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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라같은 친구 (행17:1-10) [2026년 9월 13일, 성령강림후 열여섯째주]
2026-09-12 10:49:25
박신진 목사
조회수   3
설교일 2026-09-13
설교말씀 행17:1-10
설교제목 실라같은 친구

실라같은 친구

사도행전17:1-10

2026913[성령강림후 열여섯째주일]

 

구약에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가 대표적인 친구관계로 꼽히고 있다. 다윗과 요나단의 친구관계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정에서 시작되었고 나중에 친구관계를 지키기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끝까지 유지되었다. 요나단은 히브리 민족의 첫째 왕 사울의 아들로서 왕자였다. 다윗은 사울의 총애를 받아 왕궁에 들어갔으나, 백성들이 사울 대신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함으로써 사울의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다윗과 요나단은 전쟁의 동료였고 마음을 통하는 소싯적 친구였지만, 사울의 왕권을 이어받는 데 서로 경쟁하는 상대가 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요나단은 다윗과의 우정을 배신하지 않고 다윗의 목숨을 지켜주었다. 다윗은 후에 요나단의 자식들을 보호하고 돌보아주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복된 것 중에 하나가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좋은 친구는 삶을 재미있고 생기있게 하며, 어려울 때 힘이 되고, 자신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 사람을 알려면 사귀는 친구들을 보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이다. 친구가 없는 생활은 사막과 같은 생활이지만, 좋은 친구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며 사는 생활은 누구도 부럽지 않은 즐거움이 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친구를 가지기 원하였고, 좋은 친구 사귀는 것을 인생의 중요한 일로 보았다.

동양에서 좋은 친구관계로 알려져 있는 것이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것이다. 중국에 관중과 포숙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포숙은 자본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담당하여 동업하였으나, 관중이 이익금을 혼자 독차지하였다. 그런데도,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하였고, 함께 전쟁에 나아가서는 관중이 3번이나 도망을 하였는데도, 포숙은 그를 비겁자라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그를 변명하였다. 관중과 같이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포숙과 같은 좋은 친구가 있어서 그가 그래도 후세에 이름이 남는 사람이 될수 있었다.

친구는 다 귀하다지만, 없는 것보다 못한 친구도 사실 있다. ‘차라리 저 친구와는 친구가 되지 않았더라면 서로에게 좋았을 것이다하는 친구가 세상에는 적지 않다. 친구 잘 사귀라, 친구 잘못 사귀면 신세 망친다. 우리는 어떤 친구를 가졌는가? 함석헌은 홀로 집 떠날 때 울어줄 친구를 가졌는가라고 물었다. 믿음의 친구는 세상 친구들보다도 더욱 귀한 친구이다.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섬기는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친구들을 통하여 사랑을 배우고 하나님의 일을 이 땅위에 이룬다. 내게 진정한 믿음의 친구가 있는가? 오늘 실라같은 믿음의 친구를 바라보면서 우리 교회에도 진정한 믿음의 벗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믿음의 벗

신약성경에서 실라(Silas)는 바울의 가장 중요한 동역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바나바가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에서 핵심 동역자였다면, 실라는 제2차 선교여행에서 바울과 고난을 함께 감당한 대표적인 동역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실라와 바울의 관계를 살펴보면, 단순한 수행원이 아니라 교회의 신임을 받은 지도자, 선지자, 선교사, 그리고 감옥까지 함께 간 신앙의 동지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실라는 신약성경에서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르는데, 사도행전에서는 주로 실라(Silas)라고 부르고, 바울서신에서는 실루아노(Silvanus, 실바누스)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실라라고 하지만, 고린도후서 1:19과 데살로니가전서 1:1에서는 실루아노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실라와 실루아노를 같은 인물로 본다.

우리가 다 아는대로 바울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위대한 전도자이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복음의 역사를 이루셨다 해도, 바울이 그 복음을 소아시아와 근동, 로마와 스페인까지 증거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온세계에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셨겠지만,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으며 서신을 기록하여 복음의 내용을 초대교회에 증거하였기 때문에 복음의 역사가 촉진된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또한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더욱 깊게, 체계있게 정리하여 전파하고 가르친 교회의 스승이기도 했다. 바울의 구원론과 교리가 초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런데, 바울 혼자 위대하고 훌륭해서 이 일을 이루었는가? 아니다! 우선은 성령이 바울을 붙들고 힘주시며 인도하셨고, 나아가 바울에게는 여러 믿음의 벗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울이 바울 된 것은 실라 뿐만 아니라, 회심 후에 안수기도해 준 아나니아 선지자를 비롯하여 바나바와 디모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유럽의 첫 도시 빌립보에서 바울을 여러 모로 도와준 루디아 등, 많은 친구들,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오늘 본문 4절과 10절에서 바울과 실라라는 말이 한번 씩 나온다. 바울도 위대하고 실라도 훌륭하였으나, 나는 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라는 단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 바울과 실라가 친구로 협력하고 동역하였기에 위대한 복음의 역사가 성취된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믿음의 벗이요 선교의 동역자였다. 본문을 보면, 그들은 데살로니가 여러 지방에서 함께 복음을 전하였고, 베뢰아에서도 동역하였다. 실라는 바울을 도와서 이름없이 빛도 없이 복음의 일들을 하였다. 초대교회의 바울 3총사가 바로 바울, 디모데, 그리고 실라였다. 바울 뿐만 아니라 무릇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 안에서 협력하는 것은 신앙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

