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문
| 설교일 | 2026-10-18 |
|---|---|
| 설교말씀 | 마22:15-22 |
| 설교제목 | 두 도성 (세속과 거룩) |
두 도성 (세속과 거룩)
마22:15-22
2026년 10월 18일 [성령강림후 스물한째주일]
오늘 설교는 어거스틴의 <거룩한 도시> 개념을 마태복음 말씀에 적용해 본 것이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다. 누군가가 믿음에 대한 여러분의 기본적인 태도가 어떠냐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께 속하였는가? 아니면,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께 속한 것은 아니고 자본주의 질서와 물질을 위주로 한 이기적인 세상에 속해있는가? 교회 다니면서도 깊은 마음 속에 하나님과 세상 가운데 저울질을 하면 세상 쪽에 중심이 가있는 사람들이 상당수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맞냐는 확인을 하고 싶어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21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는 말씀은 단순히 관공서에다가는 세금을 잘 내고, 하나님께는 헌금을 잘 드리라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에는 국가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책임, 세상 권력의 한계,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인 소속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성실한 크리스천은 이런 문제가 고민스럽다. 이 문제는 사회와 교회의 관계성의 문제요, 현실 정치와 공직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살 것이냐 하는 실제적인 문제와도 연관이 되고,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데에 있어서 거룩한 나라인 교회와 세속의 나라인 사회 사이에서 어떤 입장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상과 국가는 불완전하고 죄에 매여있으며 따를 수 없는 악한 권력이라고 보면, 우리는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항거해야 마땅할 것이다. 몇 년 전에 우리를 당황케 하였던 코로나 시대에도 우리는 정부나 공무원에 협조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타협하거나 쉬지 말고 기도하는 일에만 치중했어야 했다. 반대로 만약 이 세상과 국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이 세속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선한 양심의 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세속 정부나 공무원들의 지침을 잘 협조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두 도성에 속하여 있다. 한편으로는 세속의 도시에, 한편으로는 거룩한 도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참되게 사는 것일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먼저 알 것은, 이 말씀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정치·종교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바리새인들은 헤롯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질문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는 교묘한 함정이 있다. 세금을 바치라고 대답하면: 로마의 지배를 싫어하는 유대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을 수 있었다.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 당국에 반역을 선동하는 혐의로 고발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느 쪽에도 걸려들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신 후 물으셨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사람들이 “가이사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씀은 정치적인 함정을 뛰어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가르치신 위대한 선언이었다.
첫 번째 의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말씀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정당한 책임을 인정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세상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거나 사회적 의무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3장 7절에서 말씀한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시민이다. 그러므로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하고, 법을 존중하며, 사회적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예수님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셨지만, 가이사를 하나님처럼 섬기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국가의 권위는 인정하지만 국가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가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강요할 때 그리스도인은 국가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사도행전 5장 29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한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따라서 이 말씀은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되 무조건적인 복종을 명령하는 말씀은 아니다.
두 번째 의미: 동전에는 황제의 형상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이것이 이 말씀의 가장 깊고 중요한 신학적 의미이다. 예수님께서는 동전을 보시고 물으셨다. “이 형상이 누구의 것이냐?” 동전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을 황제에게 돌려주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누구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가?” 창세기 1장 27절은 말씀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동전에는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은 황제에게 돌려주어라.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너 자신은 하나님께 드려라.”
이것은 본문에 직접 기록된 문장은 아니지만, 창세기의 인간 창조와 연결하여 해석할 때 발견할 수 있는 매우 깊은 신학적 통찰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 단순히 돈이나 재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 시간과 재능,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를 원하신다. 로마서 12장 1절은 말씀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따라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헌금만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세 번째 의미: 세상의 권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에는 한계가 없다.
이 말씀을 국가와 종교의 영역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누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정치와 경제는 국가의 영역이고, 예배와 기도는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종교적인 영역만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시편 24편 1절을 보면,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가이사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국가도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앞에서 심판받아야 한다.
가이사는 세금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가이사는 인간의 영혼을 소유할 수 없다. 가이사는 법을 제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가이사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가이사는 인간에게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궁극적인 충성과 경배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 세상 권력은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중요한 원리이다.
네 번째 의미: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책임을 지고 살아가지만 궁극적인 주인은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두 가지 책임을 감당한다. 하나는 세상을 향한 책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책임이다. 세상에서는 정직한 시민으로 살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충성스러운 신앙인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두 책임이 언제나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요구와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우선한다.
