요롭고 넉넉하며 서로 상통하고 즐겁다. 그러기에 교회에 들어오면 모든 존재가 다 생명을 얻고 더 얻어 생기 있고 즐거운 모습으로 변화된다!

예루살렘은 원래 물이 흐르는 곳이 아니다. 강도 안 흐르고 지류인 시냇물도 흐르지 않는다. 그러니 메마르고 살기가 힘들었다. 가장 좋은 것은 은혜의 샘물이 철철 흐르게 하는 것이다. 은혜 받아야 한다! 교회에 은혜의 강물이 흐르게 하자! 은혜의 시내가 흐르기 시작하면 저절로 교회가 정화되고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서울 청계천에 강물이 흐르게 하니까 청계천이 예전처럼 지저분해지지 않는다. 강물이 먼지나 구정물들을 다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샘이 마르고 시내가 그치면, 아무리 청결하고 의롭게 살아도 결국 지저분해지고 갈등이 생기며 문제가 일어난다. 목회자들이나 장로님들이나 교인들이 남 탓하지 말고 자기 속에서부터 은혜받아, 은혜의 강이 흐르게 해야 한다. 세상에서보다 교회에서 더욱 시내가 흐르도록 풍성하고 넉넉하게 나누고 베풀라! 생명의 능력이 여기에서부터 나타날 것이다.

 

충격적인 이야기 하나.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교회는 오래 전에 제롬이라는 사람이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역 성서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였다. 잉글랜드 사람도 독일 사람도 프랑스 사람도 다 자국어가 아닌 라틴어로 된 불가타역 성서로 낭독하고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해야 했다. 당시 라틴말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지식인들이 쓰는 말이었다. 그러니 일반 대중은 성서를 읽거나 들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대 라틴어를 모르는 민중이 제대로 된 신앙교육을 받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니 성경을 모르고 배울 기회도 없는 사람들은 성화를 숭배하고 성찬을 절대시하는 미신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은 예배당 스테인드글라스 그림으로 복음서의 단편적인 내용들을 짐작하는 정도였다.

당시 한 아버지가 잉글랜드에 살았다. 그는 성경을 제 나라 말로 읽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겼다. 라틴어를 모르는 어린 자녀들에게 모국어인 영어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는 것이 그의 소박한 꿈이었다. 비극은 아버지가 그 꿈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소신에 따라 주기도문을 영어로 번역하여 자녀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외의 다른 언어로 된 성서를 소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황당무계한 법이 그들을 옭아맸던 거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무려 7명이나 화형에 처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최주훈, <루터의 재발견>, 2017) “이게 실화냐?” 라고 묻는다면, 그렇다! 분명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자기 모국어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교회가 성도를 죽이는 슬픈 코미디의 시대!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 시대였다. 은혜의 시내를 막아버려 메마른 정죄와 저주만이 가득한 시대였다.

주여! 우리 교회에 시내가 나뉘어 흐르게 하옵소서! 주의 종과 온 교인들이 자기 자리에서 은혜와 사랑의 샘물을 흘려보내게 하시고, 처음 믿는 사람들과 동네사람까지 은혜와 사랑의 샘물을 풍성히 마시고 흘려보내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은혜받으라! 교회개혁은 교회에 은혜와 사랑의 지류가 생겨나서 여러 시내가 흐르도록 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성소, 교회다운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 5~6절을 보자!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세상은 흔들리지만 하나님이 도우시며 소리를 내시는 하나님의 성은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다. 오늘 시편에 의하면 성소 즉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고, 이른 아침부터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곳이며, 하나님이 소리를 내시는 곳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 소리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 시대는 사람들이 자기의 귀가 가려워서 가려운 데를 긁어달라고 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너무 이기적인 것 같다. 어릴 적부터 공주님, 왕자님처럼 떠받들어지니까 교회에 와서까지,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기만 위해달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런 풍조를 경고하였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4)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디모데전서에 말씀하신대로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3:15)

교회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들려지도록 하라! 그래야 교회가 흔들리지 않는다. 자꾸 자기 말을 높이면 교회가 흔들린다. 사람 말이 들리고 세상 말이 들리고, 자기 이익, 자기 주장, 자기 견해, 자꾸 내세우면 교회가 흔들린다. 세상은 흔들려도 교회가 흔들릴 수 없는 것은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도우시며 하나님이 소리를 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소리를 내시면 땅이 녹는다! 더 이상 무엇이라 떠들 자가 없다! 여러분, 교회에서 설교 들을 때, 성경 읽을 때,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가?