목회자와 평신도, 남자와 여자, 먼저 믿은 자와 나중 믿은 자, 장로와 권사, 집사와 초신자들- 이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협력과 협동이 우러나오게 될 때 교회는 성령으로 역사하며 사랑으로 가득한 은혜의 동산이 될 것이다. 각자 연약하고 부족해도 협력하고 사랑하는 것이 각자 훌륭하고 잘났으나 협력하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영어로 말하면 ‘and’, 누구누구, 무엇무엇 이라는 사이가 중요한 것이다. 요즈음 모두가 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세상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체였다. 처음 실라는 유다와 더불어 사도들의 편지를 안디옥에 전하는 역할을 맡았다(15:23-29). 실라는 안디옥 교회에 편지를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얼마 동안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자기들의 예언의 은사를 사용하여 이방인 형제들을 격려해 주었다. 실라는 초대교회의 사역에 등장하기 처음부터 이방인들과 형제애를 나누었고 안디옥의 형제들도 그들을 환대하였다.

 

바울과 실라의 관계

1. 무엇보다도 바울과 실라는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복음에 대하여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말씀과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된 동역자였다. 그러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유대인에게와 똑같이 이방인에게도 증거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실라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보내는 사도들의 편지를 전달하는 일을 흔쾌히 맡아 했다는 것만 봐도 그가 그 편지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버킷이란 학자는 바울과 실라가 함께 스데반에게 말씀을 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실라는 분위기에 휩쓸려 막연하게 믿은 사람이 아니고 바울과 함께 복음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을 때에도 말씀 안에서 믿음의 바른 길을 지켜나갔다. 믿음 안에서 말씀 안에서 벗된 자들은 결코 잘못되지 않는다.

요즈음 교회에서 친구가 되었다 하면서도, 놀러 다니고 먹으러 다니는 데에만 친구이지 정말 진리의 동반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봄에 나물 하거나 가을에 도토리 따러 다닐 때는 즐겁게 어울리면서 그렇게 좋은 친구일 수가 없다. 그런데 그들은 모여서 숙덕거리고 휩쓸리기는 하나, 복음의 능력을 찾지 못하고 은혜의 삶을 살지 못한다. 모이면 모일수록 은혜가 되고 덕을 세워야 하는데, 모이면 모일수록 시험에 빠지고 세속화되어 버린다. 처음에는 웃으며 어울리지만 오래지 않아 시험과 올무에 빠져 친구 때문에 교회 다니기 싫어지는 결과가 생겨난다. 바울과 실라와 같이 말씀과 기도로 친구가 되라. 그런 친구는 처음에는 재미없고 인간적으로 쉽게 친밀해지지 않는 것 같으나, 한 성령과 은혜 안에서 오래 웃으며 변치 않게 사귄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친구관계가 있는가 하면, 거룩하고 은혜가 넘치는 친구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교회 안에서와 세상 속에서 인간관계를 잘 형성해야 한다. 복음에 대해 같은 이해를 가지며,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된 친구관계를 말한다. 좋은 친구관계, 믿음의 좋은 교우관계는 우리 믿음을 깊고 바르게 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쳐, 단단하고 충실한 믿음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게 한다.

 

