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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에 담는 보배 (고후4:7-11) [2026년 10월 4일, 성령강림후 열아홉째주일]
2026-10-03 12:14:39
박신진 목사
조회수   5
설교일 2026-10-04
설교말씀 고후4:7-11
설교제목 질그릇에 담는 보배

질그릇에 담는 보배

고후4:7-11

2026년 10월 4일 [성령강림후 열아홉째주일]

 

드디어 우리가 전심으로 응원하였던 아시안게임 여자핸드볼팀이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삼척제일교회의 이계청 권사가 이끄는 여자핸드볼팀은 9월 27일 일본 아이치현 이나자와시 엔트리오에서 열린 2026년 아시안게임 핸드볼 풀리그 최종전에서 홈팀 일본을 27-23으로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한국여자핸드볼팀은 이번 대회를 6전 전승으로 마무리하며 2018 자카르타 팔렘방대회 이후 8년 만에 아시안게임 정상에 복귀했다. 이 경기 전까지 한국과 일본은 나란히 5전 전승을 기록했는데, 한국은 홍콩을 48-16, 카자흐스탄을 42-18, 우즈베키스탄을 43-13, 중국을 37-17로 이기는 등, 압도적인 경기로 승리하였다.

4년 전 중국 항저우 경기에서 19-29로 패하여 일본에 금메달을 빼앗긴 우리 대표팀은 이번에 결승에서 승리함으로 아시안게임에서 통산 8번째 승리를 거두며 일본에 진 설움을 단단히 되갚아주었다. 언론은 이계청 여자핸드볼팀의 힘을 끈끈한 조직력, 강한 수비와 빠른 속공, 베테랑과 젊은 선수의 조화, 그리고 원팀으로 만든 우승이라고 평가하였다. 뛰어난 감독의 지도력과 용병술이 돋보인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번 아이치 나가노 아시안게임 400미터 계주에서 한국신기록을 세우면서 극적으로 동메달을 딴 선수 중에 두 선수가 눈에 띠었다. 예산군청 대표 20세의 조엘진과 안산시청의 23세 비웨사 선수다. 조엘진은 아버지는 나이지리아인인데 엄마가 한국인인 혼혈 가족이고, 비웨사는 두분 다 콩고인인데 한국에 귀화해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이라고 한다. 이들 모두 당연히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고 똑같은 한국인인데 외모만 다르다고 한다. 100m에서 입상권 바로 다음인 4, 5위를 하고, 400m 경주에서 다른 선수들과 힘을 합쳐 동메달을 따는 걸 보니 마음이 훈훈해지고, 감동이 되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이 추구하는 방향과도 같이 인류애를 바탕으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화평하고 행복하며 일치를 이루는 아시아가 되기를 바란다. 지금도 아시아는 중동에서 전쟁 중에 있고, 얼마 전에는 기후위기의 피해로 네팔에서 빙산 산사태가 나서 만여 명의 실종자와 사망자가 생겨나기도 했지만, 이런 평화의 정신이 잘 발휘되면 인류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파스칼은 ‘빵세’에서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면서, 인간은 ‘천사와 야수의 중간존재’라고 파악하였다. 그 두 마디를 종합해보면, 인간은 <천사와 야수 사이에서 있는 생각하는 존재>다. 어찌 보면 천사처럼 위대하고 고상한 존재이지만 어찌 보면 야수보다 못한 비천하고 비열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띠고 있는, 천사와 같은 존재 같다가도, 금방 욕심부리고 거짓말하고 포악을 일삼는, 동물보다 못한 존재가 또한 인간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사람들의 마음이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널뛰기 하는 것 같다. 남과 비교하는 문화 때문이다. 조금 나은 것 같으면 한없이 우월감에 빠져 자기 주제도 모르고 교만을 부리는가 하면, 조금 모자란 것이 발견되면 한없이 비참해져서 마치 낙오자라도 된 양 낙심하고 힘들어 한다. 외모지상주의라 남녀 가릴 것도 없이 외모를 꾸미느라 무리하게 수술을 하고 살빼기를 하는 풍조를 보더라도,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 같다. 경쟁에서 이기려고 스펙을 쌓아야 한다고 야단을 치는 것도 그렇다.