지난 주간에 우리지방 연합집회가 열렸는데, 수요일 말씀에 큰 도전을 받았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설교가 들리지 않는 교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하기보다는 자기 말을 하나님이 들어주기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설교에 집중하고 새벽에 읽는 성경말씀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기 목소리 자기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어서 설교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말씀이 들려야 한다. 이게 바로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오직 말씀으로!!

뭔 소리가 그렇게 많은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오늘날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면 우리가 그것을 잘 듣고 행하면 된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이 성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윗이 예언자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솔로몬이 성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가 요한이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주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소리를 발하시고 우리가 그 앞에서 떨며 순종할 때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이런 교회가 세상 가운데 설 때 세상도 흔들리지 않는다!

 

셋째로, 하나님의 성소, 교회다운 교회는 피난처가 된다. 7절을 보자.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만군의 여호와, 세상 가운데 가장 높고 힘 있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 야곱의 하나님은 족보가 있는 하나님, 관계가 있는 하나님, 무언가 우리와 연관되어 계신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우리 피난처가 되신다!

피난처 혹은 산성!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것을 굉장히 찾고 있다. ‘사람을 찾습니다!’가 아니고 사실은 피난처를 찾습니다!’ 이다! 피할 곳, 안전한 곳, 쉴 곳을 사람들은 간절히 찾고 있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그냥 죽지 않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 되지도 않은 소리로 죽고 싶다고 신호를 보내고, 무언가 피할 곳, 안전한 곳을 엄청나게 찾는다고 한다. ‘이 산 저 산 둘러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121:1)

피난처를 찾는 사람, 안전한 산성을 찾는 사람에게 교회가 피난처가 될 수 있을까? 교회다운 교회는 피난처를 찾는 사람에게 피할 곳과 쉴 곳을 주는 교회다! 교회는 죄인들이 피할 곳이 되어야 한다. 죄인들이 교회 와서 정죄당하고 무시당하고 사람 취급 못 받으면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하나? 절대 죄인들을 정죄하지 말고 기도해 주어야 하는 곳이 교회다! ? 교회다운 교회, 참 교회는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약자가 교회 와서 무시당하면 안 된다. 장애인과 환자가 존중 받고 우대받는 곳이 참 교회다! 파산당한 자, 자신의 실수로 어려워진 사람, 소외된 자를 품는 곳이 되어야 한다. 죽어가는 이를 살리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사회 문제, 어려운 사람을 다 감당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을 내치지 않고 이해하고 받아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에 오면 안전하다, 편안하다, 살 길이 있다, 이렇게 되어야 참 교회다! 교회는 피난처이며 산성이다!

여러분! 좀 너그럽게 마음을 가지자. 예수께서 죄인들을 용납하신 것처럼, 잘난 사람을 요구하는 교회가 아니라, 있는 사람 그대로를 잘난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교회가 되도록 하자! 교회 부흥은 가진 사람, 생긴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약한 사람 병든 사람 없는 사람이 모여서 이룬다. 이 사람들이 점점 든든해지고 병이 낫고 삶이 풍성해져서 이루어 가는 것이 교회 부흥이다! 그렇게 하자!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안도현-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교회의 표어이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지 않고 흠모하고 존경하도록 교회다운 교회의 본 모습을 회복하자!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 믿음으로 새롭게 나아가자. 은혜의 시내가 교회 안으로 흐르는 교회! 하나님의 소리가 들림으로 흔들리지 않는 교회! 피난처가 되는 교회!

 

주여! 우리에게 이런 교회를 주시옵소서!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가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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