2. 바울과 실라는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하는 동역자였다. 우선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잘알았다.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믿음을 배웠고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교회의 전통과 권위에 익숙했다는 말이다. , 바울과 실라는 둘 다 로마인이었다. 로마의 시민이라는 신분은 식민지였던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대단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바욱과 실라는 이 로마인의 신분을 선교하는 일에 유익하게 활용하였다. 바울은 말씀 전하는 일에 실라는 권유하는 일에 협력하였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여 마게도냐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고, 바울이 바나바와 개척한 교회들을 함께 순회했다. 실라는 헬라어를 잘했다. 그의 이런 헬라어 실력은 서신들을 기록하거나 대필할 때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행 15장에 처음 등장할 때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였다. “형제 중에 인도자인 유다와 실라를 택하여”(15:22) 따라서 실라는 적어도 사역의 중심지가 예루살렘이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도행전 16:20에서도 바울과 실라를 가리켜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실라가 로마 시민권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투옥된 뒤 바울이 말한다.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16:37) 여기서 우리에는 실라도 포함된다. 실라는 유대 문화도 알고 로마 세계에도 익숙한, 말하자면 두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실라는 선지자였다. 사도행전 1532절에,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15:32) 초대교회에서 선지자는 단순히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씀을 맡은 사람이라는 호칭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공동체에 전하고, 권면하고, 위로하고, 가르치고, 교회를 굳게 세우는 사람이다. 특히 실라는 사람을 굳게 하는은사가 있었다. 바울이 개척자라면 실라는 세우는 사람이었다. 바울이 문을 열면 실라는 그 문을 통해 들어온 사람들의 믿음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들은 어떤가? 교회생활 오래 해서 교회의 생리를 속속들이 아는 것도 은사다. 어릴 적부터 오래 믿은 분들, 교회 초창기 때부터 교회에 다닌 분들은 그 은사를 잘 활용해야 한다. 그런데 오래 믿은 사람들은 초신자나 이전해 온 신자들을 견제하지 말고, 초신자 전입신자들은 잘 돌보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많이 배운 사람들은 행여 다른 사람 무시하지 말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잘난 척 한다고 흉보지 말자. 각자의 은사가 있다. 서로 다른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내가 못하는 것을 남이 하고, 남이 부족한 것을 내가 채운다고 생각하여 서로 협력하며 받은 은사를 활용하여 친구가 되라!

 

3. 바울과 실라는 고난을 함께 겪은 동역자이다. 초대교회의 많은 선교지에서 바울은 실라와 함께 고난당하였다. 빌립보에서 왜 바울과 실라만 붙잡혀 매를 맞고 옥에 갇혔는가? 그들은 전체 선교팀의 지도자였고, 또한 유대인이었다. 바울과 실라를 그렇게 투옥시킨 것에는 점치는 여종 주인의 돈벌이 출처가 없어진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 유대인 감정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고 함께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은 억울해서 울며 신세한탄을 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하며 찬미하였다. 만약 바울 혼자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면? 절대 찬송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함께 고난을 당하였기에 기도의 제목이 되었고 찬송이 나오게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데살로니가에서도 유대인 반란행위의 주동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도시 관원들 앞에서 고소를 당할 때, 형제들이 밤중에 몰래 베뢰아로 보냈던 사람도 바로 바울과 실라였다. 베뢰아에서도 바울은 가장 적대감을 일으켜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고난에 피하지 않고 동역하였기에 오래 남는 믿음의 동역자가 되었다. 어디서나 진짜 친구는 함께 고난받는 친구이다.

요즈음은 복음 안에서 함께 고난받는 친구가 귀하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고난이 올 때 사람들은 피해버린다. 여러분에게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요구하실 때가 올지도 모른다. 이때 회피하지 말고 함께 협력함으로 믿음의 동역자가 되라! 요즈음 고난이 무엇인가? 매를 맞거나 감옥에 갇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부담을 함께 지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오해를 함께 받거나 어려움을 함께 겪어야 하는 경우이다. 나는 못한다고 내빼지 않고 힘들지만 함께 보태주는 것이 고난받는 것이다. 복음을 위하여 짐을 지라. 고난에 함께 한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할 믿음의 친구가 될 것이다. 세상에 많은 친구들이 있지만, 믿음 안에서 함께 고난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친구가 가장 귀하다.

옆에 있으면서 힘들다, 죽겠다!’ ‘도와줘, 편들어줘!’ 징징대기만 하는골치 아픈 친구들때문에 믿음이 시험에 들려고 할 때가 있다고들 한다. “좋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속회나 선교회에서, 교회학교나 찬양팀에서 좋은 동역자를 찾고 싶어요.” ‘좋은 동역자란 누구인가?’ 답답해 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은 목회적으로도 아주 좋은 인물인 실라를 만나 전도사역에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이 가울이 가기 전에, 올해가 다하기 전에 그런 믿음의 친구, 마음 통하는 동역자들을 만나게 되기를 축복한다.

 

맺는 말

시절이 하수상하다보니 악한 친구, 위험한 친구는 많으나 거룩한 친구, 선한 친구가 참으로 귀하다. 우리교회에도 실라같은 사람이 많아지기를 소원한다. 여러분도 실라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여러분이 또한 그 누구에게 실라같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성령님께 기도하라! 여러분에게 바울과 실라같은 좋은 친구가 많기를 소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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