예를 들어 국가가 정당한 세금을 요구한다면 납부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불의한 일을 행하도록 명령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양심과 믿음에 따라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정권 아래에서 국가 권력의 절대화를 거부하고 나치에 목숨 걸고 항거함으로 신앙적 책임을 실천했다. 그의 삶은 국가에 대한 책임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충돌할 때 그리스도인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각 사람이 국가 권력에 복종함으로 사회적 질서를 따라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크리스천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의 사법적 권력을 통해 선이 포상받고 악이 징벌받으며 사람들의 기본생활이 유지된다. 국가에는 다양한 대표자들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응당하게 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하나님께만 복종하고 세상권력에는 협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국가와 도시의 시민으로서 마땅한 의무와 역할을 다해야 한다. 시민의 역할을 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는 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동시에 기억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집은 저 하늘에 있다. 세상은 잠시 머물 곳이요, 세상나라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항상 부족하고 죄의 지배를 받는 나라이다. 우리는 크고 완전한 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 때, 종말론적 태도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그게 뭐냐 하면, 종말이 곧 온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며 철저한 믿음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올인하며 거룩한 기준으로만 살 것이냐, 동시에 세상에서 선한 시민으로 살 것이냐? 그것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사는 한 거룩한 도성인 교회와 세속의 도성인 사회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는, 두 도시 사이에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지고 이루도록 힘쓰면서, 동시에 죄 많은 현실 사회에서 해야 할 선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득불 두 세상의 요구를 들으며 살아야 한다. 로마의 화폐로 세금을 바치는 것은 세속 정치에 굴복하는 것인가? 로마제국과 기독교제국을 대립되는 개념으로만 보지말라! 어거스틴은 <거룩한 도성>이라는 책에서, 거룩한 도시와 세속도시를 말하면서,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거룩한 도성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똑같이 살지만, 속이 다른 사람이다. 거룩한 도시의 개념과 사상,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거룩한 도시의 개념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고 더 반듯하게 서도록 하는 것이 신앙인이다. 현실을 무시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현실을 바로 잡고 더욱 살아있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두 도성 (거룩과 세속)
사실 이 땅위의 제국과 도시는 누가 세웠나? 인간이 세운 것 같지만, 인간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문제는 인간에게 맡겨진 이 세속도시가 완전하지 않고 타락되었다는 데 있다. 세상의 제국과 도시는 인간의 욕심과 폭력, 거짓과 싸움이 난무한다. 성도는 제국과 도시의 시민으로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굴복은 아니다. 계21장을 보면, 종말론적 새예루살렘 도시의 미래는 바로 현재의 제국과 도시를 변화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선교의 비전이자 종말론적 신앙의 완성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고, 세상의 의무와 질서를 따르면서, 세상을 이용하고 세상에 적용해야 한다. 세상 황제, 권력자, 부자는 세상 로마의 질서를 유지하고 전쟁을 수행하며 백성들을 통치하였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세금이다. 유대인들과 당시 로마의 이방 사람들은 로마의 보호 아래 살았다. 바울의 복음도 로마의 대로를 따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원칙을 따라 세계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세속 문명을 복음의 도구로 사용할 지혜와 통찰력이 필요하다.
예수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속 세상의 질서를 그대로 인정하신다. 그당시 급진파 젤롯당은 로마황제에 내는 세금을 반대하고, 절대 타협불가를 외치며 싸웠다. 예수와 예수의 교회는 로마황제에 내는 세금을 반대하는 젤롯당은 아니다. 그러나 젤롯당에게 배울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간직하고 우선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나라 질서와 꿈을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 가운데 살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삶의 우선되는 일이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파묻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거룩한 도성의 꿈을 잃어버리고 세속의 도시에 모든 것을 바쳐버린다. 요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속한다! 바울이 그들을 향해 안타까이 외친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8-19)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20)
하나님의 것이 무엇일까?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숨결인 생명이다. 생명 속에 영원이 깃들어 있다. 하나님의 초월존재가 깃들어 있다. 곧 태초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형상이다. 세상의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들과 창조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생명과 영원을 보호하고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영생과 지혜를 전하기 위해 교회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오늘 성경이 하려는 말씀은?
오늘 성경이 하는 말씀은, ‘우리는 두 도성 앞에 서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할 때에도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발은 이 땅 위에 서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땅에서 거룩한 백성의 삶을 바로 살 것인가? 우리는 거룩한 도시,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세속 도시, 대한민국 삼척시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세상의 법, 세상의 상거래, 세상의 방역 질서, 세상의 교육체계를 따라 살아야 하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 종말에 이뤄질 하나님 질서에 맞게 사는 것, 거룩한 기준에 올인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크리스찬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대립하고 있는 두 세계를 질서있고 조화롭게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서기 251년, 홍역이 로마제국을 강타했을 때, 사람들은 큰 고통과 불안을 겪었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마을은 적막해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기독교가 크게 부흥했다고 한다. 당대의 기독교인들은 지쳐있던 이들에게 천국의 소망으로 위로와 치유를 베풀었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펴서 아픈 자들을 간호하고 봉사했다. 이러한 사랑과 구제의 현장을 지켜본 율리우스 황제는 원래 기독교를 미워했었으나, 그 마음을 바꾸어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교도들에게도 간호를 베풀며 다른 사람들도 품을 수 있는 종교임을 보여준 것이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4-5년간 지속되었던 코로나시기에 한국의 기독교는 어떠했나? 이기적인 집단이 아니었나?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이뤄지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았나?
로마제국의 데나리온 동전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있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동전은 황제의 이름으로 통용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한다.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진 은전으로 로마의 세금을 납부하듯이, 우리는 세상 질서를 존중하고 책임을 성실히 다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고, 한다. 우리의 시간, 물질, 재능, 사랑, 그리고 남은 생애까지 드려, 세속도시를 거룩한 도시로 이끌어가야 한다. 특별히 인생의 후반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더욱 신중하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라는 말씀에 깊은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

댓글