바울은 인간을 질그릇 같은 존재로 보고 있다. 성서는 전체적으로 인간을 악하게 본다. 말하자면 ‘성악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만큼 비관적으로 인간을 보고 있다. 인간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되며, 스스로 개선의지도 별로 없을뿐더러, 잘해보려고 해도 악하고 이기적인 욕망이 있어 항상 실패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 보면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결론으로 탄식한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늘 범죄와 맞서 싸우는 경찰이나 사법기관 사람들은 이런 말에 동의할 것 같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한심한 존재라는 것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분문에서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인간을 질그릇으로 표현한다. 질그릇은 그리 값진 그릇이 아니다. 막그릇이라고도 한다. 막 쓰는 그릇, 아름답지 않지만 그냥 아무데나 쓰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너나없이 질그릇처럼 되는대로 생겼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질그릇 같이 쉽게 깨지며 깨끗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존재입니다.’ 라고 인정하고 나가라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에 대해 치열하고도 정직하게 보면서도, 거기에서 낙심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정직한 사람일수록 우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질그릇 속에 무엇이 담겼느냐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질그릇에 라면이 담기면 라면그릇이고, 질그릇에 짜장면이 담기면 짜장면 그릇이다. 질그릇이 똥푸는 데 쓰이면 ‘똥바가지’인 것이다. 바울은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질그릇은 보배함이 된다. 그 그릇이 담긴 보배 때문에 대단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질그릇 같이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그 존재의 가치가 결정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보배를 담고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8절을 보겠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절.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결론으로 11절,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몸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를 포함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질그릇처럼 볼품없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비참하고 무가치하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어-가 아니라, 질그릇이지만 이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간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인간적인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을 육체의 몸에 무엇을 담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뛰어난 다이아몬드나 빛나는 금은 아니라도, 우리 안에 보배를 담는 노력으로 우리는 다이아몬드나 금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조물주는 사람을 다이아몬드로 만들겠다 하시지 않고 질그릇 같은 사람에 다이아몬드를 담겠다고 하셨다. 우리 거듭난 주의 자녀들은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을 담아서, 그 보배가 빛나도록 하는 사람들이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질그릇에 불과한 내가 금이 되고 다이아몬드가 되려고 돌에 갈아보기도 하고 금칠을 해보기도 하지만, 어디 칠한다고 흙이 금이 되겠는가? 위선과 거짓의 옷을 입을 뿐이다. 그 기능과 역할이 무엇이냐? 바로 금과 같고 다이아몬드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질그릇 됨을 겸허히 시인해야 한다. ‘나는 질그릇 같이 가치가 낮습니다. 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게으르며 금방 화를 내고, 남의 것을 시기합니다. 화가 나면 욕도 하고 과격하게 행동할 때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질그릇도 과분하다. 깨지고 새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내가 무엇을 그 속에 담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우리가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느낀다. 이것을 솔직히 시인하라. 그러나 질그릇 속에 무엇이 담겨있나?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는 사람도 있다. 연기나 먼지만 있다. 허무한 존재, 황당한 인간이다. 실제로 많이 배우고 나름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도 아무 생각 없이 본능과 감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많다. 또 어떤 목적의식이나 가치관 없이 상대주의에 빠져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냥 욕망만 강한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그나마 질그릇을 냄새나는 똥그릇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으면 얼마나 귀하냐는 것이다.

 

다윗은 원래 목동이었다. 뭐 특출한 목동도 아니었다. ‘그냥 목동’이었다. 기타 좀 치고 피리 좀 불 줄 아는 정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으니 대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들을 만한 정도였겠지. 그가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이 아랍에미리트 군사들하고 대치해있는 곳에 위문을 갔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주제넘게 전쟁터에 나서게 된다. 군복도 맞지 않는데 칼과 창도 없이 양치기의 물매라는 새총 같은 것을 들고 갔다. 한마디로 질그릇으로 백자를 이겨보려고 한 거다. 골리앗이라는 적군의 장수가 나와 대결을 하는데, 다윗이 이렇게 외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아주 유명한 구절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질그릇 같은 초라한 자기에게 담고 나아가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평소부터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기술을 연마한 사람이 대박 나는 사건이다. 물매라는 간단한 기구에 돌을 재워 돌리다가 던지니까 골리앗 장수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아 절명시켰던 것이다! 양치기 달인이 전쟁의 영웅이 되는 장면이다! 다윗! 대단치 않은 목동이었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나아갔다. 그러자 위대한 일을 하나님이 이뤄주시는 최고의 왕이 되었다.

 

헬렌 켈러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꼭 사흘만 눈을 뜨고 보는 것이다. 내가 만약 눈을 뜬다면, 나는 맨 먼저 나를 가르치고 깨우쳐 주신 설리반 선생님을 찾아가겠다. 내가 손끝으로 만져 보았던 그 인자한 얼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몇 시간만이라도 그저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내 마음 속에 새겨 두고 싶다. 그 다음에 친구들을 찾아가서 그 얼굴과 얼굴, 그 미소까지 새기고 그 다음에 들판으로 나가야겠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나뭇잎이며, 여기저기 피어 있는 예쁜 꽃들과 풀들, 그리고 저녁에 되면 석양에 물드는 아름다운 노을을 보아야지.

둘째 날에는 이른 새벽 동트는 하늘을 보고, 아침에는 메트로폴리탄의 박물관, 오후에는 미술과, 그리고 저녁이면 보석처럼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날이면, 이른 아침 큰길가에 나아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오전에는 오페라 하우스, 오후에는 영화관엘 가야지.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빌딩 숲속 도시로 나아가서 네온사인 반짝이는 거리, 화려한 쇼 윈도우에 진열된 각종 상품들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겠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아야 하는 마지막 시간이 되면, 사흘 동안이라도 눈을 떠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리고, 또다시 깜깜한 암흑세계로 들어가겠다.’

헬렌 켈러의 ‘한 가지 소원’이라는 글이다. 평생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3중고에 시달리던 헬렌이었지만, 하나님은 사흘만 보게 해달라는 그 간절한 기도조차도 들어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기도를 이루었다. 여전히 암흑 속에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욱 따뜻하게 품고 그리워하고 사랑했다.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새소리와 겨울바람의 추위까지 소중하게 품고 살았다. 그녀의 육체와 조건은 다 떨어져 못쓰게 된 넝마 같은 처지였지만, 그녀는 그 속에 하나님을 품고 살았다. 그랬기에 가장 아름답게 빛나고 소중하게 쓰이는 보배함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은 되었다! 헬렌 켈러 같은 위인이 평생 꿈꾸던 것을 벌써 누리고 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사흘이면 그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누가 9장, 변화산 체험이 나온다. 이전과 이후의 사건이다. 이전에는 갈릴리의 공감과 치유, 공급에 관하여 나오고, 이후에는 고질적인 유대사회와의 싸움과 진정한 구원의 도리 십자가의 길이 나온다. 이전에는 스승과 지도자로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주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 변화산 사건, <예수만 보이더라!> 그 경험 이후에 유대인들과 거친 갈등을 겪으면서 제대로 된 제자들인지 검증이 나오고, 십자가 사건으로 인류구원의 대섭리가 나온다. 예수가 제자공동체 속에 임할 때, 예수가 제대로 보일 때 진짜 사역이 시작된다. 참 제자도가 나온다. 그들에게 구원하시는 예수가 들어오시자 삶이 변화되고 의미가 달라졌다!!

여러분 안에 예수가 거하기를 축복한다! 이 보배를 질그릇데 가졌으니!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할렐루야!!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성서조선>이라는 신앙잡지를 발행하셨고, 휘문고의 선생님이기도 했던, 김교신 선생은 1901년부터 45년까지 짧은 인생을 살면서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해 우리말 성경을 읽고 연구했으며, 성서조선을 27년에 창간했고, 42년 폐간당할 때까지 글로써 성서의 진리를 외치고 이 민족을 구원해 내려는 일을 하신 민족의 스승이다. 그의 글 <여시아신: 나는 이와 같이 믿는다>에서 그는 “크거나 작은 일에 모조리 신앙 제일주의의 생활 체제를 확립해야겠다.”, “일요일을 영의 일에, 생명의 일에, 영원한 일에 거룩하게 구별하고자 하면, 토요일을 예비해야 하겠고 토요일의 예비를 완전히 하려면 나날의 생활을 신앙 제일주의로 돌진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전업목회자가 아닌 생활인이었고, 생활 속에서 질그릇 같은 자기 인격에 예수를 모시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가 약한 질그릇임을 시인하자! 그러나 질그릇인 우리에게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으면, 보배함이 될 것이다. 인간은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나는 깨진 막그릇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주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우리는 보배를 담은 그릇이 될 수 있다. 오늘도, 이번 주간도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 보배를 담으시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를 써가시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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